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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종화 Jan 14. 2020

시간은 흐르지 않는다 - 2부, 3부

시간이 없는 세상에서 시간을 재구성하다.

2부 시간이 없는 세상


 1부에서 카를로 로벨리는 현대 물리학이 새롭게 밝혀낸 사실에 따르면 우리가 시간에 대해 가지고 있던 많은 통념이 틀렸다고 지적했다. 시간은 유일하지 않고, 방향도 없으며, ‘현재’ 또는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가질 수 없고, 독립적으로 존재하는게 아니라 종속되어 있으며, 양자처럼 입자성과 중첩의 성질을 가지고 있다. ‘현재’가 연속해서 이어지며 시간이 흐르는 세상은 참모습이 아니다. 세상은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을까?


 다른 물리적 실체와 같이, 시간도 중력장이 만들었다. 중력장은 양자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시간 또한 양자로서 중첩된다. 시간이 구체화되려면 다른 실체와 관계를 맺어 상호작용을 해야 한다. 시간만이 아니라 다른 물리적 실체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세상은 단독자로서 드러날 수 없다. 서로간의 관계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서로간에 관계를 맺고 상호작용 하는 일을 우리는 사건이라고 부른다. 즉, 세상은 사건들의 총체이다. 


 사건이 발생한다면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는 뜻이다. 세상이 사건들의 총체라면, 세상은 변화한다. 이 변화들, 사건들 사이의 관계가 시간의 구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계적 시간관에서 보면 과거, 현재, 미래의 구분을 허상으로 보지 않아도 된다. 과거, 현재, 미래의 구별은 이 세상의 ‘일시적’ 시간 구조에 해당한다. 다만 절대적 시간에 따라 모든 사건이 차례로 줄을 서서 하나의 흐름에 놓여지는 구조가 아니다. 변화와 사건은 하나의 질서에 따라 일어나지 않는다. 매우 복잡하지만 서로간의 관계가 시간의 구조를 만들어내긴 한다. “오직 사건들과 관계들만이 존재한다.” 고전 물리학의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물리적 실체가 변화하는 여러 속성을 양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변수다. 과학 이론은 변수들의 관계를, 서로가 서로에 대해 어떻게 변화하는지 설명한다. 길이, 질량, 속도, 압력, 온도, 개수……세상을 설명할 때 필요한 변수는 인지하고 관찰하여 측정할 수 있는 양이다. 저자가 연구하는 양자중력 이론에서는 기본 방정식이 시간 변수를 포함하지 않는다. 저자의 주장에 따르면 실제 우주에서 시간 변수가 근본 수준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 변수들 사이의 관계가 어떤지 설명하는 일에 시간이 반드시 필요하지 않다는 뜻이다. 시간은 우주의 근본 원리가 아니라는 의미다. 그런데 왜 우리는 시간을 인식하여 시간 안에서 살아갈까? 3부에서 저자는 시간의 원천을 다룬다. 우리가 무엇을 시간이라 여길 수 있는지 저자의 논의를 따라가보자. 



3부 시간의 원천


 1부와 2부를 거쳐오면서, 우리가 느끼는 시간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시간을 인식하게 된걸까? 먼저 볼츠만의 통계물리학과 열역학을 다시 되짚어보자. 엔트로피가 증가해서 시간에 방향이 부여된다고 느끼는 이유는 우리가 우주를 보는 희미함 때문이라고 했다. 엔트로피는 한 계에서 가능한 모든 미시적 상태의 경우의 수다. 엔트로피는 우리가 특정한 관점으로 즉, 특정한 속성의 측면에서만 관찰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만약 모든 변수와 속성을 다 안다면, 모든 상태가 특수하기 때문에, 구별할 수 없다. 그러면 변화는 있으나 시간은 없는 것과 같다. 우리는 모든 변수를 알지 못한다. 우리가 아는 우주의 변수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이 희미함 덕분에 여러 상세한 변수들을 뭉뚱그려서 하나의 거시적 상태를 상정한다. 우리는 세상을 이렇게만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느끼는) 시간의 특성을 가진 변수가 선택된다. 이처럼 흐릿한 거시적 상태가 결정한 시간을 ‘열적 시간’이라고 한다. 


 양자역학도 다시 살펴 보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따르면 입자의 위치를 알면 운동량(속도)을 정확히 알 수 없고, 운동량을 알면 위치를 정확히 특정할 수 없다고 했다. 수학자 알랭 콘은 양자 상호작용이 교환되지 않는다며 이 현상이 시간의 기원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고 주장했다. 전자가 상호작용을 통해 위치가 고정되면 상태가 변화한다. 만약, 운동량이 고정되면 역시 상태가 변화한다. 중요한 점은 위치를 먼저 알고 나중에 운동량을 알 때와, 운동량을 먼저 알고 위치를 나중 알 때의 전자의 상태가 다르다는 것이다. 이처럼 운동량과 위치를 교환할 수 없는 특징을 양자 변수의 ‘비가환성’이라고 부른다. 물리적 변수를 측정하는 일은 대상과 상호작용을 통해 이루어진다. 측정이 대상과 관계를 맺지 않고서 이루어질 수 없다. 상호작용은 대상을 교란한다. 이 상호작용은 측정 순서에 따라, 무엇을 측정하냐에 따라 다르다. 이 순서가 시간 순서의 기반을 이룬다는 설명이다. 비가환성 때문에 한 계에서 물리적 변수의 집합은 ‘폰 노이만 비가환 대수’라는 수학적 구조를 이룬다. 이 구조 자체에 시간이라고 볼 수 있는 흐름을 볼 수 있단다. 이를 ‘양자 시간’이라고 부른다.


 저자는 열적 시간과 양자 시간은 동일한 현상을 다른 관점으로 볼 때 생기는 양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우리가 ‘시간’이라고 여기는 변수가 된다고 주장한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와, 통계물리학의 엔트로피는 우리가 우주의 모든 속성을 알지 못하는 희미함에서 기원한다. 그래서 저자는 시간의 기원은 우리의 무지라고 본다. 나아가 우리가 아는 우주의 기원과 ‘시간의 화살’도 무지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한다.


 엔트로피는 한 계에서 가능한 미시적 상태의 경우의 수로 본다고 앞서 이야기했다. 그런데 이 경우의 수라는 것도 상대적이다. 마치 속도가 물체 자체의 성질이 아니라 다른 물체와의 관계 속에서만 나타나는 것과 같다. 책의 설명을 옮기면 B와 관련이 있는 A의 엔트로피는 A와 B 사이에 일어나는 물리적 상호작용이 구별하지 못하는 A의 배열 수를 계산해서 나온다. 1부에서 카드의 예를 상기해보라. ‘카드에 매겨진 숫자의 순서’라는 ‘관점’에서 엔트로피가 나왔다. 이때, ‘관점’은 내가, 관찰자가 가진 것이다. 엔트로피는 우리와 무관하게 세상의 객관적인 구조에서만 나오지 않는다. 우리가 세상을 관찰할 때 사용하는 관점에 따라 달라진다. 또, 우리는 세상의 모든 변수와 상호작용하지 않는다. 엔트로피가 상호작용을 통해서 나타나는 상대적 변수라면, 우리가 세상과 상호작용하는 변수가 무엇인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과거와 미래의 구분은 과거에 엔트로피가 낮았다는 점에서만 가능하다. 위 단락의 설명을 따르면 우주의 엔트로피가 낮았던 까닭은 다른 무엇이 아니라 우리 때문이다. 우리가 세상을 보는 관점과, 우리가 세상과 상호작용을 하는 방식이 과거에 엔트로피가 낮은 우주라는 세계를 보게 한다. 우리가 우주를 관찰하고 상호작용하는 특정한 양식이 우리가 속한 물리 체계이고, 이 체계가 ‘시간’이라는 속성을 가진다. 시간의 흐름은 우주 전체의 특징이 아니라, 우리가 우주와 상호작용 하는 계에서만 가능한 속성이란 뜻이다. 우리는 우주에서 우리와 관련된 일부와 상호작용하고, 이를 관찰한다. 카를로 로벨리는 이 상황을 지도에 표시된 나의 위치라는 예로 설명한다. 


 내가 아주 넓은 공원에 왔다.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떠날 시간이 되었다. 그런데 어디로 나가야 하는지, 내가 어디쯤 있는지 모르겠다. 주위를 살피니 마침 공원 지도가 있고, 당신이 있는 현재 위치가 여기라는 붉은 화살표가 지도에 표시되어 있다. 이 지도를 보고 나는 무사히 공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 지도는 어떻게 내가 위치한 곳을 알고 표시하는 걸까? ‘지표성’은 맥락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갖는 언어의 특성이다. 즉, 관점에 따라서 말의 의미가 달라진다. 지도에 표시된 내 위치는 내가 그 지도가 있는 장소에서 지도를 보고 있다는 관점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우리 자신만을 안다는 말하고도 비슷하게 들린다. 나 자신을 안다는 말의 의미는 뭘까? 주위와 구별되는 뚜렷한 경계가 있는 독립된 나를 안다는 뜻이 아니다. 그런 나는 없다. 상호작용하지 않는 입자를 우리가 어찌 인지할 수 있을까? 마찬가지로 나를 둘러싸고 나와 상호작용하는 타인과 사물과 사회를 알고 여기에 반응하는 내 모습을 이해해야 비로소 나를 안다고 할 수 있다. 우리가 무언가를 관찰하고 탐구할 때, 우리와 상호작용을 하는 부분만을 알 수 있다면, 우주를 관찰하는 일은 결국 우리를 아는 일에 지나지 않는걸까? 자기인식이란 이렇게 무한으로 확장되어 우주의 철학적 의미로 이어지는가?


 과거의 낮은 엔트로피는 현재까지 지속되는 흔적을 남긴다. 흔적이 남는다는 말은 되돌릴 수 없는 과정이 생겼고, 그 사건이 어떤 시점에 고정된다는 뜻이다. 되돌릴 수 없는 일은 에너지가 열로 전환되는 열역학 과정을 거친다. 거대한 유적, 화산 폭발의 흔적, 운석이 지구와 충돌해 남긴 구덩이. 사람들이 돌을 옮기며 마찰열이 생겼고, 화산이 폭발하며 엄청난 열이 분출했으며, 운석이 충돌할 때 생긴 거대한 충격 에너지의 일부는 열로 바뀌었다. 이것이 우리가 인지하는 과거다. 풍부한 과거의 흔적은 과거가 고정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미래의 흔적이 없으므로 우리는 미래가 열려 있다고 느낀다. 


 인간의 뇌는 미래를 예측하도록 진화했다. 미래를 예측하는 일은 자연스럽게 미래 일어날 사건의 원인을 찾도록 이끌었다. 원인을 찾기 위해서 필요한 작업이 기억이다. 과거의 흔적인 기억을 더듬어 A 사건 이후에 B 사건이 일어나더라는 관계를 찾아낸다. 기억과 예측이 시간에 대한 관점을 가지게 해준다. 뇌는 어떤 ‘결과’가 있다면 그 이전, 과거에 ‘원인’도 있다고 생각한다. 물리학은 세간의 오해와 달리 인과관계가 아니다. 변화의 규칙만 인정한다. 과거와 미래는 일방향이 아니라 대칭을 이룬다. 원인과 결과, 과거의 흔적, 기억, 과거의 고정성과 미래의 비결정성은 사실 통계적 사실이 나타내는 현상에 이름을 붙인 것에 불과하다. 이 모든 것은 단지 과거의 어떤 특정한 상태가 매우 특별했다는 사실에서 시작했다. 이 특별함조차 우리가 세상을 보는 희미함이 만들었다. 우리가 시간을 인식하는 원리는 이렇다. 


 통계물리학과 양자역학에서 시작한 시간의 근원 탐구는 인간의 신경계로 이어진다. 무엇보다 객관적으로 보이는 과학인데 근원으로 다가갈수록 철학적 해석이 튀어나온다. 물리학의 철학적 해석은 필연적으로 ‘자기인식’으로 나아간다. 수식으로 증명된 어떤 물리학 이론이 나타내는 진실은 하나가 아닐 수 있다. 아인슈타인의 특수 상대성이론은 이른바 ‘로렌츠 해석’과 ‘민코프스키 해석’으로 나뉜다. 결과로 드러난 현상은 두 해석이 같다. 그러나 각자 해석의 접근 방향이 다르며 시공간에 대한 다른 생각으로 이어질 수 있다. 양자역학에서 슈뢰딩거의 파동함수와 하이젠베르크의 행렬역학은 같은 결과를 기술하는 다른 형식이다. 열역학 제2법칙을 통계물리학으로 해석한 결과와 열의 이동으로 해석하는 결과가 얼마나 다른가? 물리학 이론도 철학적 해석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중심에는 ‘자기인식’이 놓여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저자도 밝혔듯, 이 책이 시간에 대해 증명된 사실만 다루지 않았다. 1부는 확실하게 검증된 사실이라고 하지만 해석에 따라 저자와 다른 견해를 가진 학자도 많다. 1부가 이럴진대 2부와 3부는 아직까지는 저자의 주장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나는 이 책을 무척 재미있고 유익하게 읽었다. 저자의 주장이 과학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의문은 여러 가지 있다. 양자역학의 불확정성 원리는 측정의 한계가 아니라 양자의 근원 성질이다. 마찬가지로  통계물리학에서 모든 속성을 안다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게 아닐까? 바로 불확정성의 원리 때문에 ‘라플라스의 악마’는 불가능하지 않은가. 모든 속성을 안다는 것이 물리적으로 불가능하다면 엔트로피의 증가는 당연하여 시간의 방향이, 과거와 미래가 생기지 않을까? 또, 과거의 낮은 엔트로피를 가진 우주가 우리가 우주와 상호작용하는 특정한 계에서만 유효하다는 말이 다중우주를 뜻하는 건지, 아니면 우리가 우주의 일부만을 보기 때문에, 빅뱅의 전모가 지금 아는 것과 다르다는 것을 의미하는지 모르겠다. 이런 의문을 우선은 덮고 시간에 대한 다른 책들을 읽으려고 한다. 이 책으로 시간을 이해하는 첫 길에 들어섰다. 어떤 쟁점이 있는지, 무엇을 눈여겨보아야 하는지 좋은 길잡이라고 생각한다. 특히 어려운 수식이나 이론 없이 쉽게 시간의 물리적 특성을 설명하고, 시간에 대해 보통 사람이 느끼는 감성을 잘 살렸다. 시간의 물리학에 입문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책을 자신있게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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