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위안, 송호성)
독서의 위안을 읽고 있다. 저번에 '돈에 대해서'라는 7페이지를 읽고도 놀랐었는데, 읽을수록 대단한 책임을 알겠다. 송호성 작가는 자신의 언어와 자신의 통찰로 글을 써나간다. 성숙도가 낮으면 그저 접근 각도만 달리하기 쉽다. 그러면 '참신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이 책은 대단하고, 놀랍다. 문장하나 허투루 쓰인 곳이 없다. 문장을 보면, 단어하나 조사하나 허투루 쓰인 곳이 없다. 진한 농도의 문장이다.
나는 내용도 중요하지만, 문장을 중요하게 여긴다. 문장이 좋은데 내용이 나쁠 수 없으며, 좋은 책인데 문장이 나쁠 수 없다. 우리의 생각이 문장이기 때문이다. 언어의 확대와 섬세함은 의식을 진화시키고, 직관을 만든다.
<독서의 위안, 송호성>
나는 책읽기와 글쓰기를 좋아한다. 왜 읽고 쓰는가? 나는 생각하려고 읽는다. 더 잘 생각하려고 쓴다. 더 잘 생각하면 뭐가 달라지는가? 생각하는 만큼 내가 존재하므로 더 의미있게 존재할 수 있다. 조금 더 섬세한 언어로, 섬세한 감성을 가진 나로 존재할 수 있다. 언어가 곧 내 운명이다. 결국 죽음으로 사라지겠지만, 존재하는 동안은 불멸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면서 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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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 발췌>
지금의 나 자신보다 훌륭한 그 미지의 존재를 꿈꾸는 것은 인간에게만 주어진 특권이다. 한 개인은, 그 개인이 스스로에게 요구하는 만큼의 가치, 바로 그것이다.
영원성이 아니라 성숙함이 인류의 목표였다. 불멸이 아니라 지속적인 진보가 개인에게나 집단에게나 최고의 목표였다. 종말을 거부한다고 해서 그 자리를 불멸이 대신하는 것은 아니다. 거부는 하나의 의지이지만, 불멸은 끊임없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의식의 확대는 곧 의식의 진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의식이 진화한다는 건 성숙해진다는 걸 의미한다. 직관 능력이 좋아지는 건 이 때문이다. 명석한 언어가 명석한 사고를 가능하게 하고, 섬세한 언어가 섬세한 감성을 가능하게 한다. 우리의 언어가 곧 우리의 운명이다.
범인에게는 삶으로든 창조로든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해 낼 수 있는 능력이 없다. 비극을 인식하는 인간만이 비극에 대항하는 특권을 부여받는다.
위대한 인물들이 추구했던 것은 영생이 아니라 불멸이었다. 영원히 사는 삶이 아니라,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 삶을 꿈꾼 것이다. 그들은 유령이 되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역사가 되고자 했던 것이다.
세월은 늙음이며, 곧 죽음이다. 이것은 일종의 비극이다. 삶과 운명에 대해 무언가를 알게 됐을 때, 결국 인간은 죽음이라는 이름으로 소멸하게 된다. 세월을 담보로 해서 획득한 지혜도 같이 소멸하기에 비극인 것이다.
시인에게는 과거의 과거성만이 아니라 과거에 담긴 현재성까지도 인식하는 역사의식이 필요하다. 현재만이 아니라 과거의 현재적 순간까지 함께 살지 않는 한, 그리고 과거란 죽은 것이 아니라 앞서 있었던 단지 과거에 불과한 현재임을 지각하지 않는 한, 시인은 비개인성을 성취하지 못한다.
사람들은 시간을 의식하기보다는 공간에 익숙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바로 이러한 현실이 인간의 운명을 좌우한다. 시간은 죽음을 가져다 주는 동시에 성숙함을 가져다 준다. 성숙이란 목표인 동시에 과정이며, 나에게 없는 어떤 것을 꿈꾸는 게 아니라, 내 안에 내재하는 가능성을 밝혀내는 일이다. 성숙한 안목은 현저한 차이는 물론이고 민감한 차이도 읽어낼 줄 아는데, 바로 여기에 진정한 기쁨이 숨어 있다고 철학자들은 강조한다.
인간은 노력하는 한 방황한다고 괴테는 말했다. 인간은 의지가 표현되는 범위 내에서만 방황할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최초의 인간(막 태어난 아기)은 방황하지 않는다. 그리고 최후의 인간(죽음을 앞둔 노인) 역시 체념할 뿐 방황하지 않는다. 진지한 방황을 남다르게 경험한 개인은 그만큼 많은 고뇌를 대가로 지불한 자이다. 고뇌는 지불될 뿐, 보상을 요구하지 않는다. 어떤 상황과 직면해서는 고뇌하는 것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기에 고뇌할 뿐이다. 고뇌는 인간의 불완전함을 보완한다.
행복한 운명이라는 표현은 어색한 표현이다. 다만, '행복했던 순간'만이 존재할 뿐이다.
악마는 항상 뒤에서 덮쳐 오는 법이다. 따라서 방심은 금물이며, 심각한 무능이다. 순진해서도 안 된다. 아마도 악마는 무능의 총계이다. 혹은 악마는 인간을 좌절시키는 힘의 총합이다.
집단은 고뇌하는 능력이 없다. 집단은 스스로 팽창하려는 속성이 있을 뿐이다. 고뇌는 언제나 개인의 몫이었다. 그런데 대중문화는 개인을 집단화시키는 경향이 있다. 탐욕은 집단화된 개인을 어떤 저항도 없이 쉽게 타락시킨다. 집단화된 개인은 집단화된 감정과 집단화된 사고에 지배당한다. 누구나 다 비슷한 말을 하고, 비슷한 생각을 하는 데 익숙해지는 것이다. 통속성은 인간과 인간의 차이를 없앤다.
신념을 갖는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신의 신념이 구체성을 확보했는가가 중요한 것이다.
인류라고? 천만에! 그것은 추상물에 지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