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3시, 안주는 없었다

글쓰기로 얻은 것

by 김필영

새벽 3시쯤 되었을까. 안주는 없었다.




이십 대 초반, 그때 나는 자주 늦게까지 술을 마셨다. 9시 반에 휴대폰 가게가 끝나면 그때부터가 시작이었다. 아마 그날도 1차는 자주 가던 6층 술집에서 알탕을 먹고 2차에는 꼬지 같은 것을 먹고 3차에 그 집에 갔을 것이다. 시내에서 10분 정도 걸으니 어두컴컴한 골목을 지나 그녀의 집이 나왔다. 들어가서 사온 소주를 열고 그 집에 있던 스팸을 하나 꺼내서 사이좋게 퍼먹었다. 스팸을 다 먹고도 술이 반 병 정도 남아있었다.

“아무거나 괜찮은데. 술은 있으니까.”

그렇게 말했지만 그녀는 먹을게 아무것도 없다고 했다. 방금 내가 먹은 스팸이 그 집의 마지막 물량이었던 것이다. 순간 나는 형광등만으로도 굉장히 밝았던 그 집에 앉아서 술집의 알탕을 떠올렸고, 알탕에 뭔가가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까지 이르렀다. 알탕에 알이 없어도, 파가 없어도, 양념이 없어도, 그러니까 아무것도 없어도 괜찮지 않을까.


“그냥 뭐, 우리.. 물만 끓이자. 따뜻하면 비슷할 거 같아.”



우리는 맹물을 끓였다. 소주를 한 잔 마시고 뜨거운 물을 후후 불어서 알탕처럼 단숨에 입에 넣었다.

그러고도 별반 다르지 않은 날들이 이어졌다. 분명히 직장을 바꾸고 사귀는 남자를 바꾸고 친하게 지내는 친구도 바뀌었던 것 같은데 사는 것은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늘 비슷한 패턴으로 낮엔 휴대폰 가게로 일을 나갔고 밤엔 꼭 술을 마셨다. 그 두 가지를 놓치면 안 되는 버팀목처럼 붙잡고 살았다. 한쪽 버팀목으로는 살 수 없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스물아홉쯤 결혼을 했다. 결혼을 하고 5년 동안 거의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한 번도 술을 끊어야겠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는데, 술을 마셔야겠다는 생각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냥 그때는 술을 마신 하루하루가 쌓었고, 지금은 글을 쓰는 하루하루가 쌓였을 뿐이다. 애초에 커피숍에서 좀 더 자연스럽게 술을 마시는 분위기라면 술을 마셨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보통의 커피숍이라 하면 술이 자연스럽지는 않다. 나는 자연스럽지 않은 행동을 구태여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러니까 술집에서 글을 쓰지도 않았고 지금은 커피숍에서 술을 마시지도 않는다. 사람들은 가끔 내게 어떻게 아이 둘을 키우면서 글을 쓰냐고 대단하다고 하지만 정말로 하나도 대단하지 않다. 아이 둘을 집 안에서 키우면서 외도를 하던지, 아니면 매일 술을 마시던지 그게 더 대단한 일이다. 전혀 연결고리가 없는데 그런 것들을 도대체 어떻게.









아이를 키우는 일상은 정직하고 바르게 흘러간다. 아침에는 아침을 먹어야 하고, 먹여야 한다. 점심에는 점심을, 저녁에는 저녁을 먹고 먹인다. 집이 더러우면 치워야 하고 반찬거리가 없으면 반찬을 사든 만들든 시키든 뭐든 해야 한다. 아이가 둘, 남편이 있는 4인의 가족일 경우 가족들이 입고 난 뒤 나온 옷을 세탁기에 넣고 개는 일을 해야 하며 밤이 되면 내 몸, 그리고 아직 어린아이 둘의 몸을 씻겨야 한다. 대부분의 일은 집에서 이루어진다. 챙길 것은 많지만 장점은 티브이를 켜지 않고 생활한다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많다. 아이를 보는 것은 아이의 스케줄에 맞춰서 움직이는 일이므로 내가 기다려야 할 때가 있기에 그때마다 이런저런 생각들을 정리하기 쉽다. 결혼하지 않은 친구들의 연락이 뜸해지고 아이들 엄마들과 친구가 되기도 하는데 그들 역시 저녁에 책임져야 할 가족이 있으므로 대부분은 낮에 커피숍에서 짧게 만난다. 가끔 술자리가 생기긴 하지만 그마저도 별로 마시고 싶지 않다. 저녁에는 글을 써야 하니까. 글을 쓰는 게 이제는 훨씬 더 재밌다. 또 술자리가 너무 늦게 끝나면 다음 날 챙겨야 할 아이들을 챙기지 못하기도 하므로.

글을 쓰며 내가 술 마신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었다. 생각하자 마시지 않게 되었다. 내가 좋아하지 않음을 깨달았다. 아니, 정확히 어떤 걸 좋아하는지를 깨달은 것이다.







일단, 알탕에는 아름다움이 흐른다. 20대 때 술을 마실 때 주로 소주를 마셨는데 소주 안주로 자주 알탕을 시켰다. 알탕을 굳이 좋아했다기보다는 술집 노란 조명에 비친 알탕의 모습이 아름다웠고 식어도 해물탕보다는 덜 비리고 어묵탕보다 얼큰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앞에 앉은 사람. 술을 마시며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대학교 선배, 후배 그리고 동기들. 함께 일을 했던 동료나 소개팅을 한 사람... 가릴 것 없이 그들은 모두 재밌는 이야기들을 가지고 있었다. 표정과 흐름, 그리고 눈빛, 그 사람만의 분위기. 그 모든 것들을 보는 게 즐거웠다. 말을 할 때 첫 단어를 내뱉고 숨을 고르고 다시 말을 이어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중간까지 말을 하고서야 숨을 고르는 사람도 있었다. 대화를 할 때 항상 주도하는 사람이 있었고 얼굴이 빨개지고 나를 쳐다도 못 보는 사람도 있었다. 정말로 모두는 모두 달랐다. 마시는 술의 종류도 달랐지만 그 술잔을 잡는 손가락마저 다들 달랐다. 유달리 하얗고 긴 사람이 있는가 하면 짧고 뭉툭한 사람도 있었다. 아무리 추워도 파카를 잘 입지 않는 사람도 있고 조금만 추워도 롱 패딩을 입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 것들을 관찰하다 보면 술집 안에서의 시간이 마치 신선놀음하듯이 빨리 흘러갔다. 이모양 저 모양을 가진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 그 분위기를 지켜보는 것도 즐겁고 앞에 앉은 사람이 내게 해주는 배려, 물을 채워준다던지 하는 것도 좋았다. 그러니까 나는 내게 관심이 있든 없든 그냥 모든 술자리가 즐거웠는데 그럴 수 있던 가장 큰 이유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결국 내가 제일 좋아한 것은 술도 아니고 알탕도 아니고 그 안의 사람들이었다. 글을 쓰면서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진심이 나올 때의 사람들을 보는 게 무엇보다 좋았다.











글쓰기는 나에 대해 알게 해 주었다. 지금은 글을 쓰기도 하고 글쓰기를 가르치기도 한다. 수업을 하다 보면 ‘글을 써서 무엇이 돼라’는 형태의 말을 해줄 때가 많다. 사실 뭐라도 되지 않으면, 그러니까 어떤 결과치를 내지 않으면 글쓰기를 지속할 동기가 떨어지기에 그런 말을 하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글쓰기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표하지 않은, 나 혼자 노트에 가지고 있는 글이더라도 글을 쓰는 삶과 글을 쓰지 않는 삶은 전혀 다르다. 하마터면 정말 나는 계속 술을 좋아하고 알탕을 좋아하는 사람으로 스스로를 정의 내렸을지도 모르겠다. 내가 만든 나에 갇혀서 계속해서 지금도 어딘가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맹 물을 안주삼아 먹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정확히, 내가 좋아하는 것에 대해 안다. 좋아하는 것뿐만 아니라 기질적인 특성도 받아들이게 되었다. 특히, 무기력감과 느림에 대해. 열정을 가지고, 의지를 가지고 나를 바꿔봐야겠다는 생각을 접자 오히려 변화가 시작되었다. 지금은 어떤 일을 할 때 걸리는 시간을 타이머로 종종 체크한다. 많이 걸렸네 적게 걸렸네를 보기 위함이 아니라 다음에 이 일을 할 때 계획을 짜기 위함이다. 다른 사람이 아닌 나의 과거 데이터로 계획을 짜게 되었다. 그러면서 일을 좀 할 수 있게 되었다. 그전까지는 누군가의 속도나 평균에 사로잡혀서 보통은 이 정도로 하니까 나도 그 정도 속도로 해내야 한다는 강박이 있었다. 그리고 계획표에도 그렇게 일의 끝나는 시간을 적어놓았다. 당연히 지켜지지 않았고 자꾸 그런 일들이 반복될수록 스스로에 대한 믿음이 없어졌고 나를 미워하게 되었다. 내가 그 속도를 내지 못하고 일을 제때 끝내지 못하는 것은 모두 내 탓이라 생각하며 다음에는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런 다짐을 한다고 해도 그때뿐이었다. 몇 번은 열정과 의지로 해결하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일들은 그렇지 못했다. 못하는 게 많아질수록 자책이 늘었고 자책이 늘수록 더 많은 일을 못하게 되었다. 문제는 내가 그런 상태임을 당시 스스로는 알아차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글을 쓰고 나서야 조금 멀리서 나를 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멀리서 보자 느림도, 무기력함도 작게 보였고 내 안에 있는 특성임을 알게 되었다.




글을 몇 편 쓰고 깨달은 것은 시답지 않은 과거가 많을수록 글쓰기에 유리하다는 사실이다. 일단 시답지 않은 걸 소재로 꺼내는 순간 쓸 말이 많아지고 잘 써야지 하며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도 좀 막을 수 있다. 그때 많은 것들이 보인다. 맹물을 안주로 술을 마셨다는 이야기는 어깨에 힘을 주고 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누군가에게 굳이 말하기도 좀 그렇다. 하지만 이렇게 글에는 쓸 수 있다. 글쓰기란 정말 얼마나 좋고 얼마나 나다운 작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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