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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Mar 23. 2019

생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 

 나는 소설을 왜 읽을까? 이야기가 재미있거나 인물이 매력적이어서 관심을 끌기 때문일까? 처음에는 그랬다. 읽은 책이 늘어나면서 재미와 거리가 먼 소설도 읽기 시작했다. 책이 지겹고 어려웠지만 읽으면서 내용을 곱씹고, 다 읽은 후 작품에 대해 생각을 할수록 소설 속 인물의 어떤 특성에서 내가 보였다. 미처 알지 못했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다. 의식하지 못했던 행동이나 느낌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어렴풋이 인식한다. 스스로에 대한 관념과 믿음이 변하며 자아의 경계가 희미해진다. 그때부터는 작품이 다르게 보이며 해석도 달라진다. 작가의 생애와 당대 사회를 찾아보면 또다른 관점으로 작품을 보게 될 수도 있다. 소설 속 인물과 사건, 작가의 생애와 당대 현실, 그리고 나의 경험과 지금 현실이 서로 얽혀서 삶과 세상을 대하는 생각이 깊어진다. 세계관이 확장되고 사고의 폭이 넓어진다. 그래서 소설을 좋아하고 가까이 한다. 이번에 읽은 <생의 한가운데>는 특히나 작가, 작품, 나, 역사와 현실이 더욱 강하게 상호작용한 소설이었다.


 대학 시절, 학생회실이나 동아리방에 이 책이 꽂혀 있지 않은 책장이 없었다. 그때는 작가도, 작품도 무척이나 유명했고 널리 읽혔다. 린저는 북한 김일성 주석의 가까운 친구로서 80년대에 여러 차례 북한을 방문해 환대를 받았다. 1981년에는 <북한기행문>을 써서 북한이 '인간적 사회주의를 향해 나아가는 도상'에 있다며 찬사를 보냈다. 당시는 군사정권이 북한에 대해 무척 부정적인 정보와 실제 이상으로 과장된 허구만 허용했다. 그래서 독재 정권의 말대로 악의 왕국인지 아니면 북한의 주장대로 지상낙원인지 확신하기 어려웠다. 운동권은 통일운동의 일환으로 ‘북한 바로 알기’운동을 벌였는데 북한도 사람이 사는 곳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저명한 작가 루이제 린저가 북한을 살기 좋은 곳으로 묘사했다는 사실은 좋은 근거가 되었다. 이런 연유로 대학가에서 그녀의 작품은 널리 알려졌다. 내 경우에도, 그무렵엔 책을 좋아하지 않아서 읽지 않았을뿐이며, 언젠가 꼭 읽어야 할 소설로 여겼다. 지금은 북한에 대해서 예전보다 훨씬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환상은 사라지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판단한다. 그녀의 작품에 필요 이상으로 붙어 있던 후광이 사라졌다.  


 [조선중앙텔레비젼이 방영한 기록영화 중, 1988년 방북한 루이제 린저가 김일성 주석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책은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1911~2002)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전혜린이 번역한 판본이 유명한데 이 번역본(1961)은 지금까지도 가장 인기다. 나는 전혜린이 번역한 판본이 너무 옛날 문체라고 들어서 좀더 나중에 번역된 범우사 판을 구입했다. 그런데 이 책도 1976년에 나온 번역이었다. 오래된 번역이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여성 인물의 미묘한 심리를 제대로 이해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주인공 니나가 대등한 관계의 남자에게도 일관되게 존대를 하는 점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은 시점에 남성이 번역했으니 그렇다 치자. 언니에게 말할 때도 존대와 반말이 오락가락하는 문장은 참기 힘들었다. 더구나 미묘한 심리는 내용이 아니라 말투로 드러나는데 번역자는 이런 점을 그닥 고려하지 않았다.


 이 작품은 독특한 구성을 하고 있다. 작중 화자인 마르그레트는 수십 년 만에 우연히 여동생 니나를 만난다. 니나는 자기가 곧 런던으로 떠나는데 언니를 만나고 싶다며 뮌헨으로 오기를 청한다. 마르그레트는 니나와 함께 슈타인 박사가 보낸 일기와 편지를 읽으며 니나의 과거와 삶에 대해 이야기한다. 슈타인 박사는 니나가 소녀일 때 패혈증을 치료한 의사인데 18년 동안 그녀를 사랑하고 지켜보며 둘의 관계를 중심으로 일기를 썼다. 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자신이 쓴 일기와 그녀에게 받은 편지를 모아 보낸 것이다. 내용의 대부분은 슈타인 박사의 일기이며 마르그레트와 니나의 대화가 중간중간 이루어진다. 


 니나는 거침없는 성격과 뜨거운 열정을 소유했다. 사랑에 자유로우며 결혼에 지고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다. 남자의 사랑에 목매지 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더 우선했다. 나치의 발흥과 2차 세계 대전을 겪으며 나치에 저항하는 지하활동을 하다 투옥되는 등 위태롭게 살기도 했다. 이 책은 한국 여성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주인공 니나가 보여준 열정적이며 주체적인 삶이 얼마나 큰 울림이었을까? 전혜린은 에세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전형되고 초월화된 또 하나의 자기를 흰 종이 위에 창조하는 과제에 온 정열과 지성을 기울이고 있는 니나에게, 남성이란 그림자와도 같이 지나가 버리는 존재인 것이다. 남자, 연애 이런 일은 나에게 있어서 중요하지 않다고 니나는 종종 말하고 있고, 나는 통과의 기분을 느낀다고도 말하고 있다(……) 남자뿐 아니라 여자라 할지라도 그러한 투기 없이는 결코 행복이란 있을 수 없다는 것, 무엇보다도 결혼이라는 신기루에 속지 말라는 것, 결혼 속에 도망가더라도 결국 계산서는 뒤늦게라도 오고야 만다는 것”


 여성에게 사랑보다 더 중요한 가치는 없으며, 정절은 이를 증명하는 방법이라고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믿는다. 이런 신화와 다르게, 니나는 사랑과 남자는 자신의 삶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지 않으며 삶은 자신이 만들어가는 것이라고 믿고 그에 따라 행동한다. 그렇지만 이 과정이 결코 쉽지 않다. 그녀가 원하는 삶의 방식은 사회적 사슬에 얽매어 제약을 받고 있다. 그녀는 이상을 추구하지만 현실을 무시하지도 않는다. 현실과 이상의 간극이 자아내는 긴장은 그녀의 삶을 아슬아슬하게 만들며, 삶과 죽음을 극단적으로 오가게 한다. 나중에 성공한 소설가가 될 정도로 예민한 감성을 타고난 니나는 오롯이 자신의 삶만 바라볼 수 없다. 주위의 편견과 맞서야 하며, 남녀관계를 규정한 관습과 제도에서도 벗어나야 했다. 이것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이겠는가? 그녀는 임신한 상태로 자살을 기도하는 지경에 몰리기도 했다. 니나가 즉흥적으로 행동하고 항상 감정이 불안정한 이유가 있다. 그녀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끊임없이 진동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저자 루이제 린저의 실제 삶과 이상의 간극이기도 하다. 


 루이제 린저는 자서전에서 1944년 국가반역죄로 투옥되어 사형을 받을 수도 있었지만 나치의 패망으로 풀려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그녀의 남편, 헤르만이 남긴 기록에 따르면, 사소한 말실수로 친구의 남편에게 고발당해 연행되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들과 친구가 조사를 해보니 나치에 대한 저항을 한 흔적은 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히틀러를 찬양하는 시를 발표하고, 유대인 교장을 고발하는 등 친나치 행적을 보였다. 그녀는 자서전에서 두 번째 남편 헤르만이 동성애자라서 그를 보호하기 위해 결혼을 했다고 썼지만 이조차도 사실이 아니었다. 그녀가 밝혔던 과거가 미화된 거짓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작품의 진정성도 의심받았다. 대표작이며 가장 인기 있는 <생의 한가운데>는 그녀의 삶을 바탕으로 한 자전적 소설이다. 그러므로 그녀가 이야기한 삶이 거짓이라면 그녀의 작품도 빛을 잃는다. 반나치투쟁, 동성애자 남자를 보호하기 위한 위장결혼, 국가반역죄……어쩌면 이런 면모는 그녀가 살고 싶었던 삶의 모습이 아닐까? 그렇다면 <생의 한가운데>에서 주인공 니나가 보여준 혼란과 갈등은 린저의 삶이 그녀의 이상과 달랐기 때문에 나오지 않았을까? 


 작가가 이 작품을 쓸 때, 일부러 역사를 왜곡하거나 자신을 변호하려 썼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랬다면 이처럼 깊은 성찰이 깃든 소설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린저는 자기 나름대로 솔직하게 자신을 드러냈다. 자신이 선택했던 실제 삶과, 자신이 살고 싶었던 이상적인 삶 사이에서 그녀도 니나처럼 끊임없이 진동하며 커다란 내적 갈등을 겪었다고 생각한다. 역설적으로 그 갈등을 고스란히 드러낸 덕분에 니나는 주체적 여성의 스테레오 타입이 아니게 되었다. 때론 현실의 굴레에 무너지고, 때론 영웅보다 더 과감하고, 남자에게 기대고 싶어 할 때도 있다가, 스스로의 삶을 개척해 나가는 복합적인 면모를 가진 니나가 창조될 수 있었다. 


 주인공 니나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복잡한 인물은 니나를 사랑하고 지켜보며 일기를 쓴 또다른 화자 슈타인 박사이다. 그는 격정어린 감정, 위태로운 행동에 휩싸인 니나와 달리 차분한 성격에 안정적 삶을 누린다. 한발자국만 내딛으면 니나와 결혼할 기회가 몇 번이나 있었고, 니나가 그를 원하기도 했는데, 그때마다 뒤로 물러났다. 그는 니나를 사랑하고 지켜보는 과정에서 삶의 의미를 얻는다. 그도 처음엔 여느 남자와 다르지 않게 그녀를 소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니나의 삶에 개입하고 지켜보면서 자신의 마음 깊숙하게 숨어 있는 또다른 자신을 발견한다. 


“나는 나의 감정의 폭발이 니나에 대한 것이 아니라, 나 자신에 대한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가 없었다. 또 니나를 손에 넣으려는 나의 투쟁이 원래 그 한 사람의 특수한 여자를 얻고자하는 투쟁이 아니라 특수한 방향 속에서 나의 본질에 대한 인식과 발전을 위한 투쟁이었고 따라서 이러저러한 여자에 대한 선택도 이러저러한 여자한테만 해당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훨씬 더 나 자신의 이런 저런 가능성에 대한 택일이었다는 것을 알 리가 없었다. 니나는 내가 나 자신을 대하고 거부하려고 했던 나의 본질의 그 부분과 가능성이 구체화된 것이 아니었을까”


 “우리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 우리가 갖고 있는 생각이다.” 페르난두 페소아의 통찰처럼 슈타인은 사랑의 본질을 깨닫고 이 사랑을 통해 자신의 삶의 본질이 무엇인지 탐구하게 된다. 타인에 대한 자신의 생각, 혹은 감정을 조금 떨어져서 관조할 수 있다면 결국 자신을 발견한다. 슈타인에게 이 과정이 무척 고통스러웠다. 그러나 결국 니나가 살아가는 모습에 비춘 그의 삶이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을 인식한다. 이것은 소설을 읽는 독자가 작품을 통해 얻는 결과와 다르지 않다! 니나와 슈타인의 관계를 여성을 통한 남성의 구원으로 생각하고 싶지 않다. 둘 사이에는 분명 성적 긴장이 맴돌았다. 하지만 사랑이라고 하던 다른 뭐라고 부르던, 사람 사이의 관계를 통해 삶의 본질을 깨닫고 의미를 찾았다면 이는 성의 구별에서 비롯되었다 할 수 없다. 다만, 여성인 니나가 슈타인과의 관계에서 결정적인 삶의 의미를 찾지 않았다는 점은 지적할 수 있겠다. 굴레를 떨쳐버리려는 여성과 그녀를 통해 삶의 의미를 점차 깨달아가는 남성의 대비가 설득력있게 제시되었다. 


 <생의 한가운데>를 좋은 책으로 누군가에게 권할 수 있을까? 나는 솔직히 자신이 없다. 작가의 생애에 얽힌 거짓과 진실이 감동을 떨어뜨릴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좀 더 넓은 관점을 가지면, 작가와 작품을 별개로 분리하면서, 동시에 작가와 작품의 상호작용을 인식한다면, 색다른 독서 경험을 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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