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집 사거리

달라지고 사라지는 그 사거리

by 김필영


나는 모래로 가득한 시골길 보다 도로 옆으로 난 길을 좋아한다. 그 일직선으로 이어진 길을 걸으면서 때때로 신호등도 만나고 의미 없이 그 신호등을 지나가고 어떤 가게를 들어가 보고 밤이면 가게들의 간판을 쳐다보는 걸 좋아한다. 어떤 결정을 내리는 것보다 그냥 그 상황이나 현상을 바라보는 걸 좋아한다. 오후 6시쯤 하나씩 불이 켜지던 가게, 그 안의 사람들, 그리고 지나가던 사람들.





그때 자주 가던 막창집은, 사거리에 있었다. 그 사거리 모퉁이에 그 막창집이 있고 옆에는 닭발집이, 그 옆에는 횟집이, 위층에는 바가 있었다. 동네의 작은 술집 거리였다. 새벽녘 그 술집에서 만났던 사람이 가버리고 나면 나는 그 사거리를 마주한다. 휑하고 푸르스름한 밤의 사거리. 그곳을 두리번거리다가 보면 어떤 믿을 수 없는 마음의 빈자리를 발견하게 된다. 그 사거리 어느 모퉁이에 서 있으면 많은 것들이 선명해진다. 그런 감정이 느껴질 때면 누구에게라도 내가 여기 지금 이곳에 있다는 걸 알리고 싶어 진다. 누군가를 만나서 커피라도 마시면 어떨까, 그 누구든 상관없이 미소를 볼 수 있다면.



그렇지만 어쩔 수 없는 날이 있다. 그런 날에는 그냥 잠시 멈췄다가, 다시 사거리를 바라본다. 여기 어딘가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데. 텅 빈 것들은 채워지지 않는다. 흐르지도 않는다. 아니 흐르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 아마도 아무에게도 내가 여기 있는 것을 말하지 않았으므로 아무도 나를 보러 오지 않는 게 당연하지만 그런 날 역시 끝에는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로 가도 다 틀렸다. 이쪽도, 저쪽도 내가 원하는 사람도 없고 공간도 없다. 어디를 가도 똑같다. 새벽이 아무리 흘러도 변하지 않는다.




지금은 그 기분을 느끼지 않는다. 어째서, 라는 물음에 나는 답할 수 있는 적당한 말이 없다. 모든 게 변해버렸는데 나만 변하지 않는 것이 더 이상하지 않냐고 되묻고 싶어 진다. 삼겹살집은 이제 쭈꾸미집으로 바뀌어버렸고 2층에 있었던 선술집은 문을 닫았다. 우리가 끝까지 진정으로 믿었던 것들은 시간이 흐르고 자연스럽게 변해간다. 순간적인 감정들은 끝내 찰흙처럼 굳어져 내 머릿속 어딘가에 남은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시간이 지나 달라지고 사라진다.




아마도 그때 그 사거리에 다시 놓인다고 하더라도 나는 이제 그 텅 빈 마음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지금은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내 안에 있다. 이 방향이 맞고 여기, 내가 머무르는 것이 맞다. 내가 오늘 보낸 하루의 모습이 맞고 이 순간의 미소가, 눈물이 모두 맞는 확신. 동그라미를 쳐줄 사람은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 자신이다.


그 푸르스름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나는 아침을 기다렸던 걸까. 제발 아침이 오지 말아 달라고 바랬던 걸까. 지금의 밤은 짧고 그때의 밤은 길었다. 그때의 그 긴 밤 속에서 밤에만 존재했던 인연들에 대해 생각해본다. 함께 먹은 새벽의 찌개에는 분명히 상한 것도 있었고 그때 만난 사람 중에서도 상한 사람들도 많았다. 상했지만 웃음이 많았던 그들의 울음과 웃음들 덕분에, 나는 더 심각해지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낼 수 있었다.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화장을 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은 나를 다르게 대했다. 그런 것을 믿을 수 없었지만 자주 접하자 나는 어느 순간 진심 같은 것이 마법처럼 통하는 일은 생기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떤 식으로’가 중요하다는 걸. 진심을 전할 때에도 어떤 식의 옷을 입고 어떤 식의 말을 하는지가 중요했다. 언제까지고 통하지 않는 진심도 있는 법이다. 그래. 그렇지. 당연하다. 그 사거리에서 아침이 오기 전까지 내가 익혔던 것은 더 이상 나는 갈 곳이 없고 언제까지고 통하지 않는 진심도 있다는 것. 어쩔 수 없는 것은 존재한다는 거였다.


우리는 수많은 사거리를 마주하고 거기에서 어떤 결정을 내린다. 어쩔 수 없는 것들은 다른 방식으로 해결된다. 그 자리에 멈췄던 것들도 시간이 지나면 흐른다. 그게 내가 원하는 방식이 아니고 원한 때가 아니더라도 멈춰있지 않는다. 사거리는 그대로고 푸르스름한 하늘은 시간이 지나면 밝아진다. 내 안의 절박했던 마음도 달라지고 사라져 버렸다. 나는 내가 언제까지고 그곳에서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할 줄 알았는데.




check list

시간이 흐른다는 것을 인정해야지만 그다음을 볼 수 있다. 아침이 온다는 것, 모든 것은 지나간다는 것을 믿을 수 없다면 밤새 하늘을 쳐다보며 진짜로 해가 뜨는지 확인하라. 아침은 정말 오고 모든 것은 지나가버린다. 아침에는 아침의 일들이 일어난다. 내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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