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부터 단짝이었던 친구 B에게 나는 종종 이런 말을 했다.
“책을 읽는 건 좀 쓸데없는 짓이야. 뭐 이거 읽는다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
B는 평소 책을 거의 읽지 않았지만 중학교 내내 상위권에 들었고 나는 소설책을 끼고 살았지만 공부는 늘 뒤에서 놀았다. 조금만 공부를 해도 똑똑했던 친구 B에 비해 내가 더 잘났다는 생각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 친구는 나보다 말을 잘했고 공부를 잘했고 얼굴이 예뻤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되고 스무 살이 되었다. 스무 살이 되고는 나도 더 이상 책을 읽지 않았다. 간간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을 읽고 에쿠니 가오리의 신작이 나오면 반가운 마음에 바로 읽었지만 예전처럼 하루 종일 방에 박혀서 책을 읽지는 않았다.
스무 살 여름, 해변에 가서 남자 친구와 물놀이를 하기도 했고 맛있는 냉면집을 찾아다녔다. 개봉하는 영화들을 챙겨보았고, 몇몇의 남자와 연애를 했다. 시간이 빨리 갔다. 그런 일을 하는 것들이 책 읽는 것보다 재밌지는 않았지만 즐거웠다.
결혼을 하고 둘째를 낳고 글을 쓰게 되었는데 그러면서 나의 과거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왜 그렇게 힘들었을까에 대한 답은 진작에 찾았고 글을 쓰면 얼마나 좋은지에 대한 것은 말해서 입 아플 만큼 많이 느끼게 되었다. 그런데 내게 책의 의미를 물으면 여전히 애매하게 대답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관점이 넓어지고 사람을 이해하는 폭을 넓혀서 좋아합니다. 그렇지만 글쓰기만큼 좋아하지는 않는 것 같아요.”
아주 상투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그런데 문득 고등학교에 수업을 갔다가 열심히 필사를 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깨닫게 되었다.
‘아마 얘네들이 공부를 해서 좋은 대학에 간다고 해도 삶이 자신이 생각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을 텐데. 적당한 슬픔과 시련이 오기도 하겠지. 다만 그때, 책을 많이 읽었다면, 많은 인물들을 글 속에서 접했다면 그 예기치 못한 상황에서 큰 힘이 되지 않을까. 책을 많이 읽지 않으면 마지막까지 내려가게 되었을 때 다시 못 올라올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할 텐데.’
내가 20대를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그때 소설 속의 그 인물들 덕분이었다. 그 책을 지은 저자 때문이 아니라 순전히 그 인물, 보통은 주인공 덕분에 나는 지금껏 멀쩡한 척하며 남들과 비슷한 척 그렇게 잘, 살아올 수 있었던 것이다.
십 원짜리 동전을 테이프로 감아서 백 원 인척 오락실에서 게임을 하다가 들킨 아주 오래전 이야기부터( 아마도 허순봉 작가님이었는데 제목은 모르겠다 ) 호밀밭 파수꾼의 주인공 남자, 그리고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의 남자 주인공. 그리고 에쿠니 가오리의 도쿄타워의 남자 주인공.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에 나오는 노인. 에쿠니 가오리의 낙하하는 저녁에서 실연을 당한 여자 주인공.
그들의 불륜과, 퇴학과, 싸움과 불법(?)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내 이야기에 집중해서 나를 미워하는 행위를 멈출 수 있었다. 그것은 내게 그래. 뭐 별거 아니야 하고 내 일을 넘길 수 있는 의연함을 주었다.
물론 인물은 인물이고 나는 나다. 아무리 인물이 엉망진창으로 산다고 해서 진짜 현실에서 엉망으로 사는 나를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렇지만 도저히 나를 이해할 수 없어도 이해할 수 없는 게 세상에서 나뿐인 것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세상에는 많고 그중에 한 명이 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어떻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이것을 제대로 알자 오히려 나를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고등학생들을 보자, 20년 전의 내 모습이 갑자기 생각났다. 그러니까 B에게 책이란 읽어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던 나. 지금 나는 그 생각이 틀렸다고 생각한다. 책 읽을 때만 나는 내게서 흐릿해졌다.
소설은 그런 것이다. 해변을 거닐 때 도움이 되는 게 아니라 혼자 물에 빠져서 허우적 되고 있을 때 나를 도와준다. 그제야 책은 내게 튜브를 던져주는 실용서가 된다.
오늘 죽음을, 혹은 죽음과 가까운 것을 생각하지 않게 도와주고 그래도 자자. 내일 되면 내일이 펼쳐진다는 믿음을 준다. 물론 삶에서 그런 엉망진창의 날들이 없어서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사는 것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현재는 나를 ‘다양한 사람들 중 한 명’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 세계를 멀리서 조금은 객관적으로, 그리고 따뜻하게 바라보게 되었다.
Check list
책을 읽자. 특히 소설을 읽자. 소설 안의 주인공은 타인에 대한 이해를 높여주는 것과 동시에 나를 이해하는데도 도움을 준다. 관점을 바꿔준다. 이야기 인물로서의 나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사는 게 심각해진다면 소설을 펼쳐라. 사는 것은 그저 하나의 이야기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