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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Mar 07. 2019

키 재기

히구치 이치요 소설집

 이 책 <키 재기>는 고풍스러운 문체로 메이지 시대(1868~1912) 서민 여성이 살아가는 모습을 섬세하면서도 담백하게 표현한 단편들을 담았다. 작품을 쓴 히구치 이치요(1876~1896)는 11세에 우수한 성적으로 소학고등과 제 4급을 마쳤다. 그런데 전통 가치관을 가진 부모의 뜻에 따라 진학하는 대신 가사를 돕다가 14살이 되어서야 헤이안 시대(794~1185, 우리나라로 치면 고려 초중기) 여성 서사의 전통을 따르는 고문(古文), 이른바 화문(和文)을 가르치는 하기노야 가숙(家塾, 숙-글방)에 들어갔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여성상을 내면화하는 교육을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를 대표하는 남성 작가들은 대부분 근대 학문을 배우고 유학까지 다녀왔다. 그들은 근대와 전통의 충돌이 만들어낸 갈등을 어느 정도는 서구 철학에 담아 문학으로 형상화했다. 근대적 주체의 형성, 서구 자본주의가 밀려 오면서 급속도로 전통이 해체되는 시대의 특징인 과도한 물질주의 비판, 근대를 수용하는 자세가 그들의 작품에 드러난다. 반면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에는 이런 거대 담론이 없다. 그녀가 쓴 작품에는 일상의 소소한 모습이나 미세한 감정의 변화가 드러나는 행동이 있다. 어떤 거창한 철학이나 윤리가 들어있지 않다. 그녀는 근대화 바람이 일던 당대의 풍경을 자신만의 감각으로 받아들여 독창적으로 제시했을 뿐이다. 여기에서 독자는 삶의 진짜 모습과 의미를 어렴풋하게나마 느낀다. 인생은 누구도 명확하게 정의할 수 없다. 우리는 다만 희미하게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삶의 진실은 원대한 사명이나 숭고한 진리에서 오는게 아니다.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 스스로가 느끼는 감각, 감정, 욕망 자체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것들을 거의 의식하지 못하며 산다. 우리는 문학을 통해서 이런 것들을 알게 되고 여기에 비추어 자신의 삶을 깨달을 수 있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쓴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보면 이런 구절이 나온다. 


“가장 훌륭한 작품을 만드는 이들은 가장 세련된 환경에서 살고 가장 재치 있는 화술과 가장 폭넓은 지식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 갑자기 그들 자신만을 위해 살기를 멈추고 자신의 개성을 거울처럼 투명하게 만들어, 비록 현재의 삶이 사회적으로 또 어떤 점에서는 지적인 면에서조차 초라하다 할지라도 그 삶을 거울에 반영하는 자이다.”


 이 말은 정확하게 히구치 이치요의 작품과 생에 들어맞는다. 그녀는 나이 16세에 아버지가 사업을 벌이다 실패하고 죽은 이후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졌다. 소설을 쓴 이유도 돈을 벌기 위해서였다. 제대로 된 고등교육을 받지도 못했고, 돈이 없어 유곽 근처 허름한 집에서 살았다. 과로로 인한 폐결핵으로 24살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그럼에도 프루스트의 말처럼 투명한 개성의 눈으로 삶 자체를 명징하게 반영한 소설을 남겼다. 그녀는 편견과 선입견이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인위적으로 꾸미지 않은 생생한 삶을 포착했다. 독자들은 이런 그녀의 작품을 읽고 자신의 삶과 자신을 둘러싼 세상에 대해 조금 더 알아가게 된다.


 투명한 개성의 눈을 통해 창조된 작품 속 인물들은 다층적인 면모를 보인다. 여성은 오로지 사랑만으로 자신의 삶을 평가하지 않고 인생의 다양한 측면을 고루 살핀다. <탁류>에서는 오히려 남성이 사랑에 얽매어 가족에게 버림받고 이후 자살로 생을 끝내기도 한다. 저자는 당시 여성들이 시대의 제약에 묶여 있는 점을 지나치지도 않았다. 자살하는 남자는 사랑의 대상인 기녀를 먼저 죽인 후 자신의 배를 갈랐다.  


 한편, 남성이 여성을 성적 대상으로만 여기더라도 작가는 남성을 대상으로만 바라보지 않았다. <갈림길>에서 고아 소년 기치조는 어리고 가난하여 마음을 주는 이 없이 살다가 이웃 오쿄 누나와 남매처럼 따뜻한 정을 나눈다. 그러다 오쿄가 부자의 첩으로 들어가게 되자 그녀의 포옹을 거부하며 정을 거둔다. 오쿄가 탐욕에 눈이 멀어 부자의 첩이 되길 원한건 아니다. 그래도 가난하고 힘든 생활에 너무 지쳤다. 기치조가 생각하기에 오쿄가 지금도 먹고 살 수 있는데 첩이 되기로 한건 자신을 팔아먹는 일이다. 첩이 된다면 삶의 주인으로서 대등하게 정을 나눌 수 없다. 기치조는 자신의 기준에 따라 가장 따뜻하게 나누던 정도 끊어버린다. 이 작품에서 남성이든 여성이든, 아무리 가난한 사람이라도 점차 근대적 개인으로 자의식을 얻는 모습이 드러난다. 가난하지만 아름다운 여성이 첩이 되는 일은 예전에도 많았다. 첩이 되어 자신이나 가족이 이익을 얻는다면 부끄러운 일도 아니었다. 부와 권력을 가진 남성은 합법적으로 처첩을 거느릴 수 있기도 했다. 시대는 바뀌어 첩이 된다는 것은 자기만이 자신의 주인이 되는 일에 반대되는 부끄러운 것이라는 인식이 생겼다. 기치조의 경우에도 개인보다 가문 혹은 가족이 전부이던 과거와 달리 자신이 살면서 형성한 신념으로 주체적 결단을 내린다. 


 히구치 이시요는 한때 요시와라 유곽 근처에 살았다. 표제작 <키 재기>는 바로 이곳을 배경으로 소년 소녀들이 어른이 되어가는 미묘한 시기를 고사에서 따온 풍부한 비유와 지극히 섬세한 묘사로 표현했다. 등장 인물들은 유곽이라는 특수한 공간에서 살아가기 때문에 바깥 평범한 세상과 결이 다른 고민을 한다. 그런데 구체적 내용만 다르지 이 시기에 이른 청소년은 누구나 미래에 대한 불안과 사랑에 대한 열정으로 휘청거린다. 삶의 구체성이 곧 보편적인 진실을 나타낸다. 또, 작품 속 풍경이 실제라고 생각하면 암흑가의 이야기처럼 어둡고 잔인할 테지만, 젊음이 내포한 활력과 저자 특유의 담백하고 명징한 문체 덕에 명랑한 기운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이런 느낌은 실제 요시와라 유곽의 분위기가 그랬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에도 시대 수도 유일의 거대한 공창이면서 문화와 유흥이 시작되는 곳이기도 했다. 우키요에로 표현된 요시와라를 보면 유곽이라는 사창가가 주기 마련인 음습한 느낌 대신  활기와 번화함이 먼저 눈에 들어올 것이다.


       [우타가와 히로시게, <동도명소 시리즈> 중 요시와라의 벚꽃놀이] 


      [가쓰시카 오이, 요시와라의 격자창 앞에서]




 히구치 이치요는 2004년 2차 대전 이후 여성 최초로 일본 5,000엔 지폐 앞면의 주인공이 되었다. 책을 읽기 전에는 이런 작가가 있는지도 몰랐지만 지금은 충분히 수긍할 수 있다. 너무 일찍 요절해 아쉬움이 크다. 이토록 투명하게 삶을 드러내는 작가가 오래 작품활동을 했다면 얼마나 뛰어난 소설이 나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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