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남자친구 못 생겼어."

손에 잡힌 모래알 이야기

by 김필영




술을 마시면 자주 길가에 잠드는 언니가 있었다. 막창을 좋아했고 막창과 함께 마시는 맥주를 좋아했다. 매일 팩을 했고 화장은 하지 않고 선크림만 바르고 다녔는데도 피부가 반질반질 윤기가 났다. 상체는 딱 붙고 밑으로 갈수록 퍼지는 그런 원피스를 자주 입고 다녔다. 하앴고 쌍꺼풀이 없는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웃을 때는 선 해 보이고 무표정일 때는 조금 사납게 생겼었지만 대부분은 웃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실없이.





그 언니는 술을 마시면 일단 맥주병을 차례로 줄세웠다. 그 병을 누군가가 보고 멈칫 우리 앞에 설만큼은 모아야 끝장을 보았다. 서른일곱이었는데 저녁 7시에는 중국어학원을 다녔다. 그래서 함께 술을 먹으러 가면 안주가 나오기 전까지 배운 중국어를 내게 가르쳐주었다. 막창은 익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항상 웃음을 가득 담은 얼굴로 인사를 해줬고 말을 할 때도 중간중간 빠뜨리지 않고 웃었다. 나는 그 미소를 보면 약간 내 기분도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앞코가 뾰족한 구두를 늘 신고 다녔다.


그녀는 그녀만의 스타일이 있었다.


“네 남자 친구, 못생겼어!”

내 남자 친구 앞에서 그렇게 말을 했던 그 언니를 못 본 지 몇 년이 지났다. 어쩌다 보니, 내가 매일 술을 마시지 않게 되고 경찰공무원 학원을 들어간 뒤로는 연락이 끊겼다. 아마도 그 세계맥주집에서, 막창집에서 언니는 여전히 열심히 맥주를 마시고 있을까.




사는 것은 때때로 내가 원하는 모습대로 흘러가는 것이 아닌 새로운 판이 열리면 그에 걸맞은 것들이 갖춰지는 느낌이 든다. 그러니까 내가 공주 원피스를 사면 공주 원피스를 입은 사람들이 주위에 생기고, 나에게도 차차 그에 어울리는 구두와 요술봉, 왕관 따위가 차례로 생기게 된다.


지금 내 판에는 책을 읽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강의를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나는 이 세계에 걸맞은 요술봉, 왕관, 구두 같은 것들이 하나씩 채워지고 있다. 물론 노력해서 얻어내는 것들이지만 판이 바뀌고 나니 자연스럽게 그런 기회가 생긴 것도 사실이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생긴다. (생각 역시 이쯤 되면 드는 게 아니라, 누군가가 줘서 내게 생기는 느낌이다.)



‘이런 책을 읽는 게 도움되지 않을까. 이런 것이 내게 지금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가끔, 같이 경찰공무원 시험 준비를 했던 사람들을 만나고 이미 경찰이 된 친구들도 만난다. 그들에게 경찰의 세계를 듣는다. 그들은 그 세계에 필요한 요술봉을 또 모으고, 그 세계의 사람들로 그 판이 채워지고 있다.




아마도 그 언니, 그 언니와 같이 이십 대 초반에 내가 휴대폰 가게를 하며 만났던 사람들은 내 판에서 다시 볼 일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그들 역시 그들만의 속도로 필요한 요술봉을 모으고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나는 그 잃어버린 판들에 대한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다. 그때를 그대로 쓸 수도 있고, 바꿔서 소설로도 쓸 수 있다. 실제와 뒷부분을 상상해서 이어 붙일 수도 있다.





글을 쓰자 결심하고 3년 동안 정말 많은 길을 다양한 방식으로 걸었다. 글 소재를 찾기 위해 걸었는데 대부분의 소재는 지금과 과거의 연결을 통해 재탄생되었다. 과거는 바다의 모래알처럼 손에 잡으면 잡히지 않지만 머릿속 어딘가에 분명히 존재한다. 그리고 그때 내가 했었던 생각도 어딘가에는 있다. 생각을 피했다면 행동으로 머릿속에 저장되어있었다.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흐르지 않으니 앞도 없고 뒤도 없다. 다만 우리는 판을 나만의 이야기로 연결시킬 수 있다. 글이라는 풀을 통해서. 그 이야기의 의미를 모두 재해석하면, 아마 얻을 수 있을 것이다. 내게 필요한 왕관, 그리고 요술봉. 드레스를 입은 나.


손에 잡힌 모래알에는 반드시 의미가 있다.



(사진 출처 무심한 듯 씩씩하게 그림 김영화작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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