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기 바꾸려고 일하는 여자
좋은 변기보다 소중한 것
초등학교 때 나는 심즈랑 프린세스메이커라는 게임만 했다. 나머지 게임들은 어떤 순발력을 요구하는 것처럼 느껴졌기에 하기 싫었다. 특히 보드게임이 어릴 적 유행이었는데 카드를 뒤집고 종을 치는(?) 그런 게임을 하게 될 때는 뭐랄까. 가슴이 답답해졌다. 못해서도 있지만 무엇보다 내 머릿속 드는 생각은 이것이었다.
'왜 이걸 내가 하고 있냐.'
물론 한 번도 나는 종을 쳐본 적이 없다. 학교 영어수업이 싫었던 것도 이 게임 때문이었다. 우리 때는 초등 3학년때부터 영어 수업을 했는데 선생님은 우리에게 흥미를 붙여주려 여러 게임으로 수업을 진행했고 진행할수록 영어가 싫어졌다. 통에 알파벳 넣고 오기. 한 문장 맞추기 맞추고 달려 나가고.. 뭐 그런..
그런 내게 심즈라는 게임은 신세계였다. 집을 짓고 그 안에서 심즈라는 캐릭터가 사는 거다. 일정한 돈이 주어지고 그 돈에 맞춰 집을 짓고 안에 물건들을 채운다. 그 뒤 그 심즈의 욕구가 가득 차지 않게 조절해 주고 또한 돈도 벌러 간다.
기억이 정확하게 나지 않지만 그 게임은 내게 어떤 부분에서 희열을 안겨주었다. 가령 집을 한 개 더 만들 때, 없던 정원이 생길 때. 소파를 가장 비싼 걸로 바꿀 때. 그리고. 화장실 변기를 제일 예쁜 걸로 놓을 수 있을 때 기분이 좋았다. 너무 일을 많이 시켜서 때때로 거실바닥에 내 캐릭터는 철푸닥 잠들기도 했지만 나는 심즈를 부지런히 움직여서 돈을 벌었다. 나 때문에 그 게임 안의 내 캐릭터는 그저 좋은 변기를 사기 위해 계속 일하는 여자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 게임을 그만하게 된 것도 막상 똑같은 이유였다. 그 희열이 없어졌다. 더 좋은 소파를 갖게 되었었어도 그 뒤가 없었다. 1층, 2층 층마다 화장실을 나둬도 기분은 좋았지만 그 이상은 없었다. 그냥 내 눈에 보기 좋은 것. (좋은 것이라 그런지 비싼 침대는 캐릭터의 피로가 빨리 풀렸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럼에도 그뿐이었다. 중간에는 치트키를 알게 되어서 나는 아주 호화로운 주택을 만들고 정원을 집 크기로 크게 만들었다. 그래서 친구도 초대하고 친구와 밥을 먹고 놀고 음악도 듣고 했지만 정말 그게 다였다.
그래서일까. 어느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그 게임을 멈추게 되었다.
그저께 아이를 데려다주면서 나는 아이 둘과 두 번째로 버스를 탔다. 버스를 자주 타지 않은 이유는 첫째로 내가 잘 멀리 나가는 성향이 아니기도 하고 둘째로 어딘가 갈 때면 남편과 가거나 혼자 두 명을 데리고 다닐 땐 무조건 택시를 타고 다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어린이집에 하원을 좀 늦게 시킨 날, 택시를 불렀지만 퇴근시간과 겹쳐 택시가 잡히질 않았다. 할 수 없이 마을버스를 탔다. 마을버스는 처음 타는 거라 아이들이 벨트도 없고 불편해할 줄 알았지만 창문을 바라보며 더 신기해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또 버스를 타자며 즐겁고 재밌게 버스를 타고 내렸다. 그러고 나서 집에 와서 손을 씻는다고 화장실을 보는데 갑자기 심즈에서 내가 짓던 그 집이 떠올랐다. 조금 더 좋은 집, 조금 더 좋은 소파, 그리고 여기 조금 더 좋은 변기.
이런 것들은 내게 행복을 주지만 그 이상 더 큰 행복은 주지 못하는 게 아닐까. 아이들은 뭘 타고 집을 가든지 그 안에서 행복을 찾는 것처럼 그 교통수단은 도구일 뿐 행복의 목적은 되지 못하는 것 아닐까.
손을 씻고 식탁에 앉아 곰곰이 생각을 해보니 역시 그랬다.
심즈를 중간에 그만두고 세상을 사는 것은 좀 더 계속될 수 있었던 것은 사실 심즈 속 세상보다 내가 내 발로 끌고 다니는 내 세계가 더 재밌기 때문이다.
브런치에 글도 올리고 글쓰기에 대해 떠들 수도 있고 가끔 브런치에서 좋은 제안이 오기도 하고. 예상치 못하게 택시가 안 잡히기도 하고 늦게 일어나기도 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짜증이 날 때도 있지만 지금 여기에는 실체가 있는, 그 이상, 그 무언가가 있다. 변기만 오로지 좋은 걸로 바꾸는 게임이 아니라 이 변기에 엉덩이를 갖다 대고 오줌을 누는 소중한 가족들이 있다. 변기를 사는 것 이상을 꿈꾸는 내가 있다.
어떤 변기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있기는 있어야 한다. ) 최소한의 것들이 보장된다면 내 삶을 채우는 것은 그 이상의 가치다. 내 소중한 사람들. 그리고 내가 내가 원하는 걸 할 수 있는 자유. 그렇기에 심즈에서는 호기롭게 정원을 꾸몄지만, 현실에서는 물건 사는 것과 정기구독하는 걸 자주 고민한다. 내가 이 그것을 사면 그만큼 자유에서 멀어질 수 있기에. 소비에 책임을 져야 하기에.
나는 좋은 변기보다 가족들이, 내 자아실현이 더 소중하다. 인생을 어떤 규율에 맞춰서 각본대로 흐르는 대로 살지 않을 것이다. 끌려가듯이 살지 않을 것이다. 그것을 샀기에 희생되는 시간을 최대한 만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원하는 걸 하기 위한 적정한 돈을 가지고 내 분수에 맞는 소비를 하며 하고 싶은 일들은 하나씩 하나씩 하면서, 그 기쁨을 누리면서 살 것이다. 시간은 무엇보다 소중하고 확실히, 변기를 업그레이드시키는 것보다는 더 소중한 가치가 있다.
20대 때의 나는 돈을 벌기 위해, 그게 삶의 목표로 살았다. (그럼에도 돈을 못 벌었지만) 그래서 그때는 산에서 호랑이를 때려잡는 게 임무라고 느껴졌다. 돈을 벌어야 했고 내가 쓴 소비에 책임지느라 바쁜 하루하루를 살았다. 온통 정신이 호랑이를 신경 쓰느라 산에 있는 것들 아무것도 보지 못했지만 지금은 호랑이 때려잡기 임무에서 벗어나 그 산을 산책하게 되었다. 그래서 산에 있는 많은 것들을 살펴보고 예전에 비해서는 합리적으로 결정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그런 것이다. 아마 값비싼 변기나, 카메라, 명품가방. 이런 것들을 하나씩 구매할수록 계속 호랑이를 찾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호랑이를 찾는 것은 버스를 탈까 택시를 탈까 처럼 도구이지 삶의 목적이 되어서는 안 된다.. 기 보다 삶이 좀 허무하지 않을까. 마치 심즈게임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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