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책의 원고가 다 쌓였을 때쯤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때 집과 홈플러스 사이에 있던 통로를 지나고 있었다. 그 길은 양 쪽 큰 건물 때문인지 다른 곳보다 어두웠는데 그게 무섭다기보단 좀 시원한 느낌이 드는 그런 길이었다. 걷고 있을 때 전화가 왔다. 편집자님이었다.
편집자님은 이제 책의 프롤로그와 에필로그. 그리고 책날개에 들어갈 저자 소개가 필요하다고 하셨다. 나는 원고를 투고할 때 그런 것들을 대충 작성해서 냈지만 스스로 그것을 사용하고 싶지는 않다는 생각을 하고 있긴 했었다. 사실 그냥 그런 것들은 쓰고 싶지 않았다. 글을 쓴 지 얼마 안 된 내 눈에 저자 소개 글들은 이렇게 보였다.
1. 스펙을 나열하거나 (블라블라 땡땡대 교수이며 땡땡회사 재직 중)
2. 감성적으로 (어렸을 적부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보며 막연히 작가의 세계를 동경했다.)
아, 뭔가 오글거렸다. 직업을 적는데 뭐가 오글거리냐고 묻는다면 할 말이 없지만 그냥 내가 쓴다고 생각하자 오징어다리가 꿈틀꿈틀 움직이는 기분이 들었다.
물론. 스펙이라고 할 것이 내게 없기도 했다. 감성적으로 쓸만한 무언가 역시 내 안에 없었다.
난 그러니까 거기 뭔가를 적을 만큼 그렇게 살지 않았는데.
그때마침 편집자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프롤로그는 작가님 쓴 글 중 제가 정해 둔 게 있긴 한데, 그걸로 하심이 어떨지.. 에필로그도 쓰신 글 중에 뽑아서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아, 정말 좋았다.
자 이 책 읽어봐! 이 책은 이런 내용이야 어서어서! 하는 식의 프롤로그는 쓰고 싶지 않았다. 마치 선거공약 같은.. 나는 그저 문을 열어주는 정도. 누가 왔으니 문을 열어주는 그 정도의 친절함을 가진 프롤로그를 쓰고 싶었다. 무튼 덕분에 프롤로그 에필로그가 해결되었고 마지막 남은 문제는 역시나 저자소개였다. 저자소개를 어떻게 할까. 고민했는데 결국 나는 편집자님께 의견을 말씀드렸다.
"전, 그.. 막.. 그런 거 있잖아요. 나 이런 사람이야 하는.. 네.. 제가 그런 스펙이 있지도 않지만. 있더라도 그게 저는 아니니 그런 것 말고 뭐 없을까요."
"아, 그러시면."
아 그러시면을 들었을 때 잠시 걸음을 멈췄다. 아니 이렇게 개떡같이 말했는데 알아들으시다니.
“그러시면 그냥 실패의 기록을 툭 떨어뜨리듯이 적는 건 어떠세요. 그게 이 책에 어울릴 것 같기도 하고요.”
“오? 좋아요. 그렇게 해도 돼요? 그럼 전 너무 좋죠!”
그래서 탄생한 저자소개.
나는 너무 좋았지만 이발소를 하는 부모님께서는 손님들이 책날개를 보고 표정이 바뀌거나 비아냥 거리기도 했다면서 (한심하다는 눈빛 첨가) 속상해하셨다. 난 요즘 이런 게 유행이라며 계속 둘러댔다. 이렇게 저자 소개를 쓰는 과정이 험란했지만 이 책의 저자소개를 쓰고 난 다음부터는 내가 나를 소개하는 일이 정말 쉬워졌다.
“안녕하세요. 무심한 듯 씩씩하게의 저자 김필영입니다.
혹은 안녕하세요. 무심한 듯 씩씩하게의 저자이자 브런치작가 김필영입니다.
혹은 안녕하세요. 무심한 듯 씩씩하게의 저자이고 5살, 6살 두 아이의 엄마입니다."
이런 식의 자기소개가 가능했다. 그러고 나면 책을 읽지 않더라도 책의 내용에 대해 대충 아는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다들 먼저 질문을 해주었다.
아이 둘을 키우느라 글쓰기 어려우셨을 텐데 정말 대단하세요. 혹은 육아를 하며 글을 쓰는 특별한 요령이 있을까요 라던지. 실패했던 경험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내가 이 책의 저자라는 걸 밝히면 나는 굉장히 자기소개에서 자유로워졌다. 어떤 명함보다 에세이를 출간하는 일은 힘이 있었다.
책을 내서 좋은 점이 뭔가요?라고 묻는다면 무수히 많은 점들 사이로 내가 서있는 나라는 사람이 서있는 이 지점이 더 이상 공격받거나 비아냥 받지 않는다는 거다. 예전에는 항상 너 왜 거기 서있어? 네가 있을 자리니? 니 자리가 맞아? 넌 뭐 하는 아이니? 하는 질문을 받았었다. 휴대폰가게에서 일할 때,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할 때, 아파트 분양일을 할 때.
그런데 책을 내자 여기가 네. 제 점입니다.(자립니다.)라고 하면 모두가 아, 네. 거기가 너의 자리군요.라는 느낌으로 인정해 주었다. 이게 브랜딩인지 아닌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책을 내고는 내 소개가 수월해졌다는 사실이다. 저자소개에 실패한 기록만 나열했지만 일단 그게 책으로 나오자 그래서 너는 누구냐는 식의 시선은 확실히 없었다.
글을 쓰면 스토리가 생긴다. 나처럼 실패한 기록을 적는다고 하더라도 그 이야기는 나만의 스토리가 된다. 그리고 그 스토리는 내 점이 되고, 아무도 나에게 그 점에 대해 왈가 왈부하지 않고 내 점을 인정해 준다. 그러니까 글쓰기라는 것은 사실은 하면 할수록 더 진하게 자신의 자리를 표시할 수 있게 된다. 자신만의 고유한 언어가 생기고 리듬이 생긴다. (그리고 자기소개도 생긴다. )
글을 쓸수록 나는 점점 더 내가 된다. 어쩌면 자기소개를 잘하게 된 게 아니라 자기소개에서 점점 더 자유로워진다는 게 정확한 표현인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