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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밥을 먹은 6명의 직장인
09화
삼성에서 매각 그리고 위로금
빨리 부자가 되는 방법은 없다.
by
라구나
Jan 26. 2024
철원에서 금요일에 전역을 하고
월
요일에 삼성그룹 대졸신입공채 연수
에
들어갔다.
빠박머리 육군 장교 촌놈이 갓 졸업한 대학생들과 어울리는 시간이었다
같은 조 사람들은 꽤나 나이스했다.
대학교 신입 OT에서 만났었던 '재수 없는 놈'은 없었다.
철원에서 보낸 시절 때문인지 아니면 내 본연의 기질 때문인지 역시나 처음에는 어울림에 있어서 어려움이 있었다.
하지만, 한 달 넘는 시간을 동고동락하다 보니 시나브로 조금씩 친해
졌
다.
모두가 삼성이라는 배지를 달고 서로가 서로에게 자부심을 느
끼
는 시기였다.
그렇게 '삼성맨'으로 살기 시작했다.
나를 설명하기에 군더더기 없는 표현이었다.
연수가 끝나고 지방에 있는 사업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모집공고에서부터 지방 근무를 하는 것을 알고 있었고 공돌이가 가야 할 곳은 지방밖에 없다는 것을 알고 있었
다
대기업 직장인이라는 게 참 좋았다.
신입사원이라 매일 교육만 받고 하는 일은 없는 것 같았는데, 21일이면 어김없이 월급이 들어왔다.
이걸 받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왔
던
것일까?
초중고등학교를 다니고
재수를 하고 대학을 다니고 또 군대를 다녀오고 취업하기까지 이 모든 과정의 노력과 성과가 월급의 숫자로 평가받았다.
누구는 많이 받고 누구는 적게 받고 누구는 받지 못하고.
다들 이래서 '대기업, 대기업' 하
는
것 같았다
회사 열심히 다니면서 월급을 아끼고 따박따박 모으면
잘
살 수 있을 것 같았다.
노동소득을 아끼고 아끼고 살면 '부자'가 될 줄 알았다.
평일에는 회사 기숙사에서 지내고 금요일
에
퇴근하면서 회사버스를 타고 서울로
올
라왔다.
평일 기숙사에 생활은 반복적이었다.
기숙사에서
아
침 먹고 출근하고 5, 6시쯤 퇴근해서 기숙사에서 저녁을 먹었다.
저녁을 먹고 기숙사에서 좀 쉬고 적당히 소화가 되면 기숙사 피트니스에서 운동을
했다.
씻고 방에 와서 자기 전에 책을 좀 보다가 잠
에
들었다.
퇴근 후 약속이 있으면 가끔은 회사 동기들, 동료들과 어울려 저녁과 함께 술을 마시며 놀았다.
인생을 통틀어 별 고민도 없고 걱정도 없는 시기였다.
우리가 하는 이야기는 '회사, 회사 사람, 회사 업무, 회사에서 생긴 일' 온통 회사 이야기뿐이었다.
회사가 인생의 전부였고 회사가 내 인생이었다.
회사에 충성
했
고 삼성에 충성했다.
그렇게 삼성에 취해 회사를 다니던 어느 날 아침부터 이상한
연
락이 왔다.
서울에서 근무하는 동기 '선 주임'
이
었다.
"소문 들었어요?"
"무슨 소문이요?"
"우리 회사 매각된데요..."
"매각이요? 무슨 매각이요?"
"우리 회사가 다른 회사로 팔린데요"
"우리 회사가 다른 회사로 팔린다고요?"
'청천벽력''어안이 벙벙하다'라는 말이 이럴 때 쓰는 것일까?
매각이라니? 꿈에서도, 꿈의 꿈에서도 상상해 본 적 없다.
우리나라 1등 삼성이 매각이라니
?
힘이 센 장수가 둥근 징채로 내 가슴을 사정없이 내려치고 그 진동이 내 몸에 서서히 퍼져나갔다.
매각이라니? 삼성이 갑자기 왜 매각을 하지?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부서 차장님에게 급하게 이야기를
전
했다.
"차장님, 우리 회사 매각된다고 하는데 들은 이야기 있으세요?"
"매각? 넌 아침부터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냐"
"서울 동기한테 연락이 왔는데 우리 회사가
매각된다고
하네요
"아침부터 무슨 소리야...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하지 말고 일이나 해"
"아... 옙"
역시 삼성이 그럴 리가 없지. 선 주임이 원래 웃긴 소리를 잘하는 동기다.
차장님도 모르는 거 보면 역시 선 주임이 어디서 이상한 소리를 듣고 온 것이 분명하다.
"강 차장님한테 물어보니까,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는데요,
형
님 또
뻥친 거죠?"
"
아
니에요. 서울은 지금
난리예요.
곧 발표할 것 같아요"
"예, 진짜요? 도대체 어디로
매각되는 거예요?"
"한화로 매각된다는 것 같아요."
"한화요? 한화케미컬 있는 한화요?"
"옙 저도 그렇게 들었어요"
강 차장 말마따라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일까?
갑자기 한화라니?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나랑 친한 김 과장님이 자리에 와서 매각 소식을 전해 드렸다.
"과장님, 저희 한화로 매각된다는데 이야기 들으셨어요?"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야? 매각이라니?"
다들 '꺼벙이'는 안 좋아하고 '뚱딴지'만 좋아한다.
선배 엔지니어들의 모습은 마치 대장간에서 뜨거운 불길이 들이닥쳐도 묵묵히 앉아
꿈쩍 않고
담금질을 하는
장
인의 모습이었다.
그런 선배들의 무관심과 달리 소문은 삽시간에 돌기 시작했다.
차장님, 과장님도
그제야
무거운 연장을 내려놓고 소문의 진실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회
사 게시판에 공지가
올
라왔다.
<화학/방산 계열사 매각>
CBS 노컷뉴스
소문은 사실이었다.
직원들은 모두 숨을 죽이고 게시판에 올라온 글을 정독했다.
직원들은 충격에 빠졌다. 그 어느 누구도 상상해 본 적 없는
일
이 벌어졌다.
사무실은 직원들의 충격에 놀래 바람소리 하나 내지 못하고 움츠러 지켜보고 있었다.
사무실 직원들은 모두 팀장 앞으로 모여들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인가요?"
"저도 몰랐어요. 저도 게시판 보고 알았어요"
"우리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 말에 어느 누구도 대답하지 못했다.
삼성맨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한평생 한 직장에 목숨 바쳐 일한 선배들이나 삼성뽕에 취해 삼성 신입사원 연수 사진을 카톡 프로필로 걸어둔 나 같은 사람이나
모
두 똑같았다.
하루아침에
그 자랑스러운 '삼성' 타이틀을
내려놓아야 했다.
회사의 주인은 직원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회사의 주인은 당연히 '주주'였다.
파란피로 물들고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 회사와 함께 먹고살고 가족을 꾸리고 가정을 이끌어온 사람들에게는 회사가 평생 내 옆에 있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회사가 갑자기 나를 보며 이야기한다.
"누구세요
직원들은 기본적인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마치 20년 전 사귄 옛 여자친구 이름
을
기억 못 하듯이.
회사의 주인은 직원이 아니다. 주주다.
회사를 내 회사처럼 생각하라는 말은 어떤 뚱딴지에서 나온 말이었을까?
삼성 배지를 움켜쥐고 있어도 지갑에 삼성 명함이 있어도 더 이상 '삼성맨'이 아니다.
회사는 매각되었다.
점심시간에 아버지께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회사에 뭔 일
생긴 거냐?,
뉴스에 나오던데..."
"예 그런 것 같아요, 저도 아침에 들었어요"
"뭐 어떻게
된 거냐...?"
"삼성에서 한화로 매각을 한다네요..."
"한화로...?"
"예 그런가 봐요. 저도 그렇게 들은 게 다예요"
"회사는 그대로 다닐 수 있는 거고...?"
"예. 그러겠죠... 고용승계 한다고 하니까요. 아직 저도 잘 모르겠어요."
"... 그래 알았다. 별일
없을 거다"
"예, 별일 없겠죠"
"그래
알았다... 걱정돼서
전화해 봤다."
"옙 알았어요"
"힘내라... 그만 끊는다."
아버지 목소리가 힘이 없다.
삼성에 취업했다고 했을 때 아버지는 내색은 안 하셨지만 많이 기뻐하셨다.
어머니는 나를 자랑스럽다고 하
셨
다.
그렇게 기뻐하고 자랑스러워하시던 이유는 대한민국 No.1 '삼성'에 취업했기 때문
이
었을 것이다.
자식으로서 처음 효도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삼성'이 오래가지 못했다.
부모님께 죄송했다.
나도 속상했지만 더 속상하고 걱정할 부모님 생각에
씁
쓸했다.
아들이 하루아침에 '삼성맨'에서 한화 직원이 되었다.
'한화맨'은 못 들어봤다.
다 식어버리고 탄 원두 맛이 나는 쓴 커피 같았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는 맛
매각은 그런 맛이었다.
회사는 계속 시끄러웠다.
동기들과 모여서도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것인지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다.
불확실한 미래 바구니를 향해 사람들마다 가지고 있는 상상의 콩주머니를 던졌다. 상상의 콩주머니를 허공에 던져도 바구니는 콩주머니를 비켜갔다.
전문직들은 서둘러 노조를 창립했다.
그리고 새로운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바로 '위로금'이었다.
위로금. 자본주의 세상의 황금열쇠이다.
삼성이라는 타이틀을 내려놓으면서 받는
위
로의 값.
직원들은 어느새 '매각'은 잊고 '위로금'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슬픔과 상실, 감정을 뒤로하고 책상에 마주 보고 앉아 이성적으로 계산기를 두드리며 조금이라도 더 챙기기 위한 이혼협상에 들어간 모습이었다.
누구는 2억, 누구는 1억을 받아야 한다고 소리쳤지만,
결국 연봉 수준의 위로금이 책정되었다.
'매각'을 원하지 않는 사람들, '삼성맨'이고 싶은 사람들, 위로가 필요하지 않은 사람들 할 것 없이 위로금은 직원들 계좌로 슬라이딩하며 들어갔다.
그걸로 '삼성'과의 인연은 끝이었다.
드라마에 어딘가 부족해서 마음에 들지 않는 아들의 여자친구에게 '이 돈 받고 우리 아들 그만 만나줬으면 좋겠어'라고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치렁치렁 큰 장신구에 스카프를 맨 사모님 같았다.
보통 드라마에서는 '저는 그래도 삼성씨를 사랑합니다'라는 대사라도 치는데, 우리에겐 그런 기회조차 없었다.
우리는 그 봉투를 움켜잡고 집을 나왔다.
언론과 인터넷상에서는 '위로금이라도 받은 걸 감사하게 생각해라, 그런 것도 못 받고 팔려나가는 사람도 많다'라는 의견이 압도적이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하향평준화'를 좋아
한
다.
돈 많은 사람이고 돈 없는 사람이고 누구나 아픔이 있고 고통이 있는데, 나보다 상대적으로 처지가 좋은 사람의 고통과 아픔은 보잘것없는 것으로 치부해 버린다.
냉혹하고 차갑게 말하는 것만 옳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한화에서 새로운 경
영
진이 들어왔고 회사 간판은 '한화'로 바뀌었다
'삼성맨'이나 '한화'나 직장인은 그냥
직장인일 뿐이었다.
큰 변화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 변화는 없었다.
마치, 사랑하는 여자친구가 떠나면 죽을 것 같다고도 얼마 안 있어 다른 여자친구와 침대에서 뒹구는 우리들 삶과 다를 바 없었다.
동기들은 갑자기 생긴 위로금이라는 목돈을 어떻게 쓸지 고민이 많았다.
내 룸메이트였던 '경수'형님이 나에게 솔깃한 제안을 했다.
"위로금 어떻게 할
생각 있나?"
"형님 모르겠어요. 갑자기 목돈이 생기니 어떻게 할지 모르겠네요. 천천히 생각해 봐야겠어요"
"그래? 내가 좋은 투자처가
있는데... 나는
거기다가 다 투자했다"
"헉, 위로금을 모두 투자하셨다고요?"
"웅웅, 인생을 바꿔줄 기업에 투자했다."
"아 그래요 형님? 나중에 한번 이야기해 주세요."
"그래? 관심 있으면 조만간 저녁 먹으면서 이야기해 줄게"
"엇 좋아요 형님, 말 나온 김에 내일 저녁 드시죠"
"그래, 그럼 내일 퇴근하고 오리탕 먹으러 가자"
"옙 형님 내일 식사하면서
이야기하시죠
다음날 퇴근하면서 '경수 형님' 차를 얻어 타고 회사와 기숙사 사이에 있는 오리탕 집에 갔다.
오리탕 집은 사람 한 명 살지 않을 것 같은 산 중턱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귀곡산장과 같은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오리탕 집이었다.
마치, 다시 오면 이곳에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의심스럽고 불확실해 보이는 오리탕 집이었다.
"형님 자주 오시는 곳이에요?"
"가끔 오지, 생긴 건 이래도 맛은 좋다"
형님은 자연스럽게 오리탕 두 개를 주문
하
면서 이야기를 하셨다.
"조만간 회사 그만두려고 한다"
"헉, 형님 진짜요? 갑자기요? 어디 이직하셨어요?"
"저번에 말한 인생을 바꿔줄 기업에 크게 투자를 하면서 거기 회장님이 이사 자리를 하나 주셨다."
"헉... 이사요? 도대체 얼마나 투자하셨길래요?"
"지금까지 모은 돈이랑 위로금이랑 다른 사람들 투자금도 합쳐서 10 억원이 좀 넘는 것 같다"
"10억 원이요...???"
"그래 우리 아버지 어머니 모으신 돈이랑 내가 모은 돈 그리고 친척들 돈까지 다 합쳤다"
"헉... 형님 도대체 어떤 회사길래 그렇게 투자를 하시는 거예요? 인생 거신 것 같은데..."
"너 'W'라고 아나?"
"'W'요? 그게 뭐예요?"
"'W'를 모르는구나. 그럼 시골의사 박경철 아나?"
"주식으로 부자 된 박경철 말씀하시는 건가요?"
"그래 맞다. 박경철. 박경철이 'W'를 이야기했는데 꽤 유명한 이야기다. 너 박경철이 처음에 뭘로 그렇게 돈을 벌었는지 아나?"
"몰라요..."
"한국통신이다. 지금의 SKT"
"아 그래요...? 그거랑 'W'가 무슨 상관이에요?"
사장님이 오리탕 두 개를 식탁에 놓고 물어보신다.
"술은 안 하세요?"
"아 차를 가져와서, 너 맥주라도 할래?"
"아 옙 형님 좋죠."
"맥주 카스 하나 주세요."
"옙 맛있게 먹어요"
오리탕 국물을 먼저 한 입 먹어본다. 진하다. 걸쭉한 오리탕이 오리발로 내 몸 구석구석 헤엄치며 기운을 전하는 듯하다.
발길질이 간지럽다.
"'W'가 World Wide Web의 W다."
"아 'W'가 그 뜻이에요...?"
"그래, 박경철이 어디
강연 가서
'WWW'를 처음 듣고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그리고 'WWW' 세상에는 이동통신
필
수라고 생각하고 투자한 것이다."
"아 그래요."
"'W'를 만드는 사람은 0.1%도 안 되는 천재들이고 그 천재가 될 수 없으면 'W'를 알아보는 0.9%의 투자자라도 돼야 한다는 것이지"
"오... 일리가 있는 말이네요."
"그래. 그렇게 해서 박경철이가 부자가 된 거 아이가"
"오... 형님 좋은 말씀입니다"
"그래, 그리고 내가 이번에 'W'를 발견했다."
"진짜요 형님...?"
시원한 맥주가 나와서 형님은 내 잔에만 가득 따라줬다.
"형님 저만 한잔 할게요."
"그려, 나 신경 쓰지 말고 많이 마셔라"
맥주가 시원하고 맛있다. 걸쭉한 오리탕과 함께 미끄럼틀 타듯이 식도를 내려간다.
"형님, 형님이 발견한 'W'가 뭐예요?"
'W'이야기 이후에 이야기는 들으면 안 되는 이야기였다.
형님께서는 비상장 회사에 투자를 하셨고, 지금만 외부 투자자를 유치하는 단계라고 하셨다.
"지금 주당 300원에 사서 3,000원만 돼도 10배가 오르는 거다"
"그게 그렇게 쉽게 오를까요?"
"
초기 투자니 'High Risk, High Return' 아니겠나?
Risk 검토는 내가 다 끝냈다. 나도 미쳤다고 10억 원을 그렇게 투자하겠나?"
"그렇죠..."
"너도 생각 잘해봐라, 내가 룸메이트니까 말해주는 거다"
"옙 형님 고마워요, 생각 좀 해볼게요"
"웅 근데 시간이 없다. 후딱 생각 정리해서 알려줘라. 내가 회장님께 직접 말해서 물량 받아올 테니까"
"예옙 형님..."
며칠을 고민했다.
회사가 갑자기 매각되었고 갑자기 목돈이 생겼다.
형님이 때마침 좋은 투자처를 이야기해 주셨고, 이게 'W'라면 나는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다.
위로금이 없어져도 내 인생은 달라지는 것이 없겠지만, 위로금으로 내 인생을 바꿀 수만 있다면?
그래 이건 하늘이 주신 '기회'이다.
오리탕과 맥주 한 병을 얻어먹고 나는 오리탕에 홀린 듯 위로금 전부를 'W'에 투자했다.
그 후로도 형님은 나뿐만 아니라 다른 동기들에게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시고 시간이 없다는 말과 다르게 몇 달을 투자금을 모집하시고 회사를 떠나셨다.
그래도 삼성에 취업할 정도로 영리한 사람들인데 갑자기 생긴 목돈이어서 그런지 너무나도 쉽게 투자를 해 버렸다.
마치, 체면에 걸린 듯이...
같이 투자한 동기들끼리 모여서 행복한 상상을 했다.
"음 그러니까 우리가 300원에 10만 주를 샀는데, 이게 상장해서
3천 원이면
얼마지?"
"3억이지"
"에게 3억밖에 안돼? 그럼 회사 그만 못 두잖아"
"그럼 상장해서 만원이 되면 얼마지?"
"10억이지"
"흠 10억이면 부족한데... 5만 주만 더 살까?"
"나도 더 사야겠다."
동기들끼리 수량 늘리기 경쟁에 빠졌다.
퇴사한 경수 형님은 더 이상은 물량이 구하기가 어렵다고 이야기하면서 주식 가격이 올랐다고 이야기했다.
"형님 그럼 300원 하던 게 벌써 350원이면 10%는 오른 거네요?"
"그렇긴 하지, 이제 더 구하기 어려우니까 나한테 샀다고 말하지 말고"
"예옙 형님 고마워요 돈 보낼게요"
목돈이 들어올 때를 '경계'해야 한다.
목돈이 들어오면 사람이 감성적으로 변한다.
돈을 쉽게 쉽게 대한다.
그러면 돈은 내 손에서 내 주머니에서 빠져나가게 되어있다.
우리는 인당 몇 천만 원을 투자하면서
아무런 분석을 하지 않았다.
회사의 매출이나 영업이익과 관련된 어떠한 숫자도 보지 않았고,
그렇게 많은 돈을 투자하면서 현장 실사를 간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빠르게 부자가 되어서 어떤 외제차를 살까 상상했다.
쉽고 빠르게 부자가 돼서 사람들 앞에서 떵떵거리는 모습을 상상
하
고 웃었다
.
세상에 그렇게 쉽게 돈 버는 방법은 없었다.
당장이라도 상장할 것 같은 회사는 시간이 갈수록 잠잠했다.
동기들이 번갈아 가면서 형님에게 언제 상장하는지 물어보면 형님은 곧 한다는 말과 함께 정부에서 정책투자를 한다는 이야기 또는 유명한 투자회사에서 대규모 투자를 검토하고 있다는 소리를 번갈아 가면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형님께 먼저 전화가 왔다.
"잘 지내나?"
"옙 형님, 똑같죠. 무슨 일 있으세요. 좋은 소식 있나요?"
"걱정하지 마라, 상장은 올해 안으로는 할 것 같다. 아 그보다 혹시 20만 원 있나?"
"20만 원이요? 왜요?"
"아 내가 여기 투자하면서 주식으로 담보 대출을 받았는데, 주식이 떨어져서 마진콜 당하게 생겼다. 좀 있으면 오를 주식인데 팔기 아까워서 그러는데 20만 원만 빌려줄 수 있나?"
"아아 옙 형님"
"내가 바로 갚을게 걱정하지 말고"
"옙 계좌 알려주세요"
그날 이후로도 형님은 소소하게 돈을 빌려가고 갚고를 반복했다. 알고 보니 나뿐만 아니라 투자한 다른 동기들에게도 마찬가지로 돈을 빌리고 계셨다.
시간이 갈수록 우리의 믿음은 쿠크다스보다 약해져 갔고 형님과 연락은 점점 어려웠다.
마지막으로 빌려간 돈도 돌려받지 못한 상황이었다.
어느 날, 잘 들어가지던 회사 홈페이지는 더 이상 접속이 안되었다.
주식거래 어플에서 찾아보기 힘든 곳에 있는 비상장 주식 메뉴에서 주식은 그대로 있다.
삼성 매각으로 받은 위로금은,
세상을 우습게 생각하지 말라는 게임비로 사용되었다.
나는 스스로 체면을 걸기 시작했다.
'나는 원래 한화로 입사했다. 나는 원래 한화로 입사했다. 나는 원래 한화로 입사했다'
돈을 아끼고 모으는 법만 알았지 어떻게 잘 불려 나가야 할지에 대해서 너무 몰랐다.
아끼고 안 쓴 만큼만 모으는 절대적으로 노동소득에 의존하는 인생
하나만 알고 둘은 몰랐다.
위로금은 날렸지만, 내 생활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다.
아침에 밥 먹고 출근하고, 퇴근하고 기숙사에서 밥을 먹고 운동을 하고 가끔은 동기들과 모여서 술을 마시는 삶의 연속이었다.
다만, 술을 먹는 빈도와 양이 점점 늘어나긴 했다.
술을 먹는 것 말고는 나를 위로할 수 있는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연 팀장님에게 전화가 왔다.
"너 서울 올래?"
그 전화가 내 인생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을 몇 년이 지나고 나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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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밥을 먹은 6명의 직장인
07
철원의 눈
08
대기업을 퇴직한 임원의 하루
09
삼성에서 매각 그리고 위로금
10
부동산 Gap 투자로 역전세를 맞은 후배
11
인생을 바꾼 회사 워크샵
대기업 밥을 먹은 6명의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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