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필영 Jan 02. 2021

전봇대는 알고 있다

 '내가 영화를 만든다면 주인공은 꼭 전봇대로 해야지.'



 친정집 앞에는 커다란 전봇대가 있다. 전봇대에 대해 아는 것은 별로 없지만, 그 전봇대는 다른 전봇대보다 상당히 둘레가 굵다. 가족이나 애인이었던 남자가 집 앞에 주차한다고 후진을 하면 띠 띠디 경보음이 울리고 차 네비 화면에는 그 전봇대가 뜬다. 그래서 그곳에 전봇대가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을 텐데 여태 한 번도 그것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사귀자는 말과 동시에, 아니 거의 동시에 행동이 변한 남자가 있었다. 아마 그도 스스로가 그럴 줄 몰랐겠지. 썸을 탈 때와 연애는 아무래도 다르니 그로서는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렇게 변해가는 동안 나는 아주 초창기에 눈치를 챘지만 오로지 눈빛으로도 느껴지는 것이었기에 그걸 누군가에게 말하기는 모호했다. 그러던 중 딸기를 가지고 그에게 가는 날 헤어지고 말았다. 딸기는 그에게 주고 빈손으로 털털 걸어 집 앞으로 갔을 때 전봇대가 어김없이 보였다. 노란 가로등에 비춰서 약간 노르스름한 전봇대를 보자 마음이 그래도 좀 다잡아졌다.


 ‘그래도 집에 들어가자.’     


 새벽 녁 집 앞을 지키는 강아지까지 잠이 들고 멍하니 계단에 앉아있다 보면 전봇대가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내 마음을 전해 본 적은 없지만 아무래도 같이 봤으니까 전봇대는 모든 상황을 다 알고 있다. 게다가 나보다 훨씬 크고 높으니 기억나지 않는 많은 밤. 내가 얼마나 슬펐는지, 얼마나 가벼운 웃음을 많이 지었는지. 누군가와는 싸웠고 누군가와는 포옹했는지. 필름이 끊긴 날 나는 기억나지 않은 내 꼬장들까지 전봇대는 다 보았겠지.     

 ‘내가 영화를 만든다면 주인공은 꼭 전봇대로 해야지.’     



요즘 친정집 근처로 이사를 오는 바람에 가끔 오다가다 그 전봇대를 만난다.     

 

 ‘너는 요즘 심심하겠네. 나는 요즘 편안해.’     


 아마도 누군가 술 취한 밤, 우리 집 전봇대는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겠지. 넓은 둘레만큼이나 큰마음으로.

작가의 이전글 스물넷에는 뭔가가 되어있을 줄 알았는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