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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an 13. 2020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1부

우리의 직관 너머 물리학의 눈으로 본 우주의 시간

 우리는 ‘시간’ 속에서, ‘시간’을 느끼며, ‘시간’과 더불어 살아간다. 우리의 삶은 시간에 의존한다. 우리는 시간을 인식하며 소멸에 대한 두려움과 영원에 대한 환희처럼 상반되는 감정을 느끼기도 한다. 시간을 의식하지 않고 할 수 있는 일이나 사고가 있을까? 이처럼 시간은 존재와 인식에서 무척 중요한 개념이다. 하지만 시간이 뭐냐 묻는다면 제대로 답하기가 어렵다. 사실 ‘시간’처럼 기초적인 개념은 그 의미가 모호하고 정의내리기 어렵다. 나는 이럴때 과학이 밝힌 내용이 궁금하다. ‘나’라는 존재는 물리적 몸을 기반으로 형성되었다. 내가 가진 생각, 느낌, 감정과 나 스스로에 대한 자기 인식조차 내 몸을 구성하는 물질들이 상호작용한 결과이다. 물리적 기반 위에 서야 사실을 알 수 있고, 그 다음에야 의미가 무엇인지 파악할 수 있다. 과학이 밝힌 시간의 실체를 들여다보고 시간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보려 한다.


 사람들은 시간이 “흘러간다”고 표현한다. 시간이 과거에서 현재를 거쳐 미래로 흘러가고 만물은 이 흐름 위에 있다. 우리가 생각하는 시간의 이미지는 대체로 이렇다. 그런데 물리학자 카를로 로벨리가 시간에 대해 쓴 이 책의 제목은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이다. 현대 물리학이 밝힌 시간이란 통념과 다른 놀라운 모습을 띠고 있으리란 기대가 든다. 저자는 1부 “시간 파헤치기”에서 현대 물리학이 밝혀내, 시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기존의 생각을 송두리째 뒤흔든 다섯 가지 상실을 소개한다.  


 1. 유일함의 상실


 시간은 유일하지 않다. 시간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에서 바닷가 모래사장에서보다 더 빨리 간다. 게임을 할 때는 시간이 빨리 가고, 지루한 수학 강의를 들을 때 시간이 천천히 가는 주관적 시간을 말하는게 아니다. 일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모든 물체는 자기 주위의 시간을 느리게 만든다. 산의 정상은 지구의 중심에서 해안보다 더 멀리 있기 때문에 시간이 덜 느려진다. 그래서 상대적으로 산 정상에서의 시간이 더 빠르다. 이렇게 되는 이유는 중력 때문이다. 태양과 지구가 서로 접촉하는 상태도 아닌데 어떻게 서로 끌어당길까? 물체는 자기 주위의 시공간을 변화시킨다. 시공간이 굽어지기 때문에 서로를 향해 떨어지게 된다.  



 실제로 정밀도가 뛰어난 시계를 사용하면 높은 곳에 위치한 시계가 아래에 있는 시계보다 빨리 간다. 이 실험은 시간이 모든 장소에서 공평하게 흘러가는게 아니라는 의미다. 시간은 유일하지 않다. 공간 속의 모든 위치에서 다른 시간이 흐른다.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시간은 없다. 모두에게 공평하게 흐르지도 않는다. 다만 지구 안에서라면 그 차이가 아주 미미할 뿐이다.



2. 방향의 상실


 시간이 모든 곳에서 똑같지는 않더라도 어쨌든 과거에서 미래로 흘러가는거 아닐까? 현대 물리학에서 과거와 현재, 미래를 구별할 수 있는 유일한 이론은 열역학 제2법칙이다. 뉴턴의 역학, 맥스웰의 전자기방정식,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 슈뢰딩거의 파동 방정식에서 과거와 미래가 구분되지 않는다. 시간 변수 t 대신 -t를 넣어도 방정식은 성립한다. 프로이센의 루돌프 클라우지우스(1822-1888)는 열이 고온에서 저온에서 이동하기 때문에 증기기관이 구동된다는 사디 카르노(1796-1832)의 이론을 숙고했다. 클라우지우스는 열이 뜨거운 물체에서 차가운 물체로 이동하며, 반대로 열이 차가운 물체에서 뜨거운 물체로 이동할 수 없다는 열역학 제2법칙을 발표했다. 그는 ‘열이 역행 없이 한 방향으로만 이동하는 상황을 측정하는 양’을 엔트로피라 불렀다. 열이 뜨거운 물체에서 차가운 물체로만 흐르기 때문에 엔트로피는 그대로거나 증가만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열역학 제2법칙을 다르게 표현하면 “엔트로피는 고립계에서 감소하지 않는다.” 모든 물리학 이론에서 열역학 제2법칙 홀로 방향성을 갖고 있다. 고립된 계는 엔트로피가 증가(또는 일정한)하는 방향으로만 변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시간이 흐르고 과거로 돌아갈 수 없는 근거로 이 법칙을 드는 경우가 많다.  



 엔트로피가 무슨 개념인지 알아보자. 시간의 흐름과 방향을 이해하는데 중요하기 때문이다. 엔트로피가 열의 이동에서 나온 개념이니, 우선 열이 무엇인지 알 필요가 있다. 열은 열이 나는 물체와 별도로 존재하는 다른 물질이 아니다. 물체 자체의 속성이다. 바로 물체를 이루는 원자나 분자들이 일으키는 운동이다. 운동이 활발하면, 즉 원자나 분자의 운동에너지가 높으면, 온도가 높고 뜨겁다. 차가운 물체는 상대적으로 입자의 운동이 적고 정적인 상태다. 이 사실을 처음 밝힌 사람은 루트비히 볼츠만(1844~1906)이다. 그는 원자론이 가설에 지나지 않았을 때, 원자가 실재한다고 주장하며 기체운동론을 확립했다. 열의 이동이나 기체의 확산, 물에 빠진 잉크의 확산은 모두 분자의 운동 때문에 일어난다. 볼츠만 방정식은 후에 아인슈타인이 브라운 운동을 규명해 원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토대가 되었다.


 열 전달은 뜨거운 물체의 분자들이 심하게 요동하면서 차가운 물체의 분자와 충돌하여 운동에너지를 전달하는 과정이다. 상대적으로 조용하던 차가운 물체의 입자가 활발히 움직이는 뜨거운 물체의 입자와 만나 통계적으로 각 입자의 운동에너지가 비슷해지게 되는데 이 상태를 ‘열평형’이라고 한다. 이런 관점, 즉 입자라는 미시적 관점에서 열을 설명하면 엔트로피를 ‘무질서한 정도’라고 말할 수 있다. 물리학에서 ‘무질서한 정도’는 특별한 경우가 점점 사라진다는 뜻이다. 순서대로 정리된 카드를 여러번 섞으면 순서가 제멋대로 뒤섞이는 것과 같다. 경우의 수를 따져보면 1부터 52까지 숫자가 매겨진 카드 한 묶음이 1부터 차례대로 정리된 경우는 오직 하나다. 그런데 이를 뒤섞으면 나타날 수 있는 경우의 수는 천문학적으로 늘어난다. 이 가능한 경우의 수가 가능한 미시적 상태의 수다. 각 입자의 속도와 위치를 미시적 경우의 수라고 할 수 있다. 현실적으로 모든 입자의 속도와 위치를 확인할 수 없으므로 통계적으로 처리한다. 


 볼츠만은 이런 통계역학의 관점에서 엔트로피 방정식을 세웠다. 


S = k * logW


 k는 볼츠만 상수이며 W는 계가 가질 수 있는 상태의 수다. k가 일정한 상수이므로 엔트로피 S가 증가한다는 의미는 계가 가지는 상태의 수 W가 증가한다는 뜻이다. 카드가 섞이면서 가능한 경우의 수가 늘어나듯, 분자도 섞이면서 입자가 취할 수 있는 경우의 수가 늘어나며, 이것이 열의 이동이다. 자연은 경우의 수가 증가하도록, 즉 엔트로피가 늘어나는 방향으로, 특별하게 구별할 수 있는 상태가 줄어드는 쪽으로  움직인다. 여기까지만 보면, 우주가 엔트로피가 증가하는 데에 따라, 시간이 흐른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째서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주장하는걸까?


 미시적 경우의 수가 무슨 의미인지 되짚어보자. 카드를 예로 들면, 처음에 카드가 순서대로 정리되어 있다고 하면 이는 카드에 매겨진 숫자의 측면에서만 그렇다. 어떤 경우가 특별하다면 카드의 어떤 한 속성을 보는 관점에서만 그렇다. 카드의 다른 속성을, 예를 들어 색이나 문양처럼, 통해 경우의 수를 따진다면 숫자의 관점에서 본 경우의 수와 다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카드가 가진 모든 속성을 고려한다면 모든 경우가 특별할 것이다. 어떻게 섞여 있어도 그 경우는 특별한 경우가 된다는 뜻이다. 매 경우가 특별하다는 말은 사실 아무것도 특별하지 않다는 뜻이다. ‘특수하다’라는 말은 우리가 세상을 관찰할 때, 모든 속성이 아니라 특정 속성만 보기에 쓸 수 있다. 우리가 세상을 대략적으로 보기 때문에 생기는 의미다. 


 엔트로피가 생기는 까닭은 우리가 세상을 대략적으로, 희미하게 보기 때문이다. 이런 관점에서 엔트로피는 우리가 보지 못하는 다양한 구성이 얼마나 많은지 표현하는 양이라고 할 수 있다. 만약 우리가 세상의 모든 구성, 모든 속성을 안다면 이들은 저마다 특별하기 때문에 엔트로피 관점에서는 차이가 없다. 그렇다면 물리학에서 유일하게 과거와 미래의 차이를 구분하게 해주던 엔트로피 증가도 있을 수 없다. “과거와 미래의 차이는 세상을 보는 우리 자신의 희미한 시각 때문에 발생한다.” 시간은 방향성을 잃는다.


 3. 현재의 끝


 (1) 속도가 시간을 늦춘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에 따르면, 움직이는 물체의 시간은 늦춰진다. 즉, 시간이 느려진다. 대신 길이, 즉 공간은 수축되어 줄어든다. 관성계간의 상대속도에 따른 시공간의 유기적 관계를 수학적으로 보여주는 식이 바로 로렌츠 변환식(Lorentz transformation)이다. 이 식에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시간과 공간이 시공간이라는 하나의 개념으로 나타난다는 점이다. 시간과 공간은 마치 고무풍선 거죽처럼, 만약에 풍선의 한쪽을 누르면 다른 한쪽이 튀어나오는 것처럼 각개 관측자의 운동상태에 따라 한쪽의 시간이 '지연'되면 다른 쪽의 공간이 '확장'되는 기묘한 현상도 발생한다. 그러면 상대적으로 지연된 쪽의 공간은 줄어들고, 다른 쪽의 시간은 빨라진다. ‘광속 불변의 원리’를 공리라고 하면 이는 당연한 귀결이다. 정지 상태의 관찰자는 빛의 속도를 초속 30만 킬로미터로 측정한다. 빛과 같은 방향으로 운동하는 관찰자는 빛의 속도를 그보다 느리게 측정할 것 같은데, 그에게도 광속은 시속 30만 킬로미터로 측정된다. 운동하는 관찰자의 시간은 늘어나고 공간이 수축하기 때문이다. 속도는 거리를 시간으로 나눈 값이다. 느리게 측정되어야 할 광속이 일정하게 측정된다면 관찰자의 운동으로 시간이 늘어나고 거리가 줄어들기 때문이다. 시간 지연 및 길이 수축은 실험으로 증명된 사실이다. 같은 장소에 있더라도 움직이냐, 가만히 있느냐에 따라 시간이 다르게 간다. 



  (2) ‘지금’은 아무 의미가 없다.


 한 사람은 기차의 중간에 타서 달리고 있고 한 사람은 기찻길 옆에 앉아있다고 하자. 길가에 앉아 있는 사람이 기차의 중간에 오는 순간 기차의 앞과 뒤에 벼락이 쳤고, 기차에 타고 있는 사람이나 길가에 앉아 있는 사람 모두 벼락을 목격했다.




 만약 길가에 앉아 있는 사람이 기차의 앞뒤에 동시에 벼락이 치는 것을 보았다면 기차를 타고 있는 사람은 어떻게 관측했을까? 벼락을 관측하기 위해서는 벼락을 친 불빛이 관측자에 도달해야 한다. 길가에 앉은 사람이 볼 때는 기차 앞뒤에서 오는 불빛이 도달하는데 걸리는 시간이 같다. 그러나 기차가 앞으로 달리고 있으므로 기차 안에 탄 사람이 볼 때는 앞쪽에서 오는 빛이 뒤쪽에서 오는 불빛보다 먼저 도달한다. 따라서 길가에 앉아있는 사람이 동시에 벼락이 쳤다고 봤다면 기차 안에 있는 사람은 앞쪽의 벼락이 먼저 쳤다고 관측할 것이다. 기차 안에 있는 사람에게 동시는 기차 밖에 있는 사람에게 동시가 아니다.  


 이렇게 동시성이 무너지면 ‘현재’라는 개념도 나에게만 적용된다. 다음의 사고 실험을 해보자. 나는 지구에 있고 여동생은 지구에서 4광년 떨어져 있는 행성 프록시마b에 있다. 어느날 멀리 있는 여동생이 생각났다. “현재, 여동생은 뭘 하고 있을까?” 아주 성능이 좋아서 몇 광년 떨어진 곳도 자세히 관찰할 수 있는 망원경이 있다고 하자. 그 망원경으로 본 여동생의 모습이 과연 현재일까? 빛이 4년 동안 가는 거리에 있는 여동생의 모습은 4년 전 모습이다. 그렇다면 여동생이 지구를 떠나 프록시마b로 떠날 때, 서로의 현재를 일치시키기 위해 시간을 맞춘 시계 기준으로 하면 어떨까? 위에서 보았듯, 움직이는 물체는 시간이 지연된다. 그녀의 시계는 나와 다른 시간을 가진다. 이처럼 ‘현재’라는 개념은 나와 내 주변 가까운 곳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이마저도 엄밀한 의미에서 같은 현재는 아니다. 왜냐면 아무리 짧은 거리라도 빛이 이동하는데 시간이 걸리니까.


 동시와 현재가 의미가 없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이는 우주에는 절대적인 기준이 되는 시간이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나에게만 적용되는 ‘고유시간’이 있을 뿐이다. 이를 통해 다른 대상을 상대적으로 관찰할 수 있다. 모두에게 공통되는 ‘현재’가 없고, ‘동시’도 없다. 나에게만 ‘현재’이면 보통 생각하는 ‘현재’와 무척 다른 뜻이다. 현재가 없다면, 과거와 미래를 어떻게 구별할 수 있을까?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4. 독립성의 상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스승으로 유명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이 변화의 척도라고 여겼다. 세상은 변화한다. 이런 변화가 어떤 정도로 일어나는지 측정하기 위해 인간은 시간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사용한다. 그렇다면 만약, 아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시간은 흐르지 않는가? 아리스토텔레스는 변화가 없다면 시간도 없다고 여겼다. 그는 공간의 개념도 정의했다. 한 물체의 공간은 그 물체를 둘러싸고 있는 것이다. 즉, 공간은 사물의 정렬상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비어 있을 수 없다. 물질이 접촉하지 않는 빈 공간은 없다. 힘은 원격으로 작용하지 않고 직접 접촉을 해야만 전달된다. 이런 관념에서 나중에 빛의 매질이라고 여겨진 ‘에테르’가 나왔다. 


 고전역학을 확립한 뉴턴은 다르게 생각했다. 그는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이 물질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여겼다. 공간은 물질을 담는 그릇과 같은 존재로 전 우주의 모든 물질이 사라져도 공간은 남아 있고, 세상에 아무런 변화가 없어도 독립적으로 흐르는 시간이 있다는 생각이다. 라이프니츠는 뉴턴의 절대적 시간관에 반대하며 오직 이전과 이후만 있다, 시간은 사건이 일어난 순서일 뿐이라는 관계적 시간론을 주장했다. 


 현대 물리학은 아인슈타인의 일반 상대성이론에 이르러 시간과 공간에 대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한다. 우주의 물리적 현실을 구성하는 실체를 물리학자들은 ‘장(場, field)’이라고 부른다. ‘전자기장’은 빛을 이룬다. 전기를 발생시키고, 나침반의 바늘이 북극을 향하도록 한다. ‘중력장’도 있다. 중력이 생겨난 근원이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만들어낸다. 시계와 자는 중력장 외연의 크기를 각각 다른 측면에서 측정하는 도구라고 할 수 있다. 시공간이 중력장이고 중력장이 시공간이다. 3에서 시간 지연과 길이 수축을 이야기할 때, 시간과 공간이 별개가 아니라 서로 영향을 주고 받는다는 내용이 나왔다. 시간과 공간은 중력장의 서로 다른 측면이 표현된 것이기 때문이다. 시간은 공간에 독립되지 않은 연결된 실체이며, 시공간은 물질에 의존한다. 중력장은 물질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난 물리적 실체이다. 시간은 독립된 실체가 아니라, 연결된 실체다. 


 5. 시간의 양자(연속성의 상실)


 시간이 중력장에서 나온 물리적 실체라면 양자역학을 따른다. 양자역학이 찾아낸 물질의 성질은 물리적 변수의 입자성, 미결정성, 그리고 관계적 양상인데 시간 또한 마찬가지다. 


 (1) 입자성


 양자는 물리량이 끊어짐 없이 부드럽게 연속되는 값을 취하지 않고 특정 최소단위의 정수배로 표현이 가능할 때, 그 최소 단위의 양을 가리킨다. 더 이상 쪼갤 수 없는 최소 단위, 더 이상 해상도를 높일 수 없는 최소 단위다. 쉽게 말하면 무언가 띄엄띄엄 떨어진 양으로 있는 것이다. 시간 또한 양자다. 시간은 끊어지지 않고 연속되는 무언가라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시간 또한 양자로, 여러 알갱이로 존재한다. 이 최소 단위가 ‘플랑크 시간’이다. 시간을 측정할 때 플랑크 시간보다 더 작은 단위로 측정할 수 없다. 시간이 최소 단위로 분리된 특정한 값을 가진다는 의미다. 이보다 작은 간격의 시간은 시간으로서의 개념을 잃는다.  



 플랑크 시간의 짝은 플랑크 길이이다. 위의 표를 보면 시간과 공간의 양자가 나타내는 양이 얼마나 작은지 알 수 있다. 


 (2) 시간의 양자중첩


 양자역학은 ‘중첩’이라는 묘한 성질을 발견했다. 양자역학은 양자계가 여러 가지의 가능성이 잠재되어 있는 중첩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만약 중첩상태를 관찰 혹은 측정을 하면 양자계는 여러 가능성 중 한 상태로 드러나고 나머지 다른 상태를 나타낼 수 있는 가능성은 소멸된다. 유명한 ‘슈뢰딩거의 고양이’ 사고실험이 중첩을 비판하기 위해 나왔다. 중첩으로 알 수 있는 사실은 물리세계가 확률적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이다. 원자를 이루는 전자는 어디에 있는지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오직 확률로만 예측할 수 있다. 원자핵을 도는 전자의 위치를 ‘확률구름’으로 표시하는 이유다. 


 시공간도 전자처럼 물리적 실체다. 그러니 시공간도 중첩될 수 있다. 양자가 입자와 파동의 이중성을 가지듯 시공간도 파동처럼 흔들리며 중첩될 수 있다. 시간 역시 확률적으로 존재한다. 시간이 중첩되며, 확률적으로 존재한다면 과거와 미래의 차이도 흔들릴 수 있다. 한 사건이 다른 사건의 이전에도, 이후에도 모두 발생할 수도 있다.


 (3) 관계들


  중첩된 상태는 아직 어느 쪽으로 나타날지 결정되지 않은 미결정의 상태다. 미결정성은 다른 물리적 실체와 상호작용하면 깨진다. 즉, 하나의 상태로 구현되어 나타난다. 그렇다면 시간도 다른 무엇인가와 상호작용을 할 때에만 확정된 상태로 드러난다. 시간은 다른 물리적 실체와 관계를 맺어야 구체화되어 나타난다. 


 여기까지 카를로 로벨리가 현대 물리학이 찾아낸 시간에 대한 설명이다. 알수록 더욱 알쏭달쏭하다. 특히 볼츠만의 통계역학으로 열역학 제2법칙을 설명하면서 모든 속성을 고려하면 모든 상태가 특별하기 때문에 엔트로피의 변화가 없어서 시간의 방향도 잃는다는 설명은 놀라웠다. 이해는 가는데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모든 속성을 안다면, 마치 전지전능한 신과 같아서 시간을 아울러 존재하게 되는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철학적으로 시간을 다룬 다른 책도 읽는데 거기서 시간의 3차원주의와 4차원주의가 있다고 했다. 3차원주의는 시간이 흐른다는 주장이고, 4차원주의는 카를로 로벨리처럼 시간이 흐르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는 4차원주의자라고 한다. 물리학이 밝힌 시간의 모습을 보면 4차원주의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겠다. 이 책에 흥미로운 사고실험이 많은데 곧 소개하겠다. 지금은 시간에 대해 차근차근 알아가는 단계여서 내 생각이나 의견은 나중에 따로 정리할 생각이다. 우선은 카를로 로벨리의 시간에 대한 설명을 더 따라가보자. 지금까지 1부였고, 2부에서는 지금까지 새로운 시간관에 따라 새롭게 묘사한 세상을 살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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