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정희 작가의 '불의 강' 번역에 관하여
'우리 몇 번째지?’를 러시아어로 번역하면…. (오정희의 ‘주자’를 중심으로)
칼럼 제의를 받고, 글 몇 편을 올린 후로 너무도 많은 시간이 흘렀다. 번역이다, 학원 수업이다… 일이 많다는 핑계로 차일피일 미루다 벌써 마지막 글이 2009년도 9월 일이었다니 새삼 부끄러워진다.
얼마 전에 원장님께 내 불성실한 글 쓰기에 대해 꾸지람을 들으면서 색다른 제안을 받았다. 러시아 문학 칼럼이지만, 그것만 고집할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있는 한국 문학 작품 번역과 관련된 글을 올리면 어떻겠냐는 것이었다.
번역을 처음 시작한 것은 그러니까, 200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어떻게 생각하면, 독특한 시작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외국어로 된 작품을 모국어로 번역하는 일부터 시작하는데, 나는 그 반대였으니까 말이다. 그땐 내 이름을 걸고 무언가를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번역을 지원하는 한국문학번역원이란 곳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나와 공역자는 함께 우리에게 번역을 맡겨줄 작가를 찾는 일에 착수했다. 첫 작가에게서 거절의 메일을 받고, 잠깐 좌절했지만, 이내 두 번째 작가에게서 긍정적인 답변과 적극적인 번역 의뢰 의지를 전해 들은 우리는 첫 작품인 “봉순이 언니”의 일부분을 번역해서 번역원에 제출했고, 샘플 번역이 심사에 통과한 후, 2006년도 한 해 동안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번역과 씨름했다.
그에 반해 두 번째 작품은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번역 제안을 받아서 하게 된 작품이라, 내겐 시작 자체가 설렜던 기억이 난다. 작품 제의를 받는 유명 연예인이 부럽지 않게 된 것이다.
첫 작품이 공지영 선생님의 “봉순이 언니”인데, 성인이 된 화자가 어린 시절에 자신의 집에 함께 살았던 “봉순”이라는 이름의 식모를 회상하는 성장 소설이다. 공지영이라는 작가의 문체가 원래 까다롭지 않고, 내용도 재미있어서, 첫 작품이라는 점을 빼고는 번역이 아주 힘들거나,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두 번째 작품의 경우는 좀 달랐다. 달라도 많이 달랐다. 오정희 선생님의 작품은 문체도, 색깔도 너무 차이가 났다. “봉순이 언니”에 반해, “불의 강”은 번역을 하기 위해 나 스스로를 채찍질해야 할 만큼 작업 자체가 힘들었다. 거기에 찬 물을 끼얹는 오정희 선생님의 작품에 임하는 의지에 관한 “독자와 숨바꼭질을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작품 창작을 한다”는 글귀를 읽고는 더욱 긴장했던 기억이 난다.
“봉순이 언니”가 비교적 밝은 톤이었다면, “불의 강”은 회색 빛 또는 비를 잔뜩 머금은 먹구름을 연상케 했다. “불의 강”에선 주인공들 모두가 괴롭다고, 사는 게 너무 버겁다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너무도 고독해서 동네 꼬마 아이에게 수면제를 먹인 노인, 아이를 지우고 정신 병원에 들어간 주인공, 동성연애를 하던 옛 애인을 잃은 한 군인 등 책 전체가 고통에 아우성치고 있었다. 우스갯소리로 “세상에 있는 모든 불행한 사람들을 다 모아놓은 것 같다.”라고 지인들에게 말한 적이 있다. 그만큼 내게 이 작품은 버겁고, 힘들었다. 작품 번역을 하는 중에, 나는 연인과 헤어졌고, 그 후엔, 평생 배필을 만나서 행복한 가정을 일구었다. 어쩌면, 그래서 내게 더 애착이 가는 작품인지도 모르겠다.
서론이 너무 긴 것 같다. 번역 얘기는 수업 시간에 짬짬이 한 것 빼고, 내 수업을 안 들은 학생들은 모르는 일이니, 양해해 주기를 바라면서…
유명한 영어권 번역가의 책을 읽으면서, 그가 “월간지” (한 달에 한 권씩 번역을 했기 때문에 붙여진 별명)라는 별명을 얻기까지 얼마나 다양한 고민들을 했는지를 알게 되었다. 번역에 관한 이야기라면, 구체적인 예를 빼고는 이야기 진행 자체가 막연하고, 추상적일 위험이 있다. 따라서, 본론으로 들어가서는 원문 텍스트와 번역본을 비교하는 작업을 통해 내 칼럼을 읽는 제자, 독자들이 번역이라는 작업에 좀 더 구체적으로 다가갈 수 있기를 바란다.
아래는 “주자”라는 단편 속에 있는 문장들이다.
“우리 몇 번째지?”
-Сколько раз мы уже встречались?
이 문장의 경우, 한국어 원문 상으로는 현재 시제이지만, 러시아어로 옮길 때는 이미 지나온 일에 관한 질문이므로, 과거 시제로 해야 한다. 러시아어로는 위와 같이 «우리 벌써 몇 번이나 만났지?»가 된다.
내뱉는 순간부터 공연한 소리라고 후회를 하면서 나는 채희에게 벌써 몇 번이고 되풀이된 질문을 다시 하고 있다.
Я тут же пожалел о произнесённых словах, я уже несколько раз спрашивал её об одном и том же.
위의 경우는 두 개의 단문이 연결된 것이다. 즉, «내뱉는 순간부터 공연한 소리라고 후회를 했다.» «나는 채희에게 벌써 몇 번이고 되풀이된 질문을 다시 하고 있다.» 이 문장은 논리적인 관계를 따지자면, «내뱉는 순간부터 공연한 소리라고 후회를 했다. 왜냐하면, 나는 채희에게 벌써 똑같은 질문을 몇 번이나 했기 때문이다.»가 된다. 따라서 러시아어로 옮길 때, 이 원문에는 없는 «왜냐하면»이라는 접속사를 넣어줄 것인가? 또는, 러시아어에도 있는 접속사가 없는 복문을 택할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 이 경우는 접속사 없는 복문을 써도 의미의 변화가 없고, 게다가 원문의 느낌도 살릴 수 있으므로, 우리는 후자의 경우를 선택했다.
택시가 앞에 멎자 나는 그녀를 밀어 넣고 요금을 치러주기 위해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지폐와 함께 조그맣고 딱딱한 물체가 손에 잡혔다. 내 손은 주머니 속에서 갑자기 긴장했다. 운전사와 채희의 눈이 의아한 듯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 나는 멍하니 그들의 시선을 되받았다.
Когда остановилось такси, я посадил её в салон и сунул руку в карман, чтобы достать деньги. Вместе с купюрами попался маленький твёрдый предмет. Моя рука в кармане напряглась. Таксист и Чхэ Хи смотрели на меня, как на ненормального. Я, в свою очередь, растерянно смотрел на них.
«그녀를 밀어 넣고»에서 заставил сесть 이나, толкнул её в машину 라고 표현할 수 있었겠지만, 그렇게되면 문장이 불필요하게 길어지고, 가독성 면에서 떨어지는 점을 우려했다. 따라서 «밀어넣다»의 의미는 «택시에 태우다»이므로, посадить라는 동사를 썼다. «의아한 듯 내게로 향하고 있었다»의 경우 러시아어로 번역하면, 예문처럼 «나를 이상한 사람인 것처럼 쳐다봤다»가 된다.
몇 가지 예만 들었지만, 번역을 하면서 늘 고민하는 것은 «러시아어로는 어떻게 될까?»이다. 번역이니까 당연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러시아식 사고방식에 익숙해지려는 노력이 이 작업을 하는 데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이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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