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대기업을 퇴직한 임원의 하루

회사는 '나'를 평생 책임져주지 않는다.

by 라구나


사케와 방어의 조합이 내 혀를 즐겁게 만들었다.

내 두툼한 혀가 신나서 마치 사케로 부은 욕조에서 물고기 방어 장난감을 가지고 노는 듯하다.

싱싱한 방어가 이와 혀로 살살 분해되면서 그 사이를 사케가 썰물처럼 밀고 들어왔다.

'정말 맛있네' 혼자 음미하며 즐기느라 '연 상무님'을 만나러 온 것인지 '오마카세 맛집'에 온 것인지 순간 헛갈렸다.

"자, 한잔 더 받아라"

연 상무님에 부름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아 오늘 맛집 온 거 아니었지'

"옙 상무님"

"맛있냐?"

"평소에 이렇게 고급진 음식들을 먹어볼 기회가 없었는데 상무님 덕분에 호강합니다. 감사합니다"

"또또또 이상한 소리 한다."

"진심입니다 상무님, 사랑합니다"

"대낮에 남자한테 사랑 고백을 받네. 허허허, 한잔 더 하자"

"옙 상무님"

상무님과 토요일 대낮부터 맛있는 음식과 술을 한잔하니 기분은 좋았는데, 그런 자리가 아니라서 남을 자제하려 애썼다.

"이직한 회사는 어떻고?"

"똑같습니다. 하던 일 하고 어느 순간 적응해서 평범한 직장인이네요"

"그래, 그래도 난 네가 이직한다고 했을 때 깜짝 놀랐다"

"엇 왜 그러십니까?"

"아니, 능력도 없는데 어떻게 더 좋은 회사를 갔는지 신기해서 그러지"

"상무님 밑에서 배운 덕분에 이직할 수 있었습니다"

"입에 침이라도 바르고 말해라 이놈아"

"상무님 한잔 드리겠습니다"

"그래, 어디 대기업 다니는 과장님 술 한번 받아보자"

졸졸졸졸. 술 떨어지는 소리가 오대산 계곡물소리같이 맑고 청아하다.

"너도 한잔 받아라."

"옙 상무님. 영광입니다"

"그래 한잔 하자"

"옙 상무님"


상무님과 그렇게 한잔 한잔 주고받으면서 상무님이 가져온 사케는 어느새 바닥을 보였다.

더 이상 우리에게 줄 것 없는 고급 사케병.

그것은 마치 젊음을 바쳐 일한 회사에서 버려진 상무님 모습 같았다.

'상무님과 고급 사케병'

"사케 다 먹었네. 네가 다 마셨다. 요놈아"

"상무님이랑 술 마시니 술술 넘어가서 술 먹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럼 술이 아니고 몬데?"

"음... 오대산 계곡물 같습니다"

"오대산 계곡물? 갑자기 뚱딴지같은 소리냐, 너 오대산 가봤어?"

"아니 못 가봤습니다"

"가보지도 않고서 오대산 계곡물 같다고 하냐?"

"상무님 모시고 한번 가겠습니다"

"하하하, 말만 잘한다. 여전하구나"

"상무님, 자꾸 실없는 소리만 해서 죄송합니다. 기분이 어떠실지 몰라서 그랬습니다"

"기분? 그래 내 기분. 별로 안 좋았지. 이제 조금 정리가 됐다"

"상무님 정말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고생은 무슨..."

"시황이 안 좋았던 게 너무 아쉽습니다."

"그렇지. 시황이 갑자기 그렇게나 꺾일 줄 알았나. 중국이 저렇게 문을 잠그니 갑자기 물건을 어디에 팔겠냐"

"예. 그렇죠"

"너도 잘 알잖아. 그래도 회사에서는 누군가 책임질 사람이 필요하다는 걸"

"예옙..."

"임원이 책임져야지..."

"상무님..."

"강 전무님 알지?"

"옙 강 전무님도 집에 가셨다고 들었습니다."

"강 전무님 아이들이 아직 초등학생인 것 아나?"

"초등학생이요?"

"결혼을 40 넘어서 늦게 하셨잖아. 첫째가 내년에 중학교 들어가고 둘째는 아직 초등학생이다."

"그래도 전무까지 하셨으면 돈 좀 모아 두셨겠지요?"

"내가 강 전무님이랑 친했잖아, 강 전무님은 집도 없어"

"집이 없다고요?"

"그래. 집도 안 사셨어"

"임원 하면서 돈 좀 버셨을 텐데, 그 돈운 다 어디 갔습니까?"

"강남 주상복합 대형평형에서 전세 사시면서 남 좋은 일만 하신 거지"

"몇 평인데요?"

"70평이던가"

"아니, 그 돈이면 집 한 채 사실텐데 왜 전세를 사셨답니까?"

"그러게 말이다. 저번에 운동하면서 '부사장이라도 되면 기념으로 집 살까?' 이야기하시더라고"

"헐, 진짜요?"

"모르지, 진짜인지 가짜인지. 그게 중요하겠냐."

"그렇긴 하죠. 술 한병 시킬까요?"

"그래 너 좋아하는 화요 시켜라."

"아 괜찮습니다 상무님, 소주 드시죠"

"됐다. 화요 시켜라 맛있는 술 먹자"

"아아 옙. 여기 화요 한 병 주세요"

"뭘로 드릴까?"

"검은색으로 주세요"

"알았어요~"

연 상무님이 웃으면 말씀하신다.

"비싼 건 기가 막히게 잘 시키는구나. 잘했다."



상무님께 말을 이어갔다.

"그럼 강 전무님은 이제 머 한 시데요?"

"강 전무님? 아침에 아이들 등교시키고 집에서 설거지하신다네"

"아... 그래요? 다른 일 안 하시고요?"

"임원들은 퇴직하고 몇 년 동안 고문료가 나와서 그거 받으려면 다른 일 못해"

"예옙... 제가 퇴직한 임원 걱정할 필요는 없겠죠"

"그래, 알아서 하시겠지. 그래도 너는 집이 있잖아. 얼마나 다행이냐. 내 살 집은 있어야 해"

"맞습니다. 상무님

"너, 윤 전무님 이야기 들었나?"

"작년에 퇴사하신 윤 전무님이요?"

아주머니가 화요 블랙을 상에 살포시 놓으신다

"그래, 윤 전무님 퇴직금 다 날렸다"

"직금을 날렸다고요?"

"그래, 나오셔서 바로 크게 사업을 하셨는데, 쫄딱 망해버렸다."

"그렇게 똑똑하신 분이 어쩌다 그러셨을까요?"

"회사에서만 똑똑하셨던 것이지. 회사생활만 오래 한 직장인도 군에 오래 있던 간부들이랑 똑같다. 똑같아. 전역하기 전에 사회화 교육을 해주잖아. 직장인들도 그런 게 필요해"

"거기도 아이들이 어리지 않나요?"

"거긴 그래도 고등학생 중학생이야."

"아... 진짜 씁쓸하네요 상무님"

"우선 화요 왔으니까 한잔 하자"

"옙 상무님"

몽돌해변 둥그런 검은 돌이 새벽녘 차가운 바다에 화들짝 놀라 잠이 깬 듯 시원한 소주였다.

"윤 전무님도 욕심을 너무 부리셨지. 사회가 대기업에서 임원 할 때랑 같지 않지. 계급장 떼고 보면 그냥 동네 아저씨랑 똑같은 거야. 안 그러냐?"

"상무님..."

"윤 전무님은 경기도 외곽으로 이사 가셨다더라."

"과천에 집 있지 않으셨어요?"

"웅. 그거 담보로 대출받아서 사업했다가 망했으니 다 날린 거 아니겠냐"

"윤 전무님은 상상이 안됩니다. 어쩌다 그러셨을까요?

"다들 착각하는 거야. 회사에서 성공한 방법대로 하면 사회에서도 그저 먹힐 줄 알았던 거지"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회사에서 이룬 성과가 본인이 이룬 거냐? 조직이 시스템이 이룬 거지 대기업에서 개인이 이룬 게 어딨어.

그런데 착각을 하는 거야. 본인 능력이라고. 그래서 사회에 나가서도 무거운 계급장을 놓지를 못해."

"윤 전무님 서울대 나오지 않으셨나요?"

"아무 의미 없는 거지..."

"다른 임원 분들도 마찬가지일까요?

"오래 하신 분들은 괜찮을 거야. 벌어둔 게 있으니까 잘 사시겠지. 근데 요즘은 일찍 임원 되고 일찍 집에 가는 게 트렌드 같아. 나처럼 2년 하고 나올 거면 만년 부장이 더 좋지...

"상무님 그래도 별을 달 나온 게 재취업도 잘 되지 않겠습니까..."

"그것도 다 옛날이야기다. 대기업 임원으로 나오면 중소기업 이사로 모셔가는 것도 다 옛날이야기야."

"상무님, 한 잔 받으세요"

"그래, 방어 다 먹어가는데 다른 거 뭐 시킬까? 네 먹고 싶은 거 시켜라"

"아, 예예. 여기 메뉴판 좀 주세요"

메뉴판을 둘러보니 딱히 특별한 것은 없다.

"상무님, 꼬막이랑 지리 좀 시킬까요?"

"꼬막 좋아하나?"

"예옙 좋아합니다."

"그럼 꼬막이랑 가리비도 좀 시키고, 지리 달라고 해라"

"옙 알겠습니다"

"여기요~"

"예 뭐 드릴 까요?"

"꼬막 작은 거랑 가리비 중자 하나 주시고요. 회 시키면 지리 나오죠?"

"예 나와요"

"예 그럼 지리 같이 주세요"


점심식사 손님이 빠진 횟집에는 강아지 털뭉치가 빠진 것처럼 손님이 듬성듬성 있었다.

남은 방어는 겨우 두 조각이다. 처음에 몇 조각이 있었는지도 모르지만 이제 남은 건 2조각이다.

수많은 신입사원이 입사하고 끝까지 남는 사람은 몇 명이다.

누구는 임원으로 누구는 평사원으로.

어떤 계급이었는지 중요하지 않다.

장군이나, 장교나, 부사관이나 길은 다르더라도 끝까지 완주했다는 것은 참으로 대단한 일이다.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족을 위해, 회사를 위해, 또 본인을 위해 달려온 사람들.

마라톤 경주에서 더 달릴 수 있는데 검은 양복을 입은 사람들이 갑자기 내 길을 막고 내 경주를 중단시킨다.

42.195km 목표를 향해 달리다가 36km에서 달리기를 멈춰야 한다.

36km를 달린 것도 대단하지만 6km를 더 달리고 싶은데 강제 하차를 해야 하는 것이 직장인들에게는 뛰는 것보다 더 고통스럽다.


"상무님, 한잔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이렇게 와줘서"

"아닙니다 상무님, 끝까지 모시겠습니다"

"뭘 끝까지 모셔, 허허허 허. 너랑 계속 같이 일 못한 것 아쉽다."

"죄송합니다. 제가 끝까지 옆에서 상무님의 말이 되었어야 했는데요..."

"무슨 말이냐, 같이 재미있게 하는 거지"

"그렇게 생각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너도 알잖아. 나도 참 열심히 살았다."

"알죠. 상무님."

"대한민국 직장에서 'SKY'가 아니면 참 많은 증명을 요구한다"

"증명이요?"

"업무적으로 그들처럼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과 그만큼 더 노력하는 사람이라는 증명"

"그러니까, 'SKY'보다 더 열심히 오래 일해야 한다는 말씀이시지요?"

"맞다. 그런데 요즘 애들 보면 참 희한해"

"어떤 게 말씀이십니까?"

"지가 학벌도 딸리고 그러면 더 노력을 해야 하는데, 노력을 안 해"

"상무님, 요즘 젊은 친구들은 '1인분' 하는 것이 대세입니다."

"그렇게 말하고 1인분 하는 놈들 봤냐?"

"그렇긴 하죠..."

"시작부터 뒤 떨어진 놈들이 더 노력은 안 하고 워라밸만 찾는 게 요즘 애들이야."

"요즘은, 상무님 때랑 저희 때랑도 좀 다르더라고요..."

"일도 못 하면서 애들이 자존심은 또 왜 이렇게 센지"

그때 아주머니가 꼬막이랑 가리비를 가지고 오신다.

"꼬막이랑 가리비 나왔습니다, 지리 지금 갔다 줄까요?"

"아 이거 좀 먹고 다시 말씀드릴게요"

"옙 그러세요~"

꼬막이랑 가리비가 살이 올라서 통통하게 맛있게 생겼다.

침이 꿀꺽 넘어간다.

"자 먹어라, 맛있어 보이네"

"옙 상무님 한 잔 하시죠"

"그러자"

모락모락 김이 나는 가리비가 토실토실 달다. 서둘러 소주를 입에 넣으니 뒷맛이 깔끔하고 좋다.


"맛있나?"

"옙 상무님이랑 같이 먹으니 정말 맛있습니다"

"허허허, 많이 먹어라"

"옙 상무님, 상무님은 그럼 요즘엔 어떻게 지내세요?"

"나? 아침마다 출근해"

"출근하신다고요?"

"웅. 딸이 아직 나 회사 안 가는 거 몰라"

"헉, 왜요?"

"년에 수능 보는데, 기운 빠질까 봐. 와이프랑 이야기해서 수능 끝나고 이야기할까 해"

"그럼 아침마다 어디 가세요?"

"어디 고정해서 가는 곳은 없고 그냥 여기저기 돌아다녀. 얼마 전엔 두물머리도 다녀왔다. 놀고 있어"

"옙 상무님..."

"매일 같이 회사 가던 게 얼마 전인데 이렇게 놀고 있다. 회사 갈 때는 실적 스트레스도 있고 했지만 그래도 회사 다니던 게 더 좋았던 것 같아."

"상무님, 오래 고생하셨으니까 그래도 재충전 시간 가지시는 것도 좋은 것 같아요."

"경력으로 입사하고 자리 잡아보려고 발버둥 치고 주말에는 팀장, 임원 모시고 골프 치러 다니고 술 마시고, 열심히 살긴 했다"

"상무님은 술자리도 정말 많으셨잖아요"

"어떻게 하냐, 여기저기서 날 찾는데, 팀장 때는 거의 매일 마셨던 것 같다"

"옙, 저도 많이 따라다녔잖아요"

"그랬지, 근데 당연하겠지만, 회사 나오니까 연락하는 사람 아무도 연락 없다."

"연락하기가 어려워서 그랬겠죠... 상무님 한 잔 드리겠습니다"

"그래, 고맙다"


꼬막을 까서 간장을 찍지 않고 그대로 한입 먹었다. 짭조름한 바다향이 느껴진다.

적당히 취기가 오르기 시작한다.

"상무님, 이제 특별한 계획 같은 거 있으십니까?"

"나도 생각 중인데, 잘 모르겠다. 딸 수능 보면 고향으로 내려갈까 싶기도 하고"

"고향으로요?"

"웅 고향에서 농사나 짓고 살까 싶기도 하고"

"상무님이요?"

"웅 왜 안 어울리나?"

"아 옙, 그렇기도 하고 농사가 힘드니까요."

"세상에 안 힘든 일이 있나. 서울에서 뻘 짓하다가 윤 전무님처럼 될까 봐 무섭기도 하고"

"에이 상무님 설마요."

"생각 중이다. 어디 재취업이라도 되면 좋겠는데... 어디에 취업하는지를 떠나서 아무 '명함'이 없다는 게 좀 그렇다."

"명함이요?"

"대기업 상무, 어디 회사 이사, 뭐 이런 명함이 있어야 나를 설명하기가 쉽잖아."

"아, 옙... 그렇긴 하죠."

"나도 아직 50도 안 되었는데, 어디에 걸치고 있는 게 없는 거지"

"상무님 스펙이면 충분히 기회가 올 것입니다"

"기회가 오면 좋겠는데 모르겠다. 딸 한 테도, 아빠가 무직인 거랑 그래도 어디 회사라도 다니는 거랑은 천지차이 아니겠냐. 요즘 딸한테 제일 미안하다"

"상무님..."

"와이프랑 미국 가서 딸 낳고 공부하느라고 아기일 때 잘 놀아주지도 못하고, 경력으로 입사하고 적응한다고 잘 못 놀아주고, 팀장이면 팀장이라고 못 놀아주고 회사 일에 집중하느라 딸이랑 못 놀아 준 게 가장 아쉬워."

"상무님, 따님도 크면 다 이해해 주실 거예요"

"딸은 나한테 별로 말도 안 한다"

"상무님..."

"하나뿐인 딸인데,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왜 그렇게 아등바등 살았을까 싶다"

"상무님, 아직 남자인생이 끝난 건 아니지 않습니까"

"그래 맞다. 화요 먹어서 취했나 보다. 허허허, 지리 달라고 하자"

"옙 상무님, 여기 지리 좀 주세요~"

"XX야, 너는 너의 길을 가"

"저의 길이요?"

"웅 너의 길을 찾아서 가."

"저도 저의 길을 잘 모르겠습니다."

"넌 나보다 잘 갈 것 같다."

"상무님 반의 반이라도 따라가면 좋겠습니다."

"아니야, 진심으로 하는 말이야. 잘 살고 있잖아"

"상무님, 사실 저도 요즘 참 고민이 많습니다. 매일 똑같이 이렇게 직장 생활한다고 인생이 달라질 것 같지도 않고요. 정해진 길을 가고 있는 느낌입니다."

"그러니까 너는 너의 길을 가야지, 남들이 가지 않은 길"

"그 길이 무엇일까요?"

"대기업 임원이 되는 길은 아니지 않겠냐, 나봐라, 임원 되기도 어렵지만 유지하기는 더 어렵다. 점점 일찍 임원 되고 일찍 가는 사람이 늘어날 거야."

"그럼 저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그것 네가 찾아봐야 하지 않겠냐?"

"맞습니다. 상무님...


하얀 지리 국물이 내 몸과 마음을 따듯하게 데워준다.

"어떻게 술 한잔 더 할래?"

"전 좋습니다 상무님"

"그래 이번엔 일품진로 먹어보자"

"옙 상무님"

상무님과 일품진로 마시면서는 우리가 함께한 추억들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같이 등산 갔던 이야기, 회사 사람들에 인물평, 내 동기들에 대한 이야기

계산을 하고 나오면서 상무님과 나는 많이 취해있었다.

밖에 나오니 하얀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서울의 눈.

"어떻게 2차라도 갈까?"

"상무님 눈도 오는데 일찍 들어가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래, 아쉽다. 어떻게 들어가는데?"

"전 여기 3호선 타고 들어가면 될 것 같습니다. 상무님 택시 타고 가셔야죠"

"어 그래 난 저기 승강장에서 타고 가면 된다"

"아 옙 상무님 앞까지 모셔 드리겠습니다"

"그래, 와 서울에 눈 오랜만에 오는 것 같다."

"그렇네요. 상무님 만나니까 눈도 오고 참 좋습니다."

"허허허, 말만 잘한다"

"상무님"

"어 왜?"

"상무님, 힘내십시오"

"갑자기 왜 그러나, 나 힘이 넘친다 넘쳐. 엇 저기 택시 온다 저거 타면 되겠다"

아스팔트에 솜털처럼 얇게 덮인 눈 위로 택시 바퀴가 사정없이 들어온다.

"상무님, 오늘 잘 먹었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나도 즐거웠다. 종종 보자"

"옙 상무님. 응원합니다"

"그래 고맙다. 너도 너의 길을 가라 알겠지?"

"옙 상무님. 제 길을 찾아보겠습니다"

"그래 들어가라. 기사님 정자역 가주세요"

"상무님,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그래, 새해 복 많이 받자"

상무님의 택시가 떠난 자리 위로 다시 하얀 눈 하나가 떨어진다.

발길을 돌려 가락시장역으로 걷는다.

눈을 보는 게 오랜만이다.

'철원에도 눈이 오고 있을까?'

상무님의 말씀이 자꾸 생각난다.

'내 길을 가라'

상무님은 어떤 길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상무님은 상무님의 길을 가셨던 것일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임원' 아니다.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길도 아니고 말이다.

그렇다고 만년 부장으로 쭉 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것도 분명 쉽지 않은 길이다. 모든 걸 내려놓고 남의 눈치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가야 하는 길이다.

어떤 길도 쉬운 길은 아니다.

'임원'도 '부장'도 아니면 나의 길은 어떤 것일까?


가락시장 역 안으로 들어가면서 어깨에 뭍은 눈을 털어낸다. 일부 눈은 내 손에 붙어서 작은 물방이 됐다.

연말이라 사람들이 붐빈다. 다들 어디로 가는 것일까?

지하철 안에 자리가 없어서 입구에 서서 창 밖을 보며 서있었다.

핸드폰을 못 본 지 오래되어서 확인해 보니 장교 후배인 재민이에게 연락이 와있다.

"형님, 올해는 못 뵙고 해가 넘어가네요. 새해에 한번 보시죠"

"이직하고 바빠서 정신이 없었네. 설날 되기 전에 한번 보자, 새해 복 많이 받고"

재민이도 대기업을 다니는 장교 후배이다.

내가 전역하면서 내 자리를 이어받은 후배인데, 어떻게 인연이 되어서 매년 만나고 있었다.

부동산에 나처럼 관심이 많은 친구인데, 요즘 통 소식을 듣지 못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고 하니 투자가 잘 되고 있지 않을까 싶다.

어느새 동호대교를 건넌다. 동호대교 건너면서 항상 2가지 생각을 한다.

동호대교를 건너기 직전에 내리는 곳이 내 집이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한강이 참 예쁘는 것.

어둑한 밤 한강과 조명 그리고 하늘에서 별 조각이 내리는 것 같은 눈.

그 광경을 보는 지금, 이 차가 조금은 느리게 가주었으면 좋겠다.

반짝이는 서울. 그리고 내리는 하얀 눈.

올해도 고생 많았다.

내년에는 내 길을 찾는 노력을 더 해보자.

분명 내 길이 어딘가 있을 테니까...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