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그렇게 말하면 옷가게 주인들은 ‘아,’하는 소리를 내며 다른 색 옷을 보여준다. 나이가 들면서 좀 더 화사함에 집착한다. 검은색 옷을 입는다고 사람이 검어지는 것도 아니고 피부가 칙칙해지는 것도 아닌데. 집 옷장 문을 열어보면 수많은 베이지와 회색이 있다. 흰색은 부담스러워 잘 못 입지만 아이보리색이나, 조금 더 진한 베이지는 화사한 느낌이 좋아서 많이도 샀다. 거기에 비해 검정 옷은 계절별로 상갓집 갈 때 입으려고 산 것 말고는 없다.
어느 순간부터 어두운 느낌을 피하게 되었다. 집을 선택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흰 벽지와 흰색에 가까운 나무 결의 바닥.
“집이 엄청 넓어 보이고 밝아 보인다. ”
“역시 화이트가 대세야.”
해가 길게 들어오는 남서향 집의 소파에 앉아서 사람들은 다들 집을 잘 골랐다면서 칭찬해주었다. 육십이 넘는 엄마도 더 심했으면 심했지 마찬가지였다.
“화사한 게 제일이지.”
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더니 얼마 전 이사한 집도 벽이 흰색, 장판도 완전히 흰색이었다. 코로나가 심해져서 커피숍을 못 갈 때면 프린트기를 엄마 집에 나 두고 작업을 했다. 희색 집에서 흰색 집으로 왔다 갔다 하는 사이 계속 마음이 동동 떠다녔다.
가족 중 누군가가 아프고 난 뒤부터 내 안의 어둠을 인정하게 되었다. 누구나 그런 부분이 있다는 걸 믿게 되었다. 10년 넘게 하고 있던 단발을 축 쳐지는 긴 머리로 길러 보기로 했다. (늘 하던 말이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길러보기도 했다. 우중충해도 자연스럽게 가보자. 검정 옷을 입고 긴 머리도 하고. 일부러 웃지 말고 어정쩡한 표정으로도 사진을 찍어보고. 나이 들수록 피하려고 하는 것을 받아들여보자.
최근에는 이사를 하면서 어두운 색의 바닥을 깔았다.
“좁아 보일 텐데.”
“집이 어두워 보일 텐데.”
“칙칙하지 않아?”
주위에서는 수많은 우려가 있었고 아이들은 흠집을 내기 바쁘지만 나는 어두운 마루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차분해진다. 확실히 내 안에는 어둠이 있고 그것에 자부심을 가지기로 했다. 누군가에게 최고의 모습을 항상 보여줄 필요가 있었을까. 이 길은 내가 걸어가는 길이고 이 집은 내가 쉬는 공간이다.
나는 어두운 바닥 색을 좋아하고, 불 켜지 않은 집에서 밖의 밝기에 따라 집의 밝기가 변하는걸 멍하게 보는 걸 좋아한다.
밝은 모습만으로 누군가를 대했던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상대방들은 그 숨겨진 조각들을 찾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내 어둠의 조각을 드러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