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행을 즐기는 사람이다"
어렸을 때 나는 내 멋대로 컸다. 학창 시절 부모님으로부터 공부 좀 해라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듣기 마련 아닌가. 내 유아기부터 청소년기를 다 돌아봐도 부모님이 공부 좀 했으면 좋겠다 하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엄마가 내 방문을 열고 들어오면 내가 공부하는지 게임을 하는지를 보시려 하기보다는 꼭 간식을 가져다주셨다. 그렇다고 내가 학창 시절 공부를 잘했는지를 묻는다면 음,,, 전혀?
집에서 공부하라는 말씀을 안 하시니 오히려 내가 불안한 기분. 나의 학창 시절은 사교육 열풍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주변 친구들이 3~4개씩 학원에 다닐 때 나는 그 흔한 태권도 학원도 다녀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받은 사교육이라곤 일주일에 2번 집으로 방문하시는 학습지 선생님 정도.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은 학원에서 공부하는 기억보다 모랫바닥에서 흙먼지 뒤집어쓰고 신나게 놀았던 기억뿐이다.
어렸을 때 나는 고난이 없었다. 지금 굳이 고난이 무엇이 있었나 생각을 해보자면 중학교 시절 학교 축제로 전교생이 보는 자리에서 줄넘기 선수였던 내가 음악 줄넘기를 틀렸다는 정도. 그리고 그 당시 애장품이었던 전자사전을 도난당해 집에 와서 오열했던 거. 그 도난자가 내 절친이었던 사실은 뒤늦게 알았다. 그리고 토요일 자율학습을 친구들과 함께 피시방으로 도망갔다가 걸려서 당시 담임선생님께 하키채로 엉덩이 맞은 것. 하루 지나면 사라질 고통들이었다.
내가 하기 싫은 것을 꾸역꾸역해야 하는 상황에 있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라 생각하는 점은 내가 하고 싶어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도 나의 동력은 내가 하고 싶은 마음이 있어야 시작할 수 있다는 것. 그래서 취향도 확실하고,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다.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도 그런 사람이 되기 위해 내가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도.
그런 의미로 선행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이다.
어느 날 상가 계단을 청소하시는 할머님을 뵌 적이 있다. 나는 운동이 끝나고 계단으로 올라가는 중이었다. 계단을 한칸 한칸 물걸레질을 하시는 할머님. 그 계단 밑에서 한 층 올라가려는 이제 막 운동 끝낸 젊은이. 계단은 그 어느 때보다 깨끗해 보였다. 나는 계단을 두 칸씩 올라갔다. 할머님께서 깨끗이 닦고 계시는 계단을 조금이라도 덜 더럽히고 싶었다. 계단을 다 오르니 내 다리가 조금 더 길었다면 세 칸씩 올라갔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좋았다.
가만 생각해 보면 나는 나를 위해 선행한다. 겨울날 자주 오가는 길에 눈이라도 쌓여있으면 빙판길이 되기 전에 발로 휙휙 옆으로 밀어 넣는다. 엘레베이터 안에서 사람이 오고 있을 때 천천히 오시라는 말과 함께 열림 버튼을 누르고 있는 것. 혹여 고맙다는 인사를 받지 못할지라도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된다는 마음. 내가 나를 알아주면 된다는 마음. 이 마음이 쌓이고 쌓이면 나를 넉넉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듯하다.
그렇다고 굳이 선행할 거리를 찾아 다니지는 않는다. 다만 할 수 있는 상황이 온다면 주저 없이 행동한다. 마치 반려견에게 "산책갈까?"라는 한 마디에 신이 나서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처럼. 그리고 이런 행동에 내가 세운 규칙 중 하나는 내게 부담이 없어야 한다는 것. 나를 위한 일인데 부담을 가지면서까지 하게 되면 결국 싫증 나기 마련이더라. 취미로 시작한 게 일이 되는 순간 더 이상 좋을 수만은 없는 경험 한 번쯤은 있지 않나.
어떻게 보면 내게 선행은 일상에서 벌어지는 작은 배려이자 소소한 취미인 듯하다.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순간을 정할 수 없는. 게임을 하다 보면 몬스터를 잡다가 낮은 확률로 좋은 아이템을 먹게 된다. 그럴 때 기분은 너무 짜릿하지 않나. 선행할 기회는 그렇게 갑작스럽게 찾아오게 된다. 그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당연히 해버려야지.
세상에 이바지해야겠다는 마음보다 내게 이바지한다는 마음으로 하다 보니 작은 일이어도 즐기게 된다.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들 하지 않나. 그러니까 나를 위한 것이니 노력보다는 즐기는 마음으로 계속하고 싶다. 그리고 가급적 내가 선행할 때 남들이 몰랐으면 좋겠다. 오로지 나를 위해 한 건데 괜히 칭찬받으면 스스로 창피할 거 같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