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청소년기는 꽤 인정 욕구가 가득한 시절이었다. 친구들에게 인기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 스스로 코미디언을 자처했다. 친구를 웃기는 게 즐겁기도 했지만, 그렇게 친구들로부터 칭찬을 받는 내가 좋았다. 더 어린 시절에는 몸이 꽤 마르고 얇아서 또래 애들보다 발육이 더디고 힘이 약했다. 그런 나는 또래 친구들보다 한두 살 어린 동생들과 어울리며 리더의 역할을 자처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참 꼴사납단 말이지.’
그 당시 한 살 차이는 꽤 컸다. 마치, 신입사원이 대리를 보듯, 이등병이 일병을 보듯 일 년 먼저 살아봤다는 것 하나만으로 존경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나는 그런 차이를 즐겼다. 골목대장을 하며 능동적이며 인정 받는 내가 참 좋았기에.
세월이 흐를수록 골목대장 같던 모습은 희미해졌다. 발육 시기가 찾아오면서 동생들도 꽤 커지고 친구들 역시 두꺼워지고 훤칠해졌다. 나의 역할이 조금씩 사라지는 것만 같은 기분은 나를 작게 만들었다. 키가 작아 맨 앞줄에 앉으면서도 자존감은 맨 꼴찌인 놈이 목소리는 얼마나 크던지. 티를 내지는 않아 남들은 모를 수 있지만, 속으로 혼자 위축되는 시간에 꽤 혼란스러운 시절이었다. 그럴 때마다 주변의 따뜻한 격려와 조언들 덕분에 건강한 자아를 만들 수 있었다. 위축과 대범이 엎치락뒤치락하며 관계에 있어 능동적이지도, 수동적이지도 않은 보통의 흔한 사람이 되었다.
나는 버스를 탈 때 항상 카드를 찍으며 “안녕하세요”하는 인사를 덧붙인다. 인사만 잘해도 성공에 반은 가까워진다는 삶의 지혜를 몸소 실천하기 위해서이다. 그래서 기사님들이 내 인사를 받고 안 받고는 그렇게 중요하지는 않다. 환하게 받아주시면 그날 하루의 기분이 조금 더 좋아지는 정도. 안 받는다고 하시더라도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그렇게 오늘도 버스를 타며 습관처럼 인사를 뱉었다. 그런데, 인생 처음으로 자리에 앉으러 걸어가는 내 뒤로 기사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든 승객이 다 앉으신 후 출발할 예정이오니 자리에 천천히 앉으셔도 괜찮습니다.”
버스를 타며 이런 인사를 들어 본 적이 있었나. 비행기 정도는 타야 받을 수 있는 사치스러운 인사를 비교적 값싼 버스를 타면서 들을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와 동시에 내 안에서 행복한 기운이 밀려들어 왔다. ‘누군가의 인사에 이렇게나 행복해질 수 있는 건가.’ 무엇보다, 이전까지는 버스를 타고 앉기도 전에 출발하다 보니 자리에 앉기 바빴다. 실제로 걸음이 불편하신 노인들은 넘어지시기도 한다. 그런 사람들을 위한 건가 싶으면서도 정거장마다 나이와 상관없이 똑같은 문장으로 승객의 불안을 달래는 기사님의 따뜻한 마음씨가 나를 행복하게 했다. 버스 안 승객들의 시선이 하나같이 기사님께 쏠리는 걸 보니 다른 승객들도 대단한 충격에 휩싸인 것 같다.
사실 기사님이 이처럼 인사를 하지 않더라도 문제 되지 않는다. 불편 사항에 올라오는 것도 아니고, 인사를 하는 게 월급을 더 올려주는 일도 아니니까. 하지만, 그런 능동적인 인사 덕분에 나는 행복했고, 어떤 이는 안정감을 느끼기도 했다.
행복은 명사가 아닌 동사라는 말을 믿는다. 끊임없이 주고받으며 이리저리 옮겨 다니는 동사. 사람은 행복해지면 그 행복을 나누고 싶어 한다. 곳간에 고이 모셔 두는 행복은 행복이라 말하지 않는다. 자꾸만 꺼내서 보여주고 싶은 것. 내가 느끼고 있는 행복감을 너도 느끼길 바라는 마음. 마치,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사랑하는 이가 떠오르는 것처럼 말이다.
십여 분간 버스를 타며 혼자 고민했다. 기사님께 선을 넘지 않으면서 어떻게 이 행복을 돌려드릴 수 있을까. 기사님은 기사님의 것을 전했으니 승객인 나는 승객의 것을 전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려야 하는 정거장이 다 와 간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입술은 어지나 메말라가던지. 행복을 전하는 건 꽤나 용기가 필요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며 버스에서 내리기 직전 나만의 행복을 전했다.
“기사님 감사합니다. 행복한 하루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