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고서로 만든 PPT 파일을 3페이지를 하나하나 복사해서 그림으로 메일 본문에 딱딱 붙여 넣는다.
첨부파일 열어보면 모든 게 해결될 텐데, 꼭 메일 본문에 정리하고 보고서를 붙여 넣기 한다.
보고서 디자인이 별로 마음에 들지 않지만 시간이 없다 메일을 보내고 컴퓨터를 끈다.
1시간 동안 쉬가 마려웠는데 참느라 오줌뽀가 터질 것 같다. 화장실로 가면서 재민이에게 이제 나갈 것 같다는 카톡을 보낸다.
7시가 살짝 넘어서 회사 밖으로 나왔다. 제발 아침에 일 좀 시키면 안 될까? 왜 맨난 퇴근할 때 일을 시키는 거야?. 헤어지고 싶지만 헤어지지 못하는 내 자신이 원망스럽다.
광화문 한복판에 있는 회사 건물 밖으로 재민이가 보인다.
추운 날씨인데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재민아"
"예 형님, 일 다 하셨어요?"
"웅 그래 미안하다, 대충 마무리하고 왔어. 추운데 어디 들어가 있지 밖에 있었어?"
"아니에요 형님 저도 방금 왔어요. 서점에 있었어요"
"아 그래? 미안하다 너무 늦어버렸네"
"괜찮아요, 일을 다 하신 거죠?"
"웅 일이 뭐 중요하냐, 네가 중요하지. 대충 해버리고 너 보려고 튀어나왔다"
"하하, 안 그러신 것 같은데"
"진짜야. 암튼,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저요 저는 여기 잘 모르니까요. 형님 좋아하시는 걸로 먹어요"
"아 그래? 그럼 좀 특별한 걸 먹어야겠네"
"뭐 있어요?
"음... 뭐 먹을까... 아 그래! 너 양무침 먹어봤냐?"
"양무침이요? 그게 뭐예요?"
"아하... 양무침을 몰라? 완전 촌놈이네. 부민옥이라고 양무침 잘하는 곳 있는데 거기 가서 소주 한잔 하자"
"옙 좋아요."
양무침.
부들부들 매끄러우면서도 식감이 일품인 소주 안주이다. 양무침 생각에 벌써 군침이 돈다.
식당에는 벌써 사람들이 왁지지껄 시끌벅적하다.
사람들은 무슨 사연이 그렇게 많은지 서로 침 튀기며 이야기하기 바쁘다.
분명 나도 저렇게 침 튀기며 이야기하고 있을 것 같긴 하지만...
자리가 없을까 봐 걱정되었는데, 운 좋게 2층에 조용한 자리로 안내를 받았다.
메뉴판을 볼 것도 없다. 바로 주문에 들어간다.
"이모님, 여기 양무침 소자 하나랑 소주 하나 주세요"
"소주는 뭘로 드릴까?"
"진로 이즈 백으로 주세요"
"옙 알았어요."
오늘 만난 재민이. 재민이와 나는 특별한 사이다. 내가 철원에서 군대를 전역하면서 내 자리를 인수인계받은 후임으로 2년 후배이다.
나는 나와 바통터치를 한 선배와 전혀 인연이 없었는데, 재민이와는 특이하게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지고 있다. 재민이도 전역과 동시에 대기업에 취업했고 결혼도하고 나처럼 아이도 둘이나 있다. 아들 하나, 딸 하나. 성실하고 반듯한 후배다.
"형님 요즘 바쁘세요?"
"아니, 별로 안 바쁜데, 우리 임원은 이상하게 꼭 퇴근할 때쯤에 불러서 일을 시킨다"
"아~꼭 그런 임원이 있어요"
"너네 회사에도 있냐? 암튼 띵가띵가 놀고 있다가 일 시켜서 그거 하고 왔다"
"고생하셨어요"
"그래, 너는 뭐 어떻게 지냈어? 요즘 통 연락을 안 하더라?"
"작년에 정말 바쁘고 힘들었네요."
"왜 회사 일이 힘들었어?'
"회사 일이야 똑같죠..."
"그럼 뭐? 육아 때문에?"
"저는 와이프가 일 그만뒀으니까요... 육아는 와이프가 그래도 신경을 많이 써줬죠"
"뭐여 그럼 뭐가 힘든 거야? 힘든 일이 없는 것 같은데?"
양무침과 정체를 알 수 없는 맑은 국물 그리고 소주가 들어왔다.
양무침. 엄마 화장품으로 예쁘게 분칠 한 듯 하얗고 뽀얀 양이 맛깔나게 무침이 되어 그릇에 올라와 앉아있다.
"맛있게 드세요"
"이게 양무침이에요?"
"엉엉 한번 먹어봐라. 아 잠깐 소주 한잔 따라줄게"
"예옙 형님 감사합니다"
"그래 한잔 하자"
"옙 형님 새해 보고 많이 받으십시오"
"오냐,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야들야들 부들부들 양무침이 입에서 미꾸라지로 변신해 소주를 타고 워터슬라이드를 내려간다.
"오 이거 맛있는데요?"
"맛있지? 내가 무슨 양무침 홍보대사 된 것 같다"
"형님 한잔 더 받으세요"
"어어 그래 천천히 먹자"
"옙 형님"
재민이도 마음에 들었는지 연거푸 소주를 마신다.
양무침이 맛있는 것일까, 무슨 힘든 일이 있는 것일까?
"형님은 요즘 재테크 어떻게 하고 계세요?"
"나야 뭐 주식도 하고 부동산도 하고 코인도 하고 이것저것 다 하잖아."
"집은 아직 거기 사세요?"
"어~나 작년에 원래 살던 집 팔고 갈아타기 했잖아. 말 안 했나?"
"말씀 안 하셨어요"
"어어, 저기 원래 살던 집 팔고 마포로 넘어왔어"
"오, 그럼 마포에 사시는 거예요?"
"아니 그거 입주권이라 좀 기다려야 하고, 홍제 쪽에 살고 있어."
"언제 갈아타기 하셨어요?"
"웅 나 작년 초에 했지"
"그때가 바닥이었잖아요. 잘하셨네요..."
"뭘 잘하냐 그냥 하는 거지. 너는 어떠냐 아직도 거기 살아?"
"거기 살긴 살아요. 월세로..."
"엥 너 자가였잖아. 뭐 어떻게 된 거냐?"
"저는 작년에 너~~ 무 힘들었습니다"
"왜 왜? 뭔 일이야 도대체?"
"소주 한잔 하시죠"
"그래. 천천히 마셔라"
"옙, 키야... 형님 양무침 이거 완전 술도둑이네요"
"이거 한번 맛보면 주기적으로 생각난다"
"저도 자꾸 생각 날 것 같아요"
"그려 또 먹고 싶으면 놀러 와."
"옙 형님 감사합니다."
"그래 이제 그만 뜸 들이고 뭔 일이여?"
"아 저 서울에 있던 집은 팔았어요."
"원래 살던 집을 팔았어?"
"예옙. 전 좀 전에 팔았어요. 3년인가 4년 전에요"
"그걸 왜 팔았냐?"
"전 서울 집 팔고 그 돈으로 지방에 Gap 투자했거든요"
"엥? 서울 집을 팔고 지방 집을 샀다고?"
"예옙... 서울은 너무 오른 것 같아서..."
"그럼 지금 사는 집은?"
"원래 살던 집 팔고 근처에서 월세로 살고 있어요."
"그래? 어허... 왜 그렇게 한 거야?"
"빨리 부자 되고 싶어서 그랬죠..."
빨리 부자가 되는 방법이 있을까? 빨리 부자가 되는 방법이 있으면 사람들이 다 부자가 되지 않았을까?
근면성실한 친구였는데 갑자기 왜 빨리 부자가 되고 싶어 졌는지 궁금했다.
"갑자기 왜 빨리 부자가 되고 싶었어?"
"형님, 제가 유튜브를 보다가 이런 영상을 봤어요"
"무슨 영상?"
"시그니엘에 사는 사람들인데, 저랑 나이가 비슷한 것 같은데 시그니엘에 살더라고요"
"음... 그래서?"
"형님, 인생 한번 사는 거잖아요. 근데 누구는 시그니엘에 살면서 서울을 발아래 두고 사는 거 보니까 욕심이 생기더라고요."
"무슨 욕심이?"
"저도 부자가 되고 싶은 욕심이지요."
"그래서 생각한 방법이 서울 부동산을 팔고 지방 부동산을 매수한 거야?"
"처음에는 제가 생각한 방법은 아니었고요... 형님"
"그럼? 누가 알려줬어?"
"형님 일단 한잔 더 하시죠, 여기 소주 한 병 더 주세요."
발 빠른 이모님이 잽싸게 소주 한 병을 가져다주신다. 빠르게 부자 되는 사람은 없어도 식당에 빠른 이모님은 계신다.
"자 한잔 더 받아라"
"옙 형님, 제가 한 잔 드릴게요"
"오냐, 따라주거라. 한잔 하자"
"옙 형님"
갑자기 '양무침을 시그니엘에서 먹으면 맛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시그니엘이 뷰는 확실히 더 좋겠지만, 식당에서 바로 나온 따뜻한 양무침보다 더 맛있긴 힘들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하기도 하고...
재민이가 소주를 원샷하고 말을 이어간다.
"주식은 제가 잘 모르기도 하고 잃은 경험도 있어서 아닌 것 같고, 그나마 제가 부동산을 좋아하고 잘 아니까 부동산으로 돈을 벌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웅웅 그래서?"
"그러다가 제가 지방근무 하니까 그쪽 지역 부동산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죠. 서울은 비싸서 더 살 수가 없으니까요"
"그건 그렇지"
"예, 그러다가 지방이 워낙 넓다 보니 공부해야 하는 양이 너무 많더라고요. 그렇게 정보를 찾다가, 지방 부동산에 대해서 전문적으로 알려주는 카페를 찾게 되었고 보니까 내용이 괜찮더라고요"
"오호, 그런 게 있어? 그런 정보를 무료로 보는 거야?"
"에이~ 형님 세상에 무료가 어딨 어요. 일반적인 정보는 전체공개로 되어 있는데 핵심정보를 보려면 멤버십에 가입을 해야 되더라고요"
"멤버십??? 그게 뭐야?"
"아 형님 멤버십 모르세요? 월 얼마내면 멤버십 가입하고 거기서 핵심정보도 알려주고 조 짜서 같이 임장도 가고 스터디도 하고 그래요"
"엥??? 그런 걸 돈 주고 하냐?"
"형님, 레버리지 모르세요?"
"레버리지? 부채 뭐 이런 거 아니냐?
"제가 지방 부동산 다 공부하려면 너무 많은 시간이 걸리잖아요. 대신 돈을 좀 내더라도 전문가한테 그런 정보를 빨리 얻으면 그만큼 제 시간을 아낄 수가 있게 되잖아요. 그러면 제가 돈을 좀 쓰긴 했지만 시간을 벌었으니까 서로 윈윈하는거죠"
양무침 하나를 질겅질겅 씹으면서 재민이의 이야기를 듣고 있다. 재민이 이야기가 이론상으로는 맞는 것 같다. 내가 모르는 것을 돈을 주고 배우고 상대적으로 시간을 절약해서 일찍 투자를 할 수 있다는 이야기.
하지만, 그렇게 돈을 주고 배워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있으면 전문가는 왜 '황금알을 낳는 거위'를 사람들에게 파는 것일까?
도대체 얼마를 주고 배우는 것인지 궁금했다.
"그럼 그 멤버십이라는 게 얼마야?"
"제가 한건 좀 비쌌어요. 한 달에 30만 원 정도 했어요"
"30만 원? 헐 미쳤어?"
"아후 형님 제가 한 게 좀 비싸서 그렇지 요즘 멤버십 이런 거 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요."
"정말???"
"예, 형님도 블로그 하시잖아요. 잘 보시면 멤버십 이런 거 엄청 많아요"
"그런 게 다 돈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려주는 멤버십이야?"
"대부분 그렇죠."
"돈 벌 수 있는 방법을 알면 도대체 그걸 왜 알려줘? 멤버십 자체가 그 사람이 돈 버는 방법 아니야?"
"아후~형님. 그 사람들은 그런 거 안 해도 벌써 다 부자예요"
"그러면 부잔데 왜 돈 받고 알려주는 거야?"
"그래도 공짜로 알려줄 순 없죠..."
재민이가 하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부자가 부자 되는 방법을 돈 받고 알려준다? '진짜' 부자들이 그렇게 살까? 갑자기 어질어질하다.
"재민아 담배 하나 피고 오자"
"형님 담배 피우세요?"
"아니~그냥 술 한잔 했으니까 담배 생각나네"
"아가들도 어린데 담배 피우면 어떻게 해요 형님."
"아후~나 혼자 갔다 온다~"
"그래도 같이 가요 형님"
식당 앞 편의점에 들러서 담배 하나와 라이터 하나를 사서 밖으로 나왔다.
바람이 춥다. 외투를 안 입고 나와서 몸이 다 떨린다. 담배와 라이터를 환불하고 다시 식당으로 들어가 따뜻한 양곰탕에 소주를 한잔하고 싶어 진다. 불쌍한 재민이는 괜히 나를 따라와서 같이 옆에서 덜덜 떨고 있다.
"갑자기 왜 이렇게 춥냐"
"그르게요 형님 춥네요"
"얼른 피고 들어가자."
"형님 담배 아직도 피우세요?"
"아녀, 너 만나서 피는겨"
"담배 끊으세요 형님. 하나도 안 좋은걸 왜 하세요?"
"너나 멤버십 끊어라. 하나도 안 좋을걸 왜 하냐?"
"아 형님 아니라니까요, 들어가서 이야기해드릴게요"
"재민아, 아무리 생각해도 돈 내고 돈 버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건 말이 안 된다."
"형님 저희가 책 돈 주고 사서 보는 거랑 똑같은 거예요"
"책 사서 보는 거랑 멤버십 가입하는 거랑 똑같다고?"
"옙 저희가 책 보는 게 잘 모르는 것을 배우려고 보는 거잖아요. 그거랑 마찬가지예요"
"독서하는 거랑 멤버십이랑 같다?"
"옙 전 그렇게 생각해요"
담배 연기가 겨울바람에 휘날려 추위에 덜덜 떨면서 흩날린다. 담배 빨간 불빛에 매달리고 싶은 연기. 하지만 그 불빛은 연기가 붙어있지 못하도록 담배를 붉게 태운다.
'독서'와 '멤버십'. 책을 읽으면서 스스로 성찰하고 터득해야 하는 독서와 남이 알려주는 멤버십이 같다고 할 수 있을까?
멤버십을 학원에서 하는 일타 강사의 강의라고 생각하면 되는 것일까?
나는 어쩌면 아직도 '교과서만 보고 공부했는데 1등 했어요'라는 환상에 젖어있는 것일까?
재민이도 평소에 책을 좋아해서 서로 책을 선물하곤 했는데 그런 재민이 입에서 '독서'와 '멤버십'이 결국 같다는 이야기에 충격이 왔다.한 대 더 피고 싶지만 춥기도 하고 재민이도 떨고 있으니 들어가야겠다.
"들어가자"
자리에 도착해서 이모님께 추가 주문을 한다.
"이모님, 여기 양곰탕'하나주세요"
뜨거운 국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 멤버십 가입하고 지방 부동산을 투자한 거야?"
"저도 공부하고 같은 조끼리 임장도 다니고 하면서 투자한 거죠"
"결과는?"
"좋았다 말았죠..."
"좋았다 말았다니?"
"서울이 먼저 오르고 나중에 지방이 오르기 때문에 제가 서울을 비싸게 팔고 그 돈으로 빠르게 지방 이곳저곳을 샀거든요"
"아~처음엔 올랐구나?"
"예, 전세 끼고 Gap으로 투자한 건데 처음에는 괜찮았어요"
"아니 근데 도대체 아파트를 몇 채나 산 거야? 3개? 4개?"
"아뇨"
"머 그럼 5개?? 6개??"
"아뇨, 12개 정도 투자한 것 같아요"
"뭐라고 12개???"
내 식도로 넘어가던 양무침이 다시 거꾸로 기어 올라와서 나와 같이 물어보다.
'뭐라고 12개라고요???'
재민이가 먹던 양무침도 다시 거꾸로 올라와서 대답한다.
'웅 12개'
별이 다섯 개도 아니고 아파트가 12개라니,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양무침을 다시 씹기 시작했다.
질겅질겅 호로록 휘리릭.
기껏해야 나는 등기 2번 쳐봤는데 12개를 쳤다니... 대단한 동생이다. 정신을 차리고 물어봤다.
"어디 어디를 산 거야?"
"부산도 사고, 광주도 사고, 천안도 사고, 청주도 사고, 대구도 사고, 대전도 산 것 같아요."
"지방 투어했냐?"
"공부하다 보니까 괜찮은 곳이 많더라고요."
"하나 사는데 투자금이 얼마나 든 거야?"
"별로 안 들었어요 많아야 5천만 원?"
"어떻게 그렇게 산 거야? 전세가가 높았나?"
"예 전세가가 높았었죠... 그래서 소액으로 투자가 가능했던 것이고요"
"그래서 처음엔 올랐고?"
"그렇죠, 그래서 처음에는 많이 올랐어요"
"양곰탕 나왔습니다."
모락모락 양곰탕 국물이 프리마를 탄 듯 뿌옇다. 설마 진짜 프리마를 탄 건 아니겠지?
"양곰탐에 소주 한잔 하자. 받아라"
"예. 형님"
따듯한 양곰탕을 먹으니 북해도 히노끼탕에 몸을 담그고 있는 기분이다.
재민이의 그다음은 이야기를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주인공이 억만장자가 되어서 행복한 삶을 시작하려고 하자마자 알고 보니 꿈이었거나 갑자기 죽는다거나 또는 소중한 사람을 잃는다거나 하는 그런 이야기.
소주를 원샷하고 그래도 대화를 이어갔다.
"그래서 어떻게 된 건데?"
"그러다 미국에서 갑자기 금리를 확확 올리기 시작하면서 전세가가 떨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역전세를 맞은 거네?"
"예, 전세가가 5천만 원씩 떨어지니까 죽겠는 거죠"
"오천만 원이 갑자기 어디서나냐"
"다 그만큼 떨어진 건 아니지만 그러면서 더 가지고 있는 것도 급매로 팔고 했죠"
"그럼 원래 12 채보다 더 있던 거야?"
"몇 개 더 있었어요..."
"우짤라고 그렇게 무리를 했냐..."
"그때는 그게 무리가 아니었어요. 아마 형님이라도 그렇게 했을 걸요."
"야, 나는 서울 아니면 투자 안 해..."
"그건 형님이 서울만 잘 알고 지방을 공부 안 하셔서 그러는 거예요. 아는 만큼 보이는 거라니까요"
"야 아는 만큼 보이는 놈이 역전세를 그렇게 맞아?"
"형님, 전 아직 그래도 포기 안 했습니다. 지금 꺼 잘 지키면서 방어하면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예요"
"으휴~ 고집불통아. 술이나 한잔 마셔라"
"옙 형님..."
나도 정답은 모른다. 서울이고 지방이고 어디가 맞고 어디가 틀린 지.
하지만 투자는 심플해야 한다. 서울이 비싼 건 비싼 이유가 있는 것이고 지방이 싼 건 싼 이유가 있는 것이다. 가격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앞으로 인구가 감소해도 서울 가구수는 늘어날 것이고 지방도 서울과 유사한 수준의 인프라를 갖추고 학군이 좋은 몇몇 도시만 살아남을 것이다.
이 말을 하고 싶지만 재민이에게 하지 않았다.
지금은 내 말을 들을 상태가 아니다.
"형님, 양곰탕 하나 더 추가할까요? 구수하니 맛있네요"
"시켜. 일 년에 한 번 보는데 그것도 못 사주리"
"옙 형님, 이모님 여기 양곰탕 하나 더 주세요."
"시키는 김에 밑반찬도 좀 더 달라해라."
"옙 여기 밑반찬도 리필 좀 해주시고요."
"일단 한잔 또 받아라."
"옙 형님."
졸졸졸졸. 고집불통 황소고집에게 들어갈 소주야 안녕.
"그래서 지금은 어떤 상태인 거야?"
"회사 대출이랑 신용 대출 다 당기고 살던 월세집도 평수 더 줄여서 일단 급한 건 다 막았어요."
"평수를 줄였다고?"
"옙 급한 대로 18평으로 이사를 갔어요..."
"재민아... 와이프랑 애들이랑 뭔 고생이냐..."
"형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니 서운하네요..."
"요놈아, 너 혼자일 때 그렇게 해야지 가족들도 있는데 그렇게 해서 뭐 해. 가족들이 원한 것도 아니잖아"
"휴... 나중에 알아줄 거예요"
"에휴... 됐다. 그래 결국 잘 될 거다. 네가 그래도 그렇게 열심히 한 건데 잘되지 않겠냐?"
"안 그래도 요즘 와이프랑 사이가 안 좋았어요"
"좋겠냐? 이혼도장 안 찍은 게 다행이지."
"그 정도로 심각한 상황은 아니에요..."
"너 시그니엘에서 살고 싶다며, 그게 다 가족이랑 행복하려고 그러는 거 아녀?"
"맞죠."
"그런데 과정이 불행하면 결과가 행복하겠어?"
"휴, 형님 저도 다 압니다... 한잔 하시죠 형님"
"그래 한잔 하자"
소주가 달지 않고 쓰다. 그래도 날 따르는 동생 몇 명 없는데 동생의 안 좋은 이야기만 듣고 있으니 마음이 좋지 않다.
"재민아, 부자가 되는 것도 좋고 형도 그러려고 살고 있어. 근데 빠르게 부자 되는 방법은 없는 거야... 그런 게 있으면 그거 다 사기야."
"저도 알죠..."
"넌 뭐 다 안다고 하면서 아는 것처럼 행동을 안 하냐? 부자가 되는 방법은 누가 알려주지도 않고, 스스로 알아서 터득해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부자가 별로 없는 거 아니겠냐?"
"옙 형님 말씀이 맞아요."
"너 오늘 잘 만났어. 너무 무리하지 말고, 신용대출은 비상수단으로 가져갈 수 있는 비상금으로 생각하고 1~2개 팔아서 신용대출은 갚아."
"형님, 그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래, 알아서 잘해. 이제 너 혼자가 아니잖아. 재수 씨도 있고 아들도 있고 딸도 있는데 현재도 잘 지켜야지 안 그래?"
"옙 형님..."
"양곰탕 나오면 그거 먹고 소주 딱 한 병만 더 하고 들어가자."
"옙 형님..."
10만 원이 좀 안되게 나왔다. 체크카드로 결제하고 밖으로 나오니 바람이 아까보다 더 차갑게 분다.
역전세 바람인지 아프기까지 한다.
"재민아 담배 하나만 더 피고 가자"
"형님, 형님도 담배 끊으세요."
"알았어, 이거 하나 피고 버리고 갈 거야"
역전세 바람에 담배에 불이 잘 붙지 않는다.
튕튕튕 어렵게 불을 붙이고 길게 한 모금 마신다.
술이 쓰듯 담배도 쓰다.
구름 낀 밤하늘이 담배 연기처럼 뿌옇고 흐릿하다.담배를 다 피고 보니 아이스크림 케이크 가게가 보인다.
"재민아 잠깐 기다려봐라."
"옙 형님"
아이스크림 케이크 가게로 들어가 아이스크림 케이크 가격표를 보니, '45,000원'
더럽게 비싸다. 캐릭터가 있는 '39,000원'짜리 아이스크림 케이크가 하나 보여서 포장해달라고 한다.
"재민아 들어가서 재수 씨랑 아가들이랑 같이 먹어라."
"아 형님, 무슨 아이스크림이에요."
"야 됐어, 가서 먹어"
"아휴 형님 양무침 얻어먹은 것도 감사한데, 무슨 아이스크림까지..."
"재민아, 지금도 행복하게 살고 나중에 시그니엘에 가서도 행복하게 살자."
"형님 고마워요..."
"너무 욕심부리지 말고, 우리 천천히 꾸준하게 가자."
"예 형님 알겠습니다..."
"엉 난 돈 너무 많이 써서 걸어갈 테니까 너 지하철 타고 가라"
"예? 걸어가신다고요?"
"야 그걸 믿냐, 버스 타고 갈게 너 저리로 가서 지하철 타고 가"
"예 형님, 고마워요... 잘해볼게요."
"웅 그래 업데이트해주고"
"알았어요 형님,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요"
"그래 너도 새해 복 많이 받아라."
돈 좀 썼지만 깔끔하고 멋진 선배의 마무리 었다.
한 달 용돈 10만 원인데 오늘 하루에 다 썼으니 이제 한 달간 외출금지다.
버스정류장까지 걸어가면서 담배를 꺼내 누군가 가져가기 좋은 화단에 올려놓는다. 라이터도 같이 가지런히 놓는다.
경복궁역까지 걸어가고 있다. 저 멀리 이순신 장군님도 보이고 세종대왕님도 보인다. 그리고 광화문, 경복궁도 보인다.
봉긋 솟아오른 이 광화문 빌딩들 사이에 광화문 광장이 있고 세종문화회관이 있고 고궁 경복궁도 있다.
서울은 참 좋은 곳이다.
서울 지분을 팔아서 지방 지분을 산다? 나에게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금도 나는 서울에 작은 지분이라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 가슴에 뜨거운 핫팩을 하나를 달고 사는 기분이다.
스톤아일랜드 패딩을 안 입어도 손목에 롤렉스 시계가 없어도 내가 가지고 있는 작은 서울 지분이 나를 더 따듯하게 만들어준다.
'서울'을 팔고 '지방'을 산다는 '소'를 팔고 '강아지'를 사는 것과 같다.
일자리, 학군, 교통, 병원, 문화시설 등 대한민국의 모든 인프라가 집중되어 있는 '서울'
작은 대한민국 땅 덩어리에서 여러 개의 서울을 만들기란 어렵다.
재민이는 결국 어떻게 할까?
아마, 오늘 내가 재민이를 위해 한 것 중에서 재민이에게 영향력을 줄 수 있는 것은 '양무침'과 '아이스크림케이크'가 유일할 것 같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 본인이 옳다고 믿는 것을 바꾸기 위해서는 엄청난 충격이나 대단한 사람의 영향력이 필요하다. 내가 그만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아닐 것 같다.
역시 주변에 어떤 사람들과 함께 있는지가 중요하다.
'서울'에서 근무하면서 '서울'과 익숙한 사람과 '지방'에서 근무하면서 '지방'에 익숙한 사람들의 생각이 같을 수가 없다. 당연히 부동산을 보는 시각도 다를 수밖에 없다.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면서 서울 부동산 이야기를 하는 서울 사람들과 지방 부동산 멤버십을 가입해서 지방 부동산만 보고 다니는 재민이와 그 조 사람들. 서로 보는 것이 너무도 다르다.
인구는 고령화가 되고 있지만, 서울은 아직도 뜨거운 청년 같다.
변화를 좋아하고 개선하고자 노력하고 끊임없이 좋은 것을 찾고 있다.
나는 서울의 지분을 하나라도 뺏길 생각이 없고 어떻게든 더 모으려고 할 것이다.
차디찬 밤바람이 내 볼을 날카롭게 스치고 지나가지만 이순신 장군님, 세종대왕님께서 지나가는 나를 응원해 주시는 것 같다. 덕분에 정신은 다시 맑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