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ple'은 그간 여자친구가 보여주었던 음악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곡으로, 8분의 6박자로 흐르는 스타일리시한 셔플 그루브의 슬랩 베이스에서는 오히려 f(x)가 연상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몽환적인 기타 아르페지오가 만들어내는 공간감 넘치는 사운드는 대단히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레트로한 질감의 PCM 신디사이저는 화음을 한껏 넣어 매끈하게 빚어낸 멜로디라인과 절묘하게 어우러지며 곡의 독특한 음향적 개성을 형성한다. 마녀들의 노랫소리를 형상화한 보컬 찹 사이로 드럼이 떨어질 때 동시에 조용히 단어를 읊조림으로써 그루브를 만들어내는 코러스는 곡의 백미. 여자친구라는 그룹의 비주얼에 이러한 마녀 콘셉트가 어울리는지를 떠나서 'Apple'은 곡 자체로 너무나도 매력적인 팝 싱글이다. 여자친구만의 색깔은 찾아보기 어렵지만 이 정도로 빼어난 완성도라면 넘어가줄 수 있다. 그들의 소속사인 쏘스뮤직을 방탄소년단의 빅히트 엔터테인먼트가 인수한 성과는 분명히 가시적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 근거를 원한다면 'Apple'을 들으라.
현재 힙합 씬에서 가장 뛰어난 기량을 보여주고 있는 프로듀서 그레이(GRAY)가 참여한 '10억뷰'는 들썩이는 디스코 리듬과 펑키한 베이스 사운드가 두드러지는 싱글이다. 하지만 사운드의 매끈한 만듦새와는 달리 멜로디의 직접적인 매력은 덜하고, '넌 나의 인생곡'이라는 비유로 '10억뷰'를 외치는 코러스는 다소 헐겁고 애매하다. ASMR, 4K 고화질 캠, 웹드라마 등 K-POP 산업과 유튜브 시대의 언어를 일차원적으로 비유한 랩 가사 역시 곡의 흐릿한 인상을 개선하는 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
귀에 쏙쏙 박히는 그루비한 기타로 벌스를 이끌어간 이후에 코러스에서는 선명한 신스를 휘몰아친다. 두 번째 코러스부터는 레트로풍의 강렬한 신스가 넘실대는 리듬 위에 또렷하게 박힌다. 시원시원하게 뻗어 나가는 정세운의 보컬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곡을 소화한다. 구성이나 사운드나 여러모로 그의 전작 'BABY IT'S U'를 연상시키는 'Say yes'는 풍족하지는 않지만 듣기 좋을 만큼 채워 넣은 사운드 구성으로 꽤나 즐거운 감흥을 선사한다.
크러쉬는 1집 'Crush On You'에서 R&B와 팝을 절묘하게 결합시키며 트렌디하고 매력적인 수작을 만들어낸 바 있다. 이어 그는 2집 'From Midnight To Sunrise'에서 리얼 세션을 동원해 80~90년대풍 R&B를 재지한 프로덕션으로 구현해내는 방향으로 음악적 노선을 틀었지만 정통 알앤비를 한국에서 시도했다는 장르적 상징성 이외에는 큰 매력을 지니지 못한 채 절반의 성공에 머무르고 말았다. 이는 깔끔한 프로덕션에 대한 천착이 낳은 캐치한 멜로디의 부재 때문이었다. 그러나 크러쉬는 'OHIO'에서 이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어느 정도 찾은 것으로 보인다. 재생 버튼을 누른 지 1초 만에 청자를 빨아들이는 매혹적인 리듬과 함께 재지한 피아노와 크러쉬의 짙은 보컬이 치고 들어오는 도입부의 흡인력은 압도적이다. 때로는 보컬을 랩으로, 때로는 드럼 루프를 클랩으로 변주하며 곡을 자유자재로 갖고 노는 프로덕션 역시 매우 인상적이다. 전작의 약점이었던 캐치한 멜로디도 놓치지 않고 '오디 오디 오하이오'라는 직관적인 코러스를 배치했다. 제 무대인 양 리듬 위를 노니는 피아노와 반 음 단위를 넘나드는 크러쉬의 섬세한 보컬이 최대의 역량을 발휘한 싱글 'OHIO'는 크러쉬의 또 한 번의 스텝업을 드러내는 원숙하고 노련한 넘버다. 진정한 장르적 쾌감을 안겨 줄 수 있는 한국 R&B 싱어의 이름을 대 보라. 적어도 크러쉬가 첫 번째로 등장할 것임에는 의심이 없다.
K-POP 씬의 음악적 성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는 작곡 팀 모노트리의 일원인 G-High가 프로듀싱한 '하나 둘 세고'는 누가 들어도 모노트리의 노래라고 예감할 수 있을 만큼 모노트리의 색깔이 진하게 묻어나는 곡이다. 펑키한 기타와 가벼운 질감을 가진 피아노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벌스에서 무드를 쌓아 올리다가 부드럽고 유려한 멜로디로 코러스를 채운다. 개성보다는 부드러운 하모니를 의도한 보컬 디렉팅과 밝은 브라스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사운드는 군더더기 없이 조화롭다. 그러나 유려한 곡과는 별개로 '하나 둘 세고'를 들은 후 인상에 남는 것은 TOO가 아닌 모노트리일 뿐이다. TOO라는 팀의 음악적 지향과 개성을 분명하게 확립하고 작품에 녹여 낼 필요가 있다.
정은지가 K-POP 아이돌 중에서 손꼽히는 보컬리스트임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그 재능에 비해 항상 곡의 퀄리티는 아쉬웠고, 완성도를 떠나 프로듀싱의 기본적인 방향조차 그녀의 보컬을 부각시키는 데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런 의미에서 'AWay'는 드디어 정은지의 가창력을 증명하는 데에 성공한 싱글이다. 청량한 일렉 기타 연주 위로 시원하게 쭉쭉 뻗어 나가는 그녀의 보컬은 분명 인상적이다. 그러나 큰 개성이나 변곡점이 존재하지 않는 곡은 여전히 희미한 인상으로 남는다. 정은지는 테일러 스위프트나 에이브릴 라빈의 발자취를 따라가기보다는 정은지가 되어야 한다. 긴 커리어에도 불구하고 최고의 기량을 선보일 수 있는 장르를 아직 찾아내지 못한 것은 그녀의 큰 약점이다.
장안의 화제를 몰고 왔던 Mnet의 오디션 프로그램 '프로듀스 48'의 참가자 알렉스 크리스틴의 솔로 프로젝트 AleXa(알렉사)는 K-POP 씬에서 거의 유일무이하게 'Bad Bitch' 콘셉트를 밀고 있는 아티스트다. 그러나 무거운 덥스텝 사운드에 'Call me a villain, I'm a bad 빛'이라는 노골적인 가사를 뱉으며 도발적인 이미지를 형성하는 '빌런'은 그녀의 콘셉트를 어필하기 위한 수단일 뿐 음악적으로 큰 가치는 없다. 무거운 사운드를 돌연 걷어내고 밝고 가벼운 신스가 들어오는 브릿지의 변주는 부자연스럽고 어색할 뿐이다.
음악으로 성공하기는 가망이 없으니 공사장에서 벽돌이나 나르라는 잔혹한 밈(meme)을 유쾌하게 응용해 도리어 자신의 캐릭터로 유머러스하게 전유한 래퍼 오담률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태도는 대견하다. 그러나 라틴풍의 기타를 주된 소스로 활용한 싱글 '건축학개론'은 인터넷 밈이 현실 세계에서 대상에 의해 구현되었다는 묘한 쾌감 이외에는 큰 인상을 받을 수 없다. 오담률의 랩-싱잉은 헐겁고, twlv의 맥없는 피처링 역시 존재감이 부족하다.
최근 빌보드에서 유행하는 릴 베이비(Lil Baby) 혹은 거너(Gunna)의 사운드를 쏙 빼닮은 랩과 비트 탓에 '피투성이'는 뚜렷한 인상을 남기는 데에는 실패한다. 그러나 오토튠을 가미한 수퍼비의 안정적인 래핑과 멜로디메이킹은 여전히 유효타를 기록하고 힙한 플루트 샘플을 활용한 비트 역시 매력적이다. 아우트로를 색소폰 연주로 마감함으로써 독특한 끝맛을 남기는 '피투성이'는 임팩트는 부족하지만 탄탄한 기본기가 묻어나는 싱글이다.
2020년 상반기를 뜨겁게 달군 예능 프로그램 MBC '놀면 뭐하니'가 야심차게 출범시킨 프로젝트 그룹 '싹쓰리'를 K-POP의 영역에 포함시켜야 하는지는 모호하다. 그러나 거의 모든 K-POP 차트를 '싹쓸이' 하고 있는 만큼 K-POP을 다루며 싹쓰리를 언급하지 않고 넘어갈 수가 없다. 그들의 야심찬 데뷔곡 '다시 여기 바닷가'는 90년대의 댄스 가요를 그대로 옮겨 놓은 레트로풍의 넘버다. 하지만 그대로 옮겨 놓았다는 것은 그 사이 약 30년간의 대중가요의 발전을 반영하지 않았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 말대로 '다시 여기 바닷가'는 과거의 향수를 자극하는 데 그칠 뿐, 2020년에 이 노래를 독립적인 싱글로서 즐겨야 할 가치는 제시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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