(젊은 ADHD의 슬픔, 정지음)
브런치에는 글쓰는 사람들이 잔뜩 모여있다. 브런치에 글을 쓰려면 브런치에 원고를 보내 통과해야 한다. 통과되면 뭔가 공인받은 듯 은근히 기쁜다. 매년 브런치출판프로젝트를 한다. 선정작은 출판사에서 출간을 진행한다. 이 책은 2020년 제8회 출판프로젝트 대상작이다.
이렇게 정지음 작가는 브런치에 글을 쓰고 쓴 걸 모아서 응모해서 대상을 받았다. 작가가 되려기보다는 그저 스마트폰으로 뭔가 생산적인 걸 해보려고 글을 썼다고 한다. 스마트폰으로 등단한 거나 다름없다. 놀랍다. 민음사 인터뷰를 통해봐도, 소소한 그의 방과, 수수한 옷차림이 책에 있는 정지음과 딱 맞아 떨어진다. 읽으면 은근히 빠져든다. 책을 떠날 수가 없게 된다.
정지음 작가는 글을 쓰면 약간은 환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고 썼다. 나도 그렇다. 나는 블로그에 뭐라도 쓸 때 생각이 넓어지고, 다양한 시각으로 나를 관찰하게 되고, 그러니 자연스럽게 창조적이 된다. 내가 조금은 괜찮은 사람이 된 것 같다. 조금 심해지면 가끔은 자뻑모드에 빠진다.
ADHD인 정지음 작가는 스스로 관여하지 않은 모든 소리를 견디지 못한다고 했는데, 나도 그렇다. 나도 소음에 극히 민감한데, 소음은 많이 만들어 낸다. 아이들이 내게 불공평하다고 투덜거린다. 아이들이 항의가 백번 맞지만, 견딜 수 있느냐 없느냐는 이성적인 게 아니지 않는가. 활기찬 가정을 위해 나는 가방을 싸 도서관으로 간다. 이상하게 도서관의 백색소음은 책 읽기에, 글쓰기에 참 좋다.
10월 24일까지 브런치 응모기간인데, 나도 한 번 제출해볼까 생각중이다.
https://blog.naver.com/pyowa/222530261265
=============<이하 발췌>
ADHD 진단 후 내 인생은 망한 것처럼 보였다. 정확히는 망한 걸 빨리 깨달아 손해 본 느낌이었다. 검사를 안 했다면 익살스러운 멍청이로 천년만년 행복하지 않았을까? 겁이 많아 성공하지 못했지만, 어떤 밤의 어떤 마음이 자해로 이어지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비상시에 먹으라는 사용법을 들으면 모든 순간을 비상시로 끌어올릴 것이었다. 규칙을 지킴으로써 규칙을 기만하는 것은 내 오랜 나쁜 습관 중 하나였다.
땅바닥에서 보는 사람들의 턱은 무척 크고 뾰족했다. 커진 턱들은 나를 내려다보며 무심한 시선을 줄 때만 잠시 작아졌다. 생경한 앵글 속에서 지금까지 한 번도 제대로 주저앉아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그때, 너무 힘든 사람에게는 힘들지 말아야 할 이유가 들리지 않는다는 걸 배웠다. 그럼 어떻게 해 줘야 하냐고? 모른다. 죽어서 갈 지옥은 어느 정도 정형화되어 있는지 몰라도 사람이 자기 안에 스스로 만든 지옥은 겉에서 가늠조차 할 수 없다.
가끔은 슬픈데도 잡생각을 한다는 것 때문에 슬픔의 진위를 의심하게 되었다.
ADHD 진단을 받으면 삶의 모든 대안이 ADHD 식으로 변경된다. 자신의 행동 단서를 ADHD에서만 찾게 되므로 삶의 주권을 빼앗긴 듯 느껴지기도 한다. 나의 큰 실수는, ADHD가 아닌 모든 인류를 정상인으로 분류했다는 것이다. 단지 ADHD가 아닐 뿐 다들 제각기 미쳐 있는 세상이다. 누가 누구에게 충고하고, 누가 누구를 구원할 수 있을까?
ADHD 구제법은 몰라도 파멸법 하나를 알고 있다. 그들 옆에서 반복적인 소음을 생성하면 된다. 나는 내가 관여하지 않은 거의 모든 소리를 못 견뎠다. 노이즈 캔슬링 헤드폰으로 방어도 해 보았다. 하지만 모든 사회생활에서 허용되는 방식이 아니었고, 들어야 하는 소리들도 전부 놓친다는 단점이 있었다.
남는 시간에 글을 쓰자 갑자기 내가 멋있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런 착각을 반드시 말살하는 부정적인 인간이었는데, 글을 쓰느라 머리를 쥐어짠다는 이유로 약간은 환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 같았다. 나의 경우는 쓴다. 씀으로써 내가 무엇을 느끼는지, 무엇을 감추는지 혹은 드러내고 싶은지 알아 간다. 외부에서 침투하여 내면의 자신을 알아 간다는 건 너무 재미있는 일이다. 데면데면한 동거인 같았던 외면적 나와 내면적 내가 일종의 한 팀이 되어 협력하는 느낌이 든다. 깊이 들어갈수록 나의 새로운 모습을 보게 된다.
말로 된 실수를 했을 때, 풍부한 어휘는 싸한 국면을 반전시키는 수단이 된다. 어휘가 많으면 유머가 많아지고, 유머가 성공할 확률도 높아지기 때문이다.
부자라는 건 적은 시간을 돈으로 치환하는데 익숙한 종족인 듯했다. 내가 가난에 무능을 의탁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가난은 좋은 핑계였다. 돈이 없어서 곤란하기도 했지만, 곤란한 일들의 범인으로 돈을 모함한 적이 훨씬 많았다. 그렇다면 내 인생의 범인은 다시 나였다. 한때는 마인드조차 일종의 재화이고, 내 몫으론 그런 게 하나도 주어지지 않았다며 원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