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책을 어떻게 그렇게 늦게 봐요? 씁, 하, 통통통.. 휙, 이런 것까지 다 읽는 거 아니에요?"
남편은 동그란 눈이 더 동그래져서 나를 보며 웃었다. 대충 그 웃음은 맞다는 뜻이다.
얼마 전 우리 집 거실 벽면 책장이 슬램덩크 전집으로 채워졌다. 그 전집을 보며 뿌듯한 마음과 함께 왜 이렇게 책을 많이 사게 되었을까 하는 의문이 함께 생겼다. 책을 읽고 싶은 것과 소유하고 싶은 것은 같은 의미인 걸까. 다른 의미인 걸까.
책 읽기에 대해 말하자면 나는 모든 것을 늦게 하는데 책만 빨리 본다. 정말 빨리 본다. 속독 같은 걸 배운 적도 없고 발췌독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데 문장을 약간 중요한 것만 빼고 읽는다. 이렇게 하는 게 좋아서 한다기보다 계속 한쪽으로만 가는 자동차처럼 그냥 이렇게 되어버렸다고 말하는 게 맞을 것이다. 그래서 슬램덩크 역시 똑같이 봤어도 남편은 줄줄줄 대사를 읊고 나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이렇게 고장 난 책 읽기를 하게 된 것에는 이유가 있다.(물론 고장 났다고 해서 다 안 좋다는 의미는 아니다.) 예전에 초등학교 고학년 때부터 중학교 때까지. 집 근처에 롯데마트가 있는데 저녁 8시, 아빠가 운영하는 이발소가 끝나면 이주일에 한번 정도 그 마트로 향했다. 오빠는 왜인지 늘 없었고 엄마, 아빠, 나 이렇게 셋이 자주 마트에 갔다. 그때마다 엄마는 돈을 주고 책을 사줘도 금방 책을 읽어버리는 내가 못마땅했는지 마트 안에 서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 저기서 책 읽고 있어. 한 시간 정도 걸리니까.”
나도 당연히 좋았다. 음식을 고르고 비교하고. 지금도 싫지만 그때도 관심 없었다. 그래서 거기서 쪼그리고 앉아서 책을 읽었다. 사주지 않을 걸 알고 언제 어느 순간 엄마 아빠가 다시 집으로 가자고 할지 모르기에 최대한 집중해서 빨리 읽었다. 나를 툭툭 누가 쳐서 쳐다보면 엄마아빠, 그리고 가득 채워진 카트가 어느새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몇 권 읽었어?”
“세권.”
그때 내 최대는 세 권이었는데 세 권이라고 말하면 엄마는 환하게 웃었다.
“돈 벌었네.”
그때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트에 갈 때마다 나는 책을 읽었고 돈을 벌었다. 그리고 누가 쫓아오듯 책을 읽게 되었다.
고등학생이 되고부터는 더 이상 마트에 따라가지 않았다. 학교 도서관에도 얼마든지 좋은 책이 많았고 마음만 먹으면 마트 안 서점이 아닌 어느 서점이든 버스를 타고 갈 수 있었기 때문이다. 평일에는 학교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읽는 일이 많았는데 1교시부터 6교시까지 책을 읽으면 금방 한 권 이상은 읽게 되었다. 비문학 책을 국어선생님이 주제를 찾고 근거를 체크해오라는 과제가 있으면 그 과제를 누구보다 빨리 해치웠다. 언어영역 시험을 칠 때면 30분도 안되어 100문항을 다 풀었다. 한 번도 공부해 본 적은 없는 시와 시조, 문학 파트였어도 그냥 빨리 읽고 답을 유추하는 것은 꽤 잘했던 것이다.
(그렇다고 언어영역 점수가 100점이었거나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75점, 80점 정도를 왔다 갔다 했고 어법 문제를 많이 틀렸던 걸로 기억한다.)
지독하게도 읽는 걸 좋아했던 나는 그때 엄마가 돈 벌었네라고 말하는 대신에
'많은 책을 읽었네. 무슨 내용이었어?'라고 물어봐주었더라면 한 권을 좀 더 심도 있게 읽게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때 빨리 읽어서인지 책 읽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어른이 되었지만 결국 무슨 내용인지 이해하고 생각하는 시간은 부족했다고 느낀다. 천천히 음미하고 맛보지 못한 채, 마치 고속도로에서 운전하는 바쁜 운전자들이 휴게소에서 제육덮밥 같은 걸 먹어치우는 속도로 나는 책을 읽었다.
지금 나는 그때 벌었던 돈을 도서구입비로 펑펑 쓰고 있다. 결국은 모든 것은 순서에 맞게 진행되는지도 모르겠다. 건너뛴 이야기들은 결국 살면서 중간중간을 채우고 있다. 그때 급하게 읽었던 책들은 요즘 다시 읽고 있고, 사고 싶었던 책들은 기어이 사는 어른이 되었다. 슬램덩크 전집을 구매하고 나니 남편이 나보다 더 재밌게 읽지만 나 역시 읽을 때마다 재밌다.
다음에는 나도 남편처럼 그래, 천천히.
탕,
탕탕탕
훗,
쉭
와아~
이런 것들도 모두 읽어봐야지. 마음 편하게, 읽어야 될 책이 아닌 누가 쫓아온다는 마음을 내려놓고 책을 읽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