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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필영 Dec 14. 2020

어느 콜라캔의 다짐

가라앉지 말고 버티는 것

애매한 색깔의 옷을 입고 애매한 나이에, 애매하게 공부를 끝낸 뒤 저녁이면 애매하게 나를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서 데이트를 하고 집으로 왔다. 그러고는 그가 주는 애매한 금액의 돈을 받아서 고가도 저가도 아닌 애매한 금액대의 물건들을 샀다.  4년 정도를 그렇게 보내고 나니 29살이 되었다.



 지금은 원룸촌의 딱 중간의 원룸에 살고 있다. 보증금 없이 한 달에 월세를 35만 원씩 주면서 말이다. 반 지하방에는 새끼 바퀴벌레가 매일 나온다. 같이 살고 싶지 않지만 바퀴벌레는 어제도 나왔고 내일도 나올 것이다. 아마 벽지를 뜯으면 곰팡이들도 눈에 보이는 것보다 더 많겠지. 그렇게 곰팡이들과 바퀴벌레와 함께 살고 있다. 세탁기와 화장실은 사용할 수 없는 상태이다. 정사각형 반듯한 네모라는 것은 내가 이 방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점이다.  통장에는 200만 원 정도가 있다. 이 정도면 몇 달을 버틸 수 있을까? 매일 초밥과 맥주를 마셔서는 얼마 못 가겠지. 화장실 거울에 애매하게 생긴 내가 보인다. 누군가가 좋은 가방을 들고 있으면 나도 가지고 싶다. 좋은 옷을 입고 있으면 나도 입고 싶다. 그러나 우리 집에는 식탁이 없고 행거도 없고 책상도 없고 사방이 못질이 되어있다.

 

'식탁을 사야 하겠지. 아무래도 가방을 사기 전에.'


사는 게 점점 애매해지는 기분이다.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립스틱을 사모으고 있다. 핑크색, 오렌지색, 조금 더 쨍한 오렌지색, 오렌지 색 같은 레드 등 애매한 색깔의 립스틱을 모은다. 립스틱 같은 건 내가 몇 개씩이나 살 수 있다.





20대 초반에는 25살 복학생 오빠도 늙어 보였다. 그래서 그때는 20대 후반이라면 적어도 탄탄하게 뭔가를 몇 년에 걸쳐 쌓아 놓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확 터지진 않았어도, 몇억씩 있지는 않아도 몇 년 동안 다닌 직장생활로 3천만 원 정도의 예금과 직장도 같은 곳을 3년 이상 다녔고 오래 사귄 결혼을 약속한 남자 친구가 있는 그런 삶을 꿈꿨는데. 실제로 그렇게 살고 있는 20대 후반들도 꽤 있겠지. 차곡차곡 순서에 맞게.

 아르바이트를 이렇게까지 다양한 곳에서 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리고 모은 돈을 그저 쓰기만 하는 시간이 몇 년씩 존재하게 될 줄도 몰랐고 낯선 곳까지 와서 계약에 목을 매고 있을 줄 몰랐다.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 느리고도 빠르게 흘러간 시간에 대해서.

 어느 연못에 다 마신 콜라캔처럼 둥실둥실 떠다니며 즐거워하다가 어느새 캔 안으로 물이 차올라 가라앉고 마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끝이 나는 걸까.     

애초에 콜라캔이 아닌 인생도 있을 것이다. 그런 것까지는 알지 못한다. 립스틱을 계속 사모으면 차 있는 물을 다 뺄 수 있는 걸까? 지금 필요한 것은 립스틱을 사모으는 것이 아니다.

계속 떠 있는 것이다. 그냥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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