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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승주연 Jan 11. 2021

러시아 오페라 대본 번역에 관하여

한국통번역학회 발제문  

러시아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대본 번역에 관하여 


                                                           승주연 (프리랜서 번역가) 


1.    왜 ‘보리스 고두노프’ 인가?  


*오페라 시연 https://www.youtube.com/watch?v=IsFuo5uNu6Y&feature=youtu.be

 

 뿌쉬낀의 작품을 원작으로 제작된 오페라는 100여편이 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해당 오페라들은 현재까지 러시아 국내외에서 주요 러시아 오페라 레퍼토리로 공연이 되고 있다. 그 중에서도 ‘보리스 고두노프’는 1913년부터 2011년까지 무려 273회나 공연되었는데, 이는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레퍼토리 중 30위로 ‘사랑의 묘약’과 ‘투란도트’ 등 주요 이탈리아 오페라 레퍼토리와 비슷한 수준이다.[1]



 하지만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대성공을 거둔 것은 아니었다. 황실극장의 공연검열당국은 작곡가가 쓴 초고의 공연을 허락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여성배역이 거의 없고, 너무 우울하며 형식이 지나치게 낯설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작곡가는 대대적인 개정안을 1872년에 완성하고, 그 이후에도 삭제와 수정을 거듭한 후 1872년에 피아노-보컬스코어가 정식으로 출판이 되었으며, 이 1872년본을 ‘원전판’이라 부른다. 

 

 작곡가 사후인 1896년에 림스키-코르사코프가 상당부분을 수정하여 다시 무대에서 해당 오페라를 선보이게 된다. 이 버전이 지금까지 가장 많이 공연되어 온 ‘표준판’이다. [2]


 그렇다면,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왜 러시아를 대표하는 국가적 오페라로 칭송받고 있는가? 그 이유는 무소르그스키가 이탈리아의 오페라 작곡 방식을 과감하게 외면하고, 러시아 민족주의 음악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어와 이탈리아어의 언어적 차이를 차치하고도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작곡가는 이탈리아 오페라 특유의 듣기 좋고 세련된 아리아 대신 거칠고 시원시원한 스타일의 아리아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는 점이다.

[3]


뿌쉬낀의 희곡에 기반을 둔 무소르그스키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러시아 오페라 중 가장 많이 공연되는 대표적인 작품이며, 해외 무대에서는 자주 선보이고 있지만, 국내 오페라단에서는 유감스럽게도 단 한 번도 선보이지 않았다[4].  따라서 국립오페라단의 보리스 고두노프는 대한민국 오페라 역사상 상당히 중요한 공연이다

2. ‘보리스 고두노프’에서 직역과 의역이란? 


 ‘보리스 고두노프’ 리브레토 번역을 가장 특별한 경험이라고 할 수 있는 이유는 바로 리브레토의 번역이 의역에만 국한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공연을 준비하는 중에는 오히려 의역 보다는 직역의 비중이 더 컸다고 할 수 있다. 

 직역이란 ‘외국어로 된 말이나 글을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에 충실하게 번역함. 또는 그러한 번역’이라고 정의하고 있다[5]

 또한 직역이란 원작을 중시해서 원작과 등가적인 번역을 해야 한다는 ‘등가성’이론 즉, 출발어 중심의 번역이론을 대변하며, 독자를 중시해서 독자에게 수용 가능한 번역을 해야 한다는 ‘수용성’ 이론, 즉 도착어 중심의 번역이론의 결과물이다.[6]


 위의 두 가지 정의 모두 직역은 ‘문장’ 단위의 번역을 지칭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보리스 고두노프’ 리브레토의 직역이란 문장 단위가 아니라 단어 하나 하나를 해석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해당 직역은 악보에 그대로 반영되어서 오페라 가수들이 연습할 때에 활용하기 때문에 비중이 결코 가볍지 않다. 


3. ‘보리스 고두노프’ 리브레토 번역의 어려움 


 뿌쉬낀의 희곡 ‘보리스 고두노프’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당대의 관례에 비해 지문에 매우 인색하다는 점이다. 매우 다양한 시공간과 많은 등장인물을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구체적인 세부사항들은 거의 제시하고 있지 않는다. 이러한 현상은 출판본에서 더욱 심화된다. 따라서 뿌쉬낀 당대에는 구멍투성이 텍스트라는 비판을 면치 못 했다. 하지만 현대에는 오히려 영화적인 특징으로 제작진이 채워 넣어야 할 빈 공간을 충분히 제공할 수 있다는 장점으로 작용한다.[7]




리브레토의 구성에서 지문 비교 


프롤로그 : 1598년, 민중 

1장 노보제비치 수도원 뜰 (모스크바 근교에 있는 노보데비치 수도원 안뜰 관객석과 가까운 쪽 –작은 망루가 달린 수도원 벽에 출입구가 있다. 군중들 모여 있다) 


2장 크레믈린 광장 (모스크바 크렘린에 있는 광장. 관객석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궁전의 붉은 색 현관 계단이 있고, 무대 앞부분 오른쪽에서는 군중들이 우스펜스키 성당과 아르항겔스키 성당 사이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성당들의 입구가 보인다) 


1막: 1603년, 그리고리 


1장 추도프 수도원의 방  밤. 추도프 수도원에 있는 수도사의 방. 

(피멘이 등잔불 앞에서 무언가를 적고 있다. 그리고리는 자고 있다.) 


2장 리투아니아 국경의 술집 (리투아니아 국경 근처 여관)  


2막 : 황제의 궁전, 보리스 (모스크바 크렘린. 황제의 궁전 안에 있는 호화스러운 어느 방. 크세니아는 약혼자의 초상화를 보면서 울고 있다. 황태자는 커다란 지도책을 열심히 보고 있다. 유모는 뜨개질을 하고 있다) 


3막 : ‘폴란드’ 장면, 그리고리 

1장 마리나의 의상실 (산도미시에시에 있는 마리나 므니세크의 파우더룸. 마리나는 화장대 앞에 앉아 있다. 마리나는 처녀들이 부르는 노래를 듣고 있다.)  


2장 밤, 정원, 분수 (산도미에시에 있는 므니세크의 성. 정원. 분수, 달밤. 참칭자가 꿈을 꾸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성으로부터 나오고 있다.) 


4막: 1604년 

1장 바실리 사원 (크로미 근처 숲 속 공터. 오른쪽으에는 비탈길이 있고, 그 뒤에는 도시의 성벽이 있다. 비탈길로부터 무대를 가로지르는 길이 나있다. 앞쪽으로는 울창한 숲이 펼쳐져 있다. 빌탈길 바로 옆에는 커다란 그루터기가 있다.) 

(한 무리의 부랑자들이 무대 뒤에서 비명을 지른다. 비탈길을 따라 한 무리의 부랑자들이 뛰어들어온다. 무리는 밧줄에 묶인 귀족 흐루시초프를 끌고 오고 있다.)  


2장 황제의 궁전 (모스크바 크렘린에 있는 넓은 연회장. 양쪽에는 벤치가 놓여있다. 오른쪽에는 정문 계단으로 향하는 출구가 있고, 왼쪽에는 방으로 들어가는 출구가 있다. 오른쪽에 무대 난간 쪽에 더 가까운 쪽에는 필기도구가 놓여있는 책상이 있다. 왼쪽에는 황제의 자리가 있다. 긴급 귀족 회의가 열리고 있다. 막이 오른다)[8]



 장소의 이동을 주시해보면, 프롤로그 1장에서는 노보제비치 수도원 뜰에 있다가, 2장에서는 크레믈린 광장으로 장소를 이동하게 되며, 1막 1장에서는 추도프 수도원의 방으로 옮겼다가 2장에서는 리투아니아 국경 근처 술집으로 이동하게 된다. 2막에서는 황제의 궁전에서 사건이 전개되며, 3막 1장에서는 마리나 므니세크의 파우더룸으로 장소를 이동하게 된다. 3막 2장에서는 정원으로 장소를 옮겼다가 4막 1장에서는 바실리 사원으로 가며, 2장에서는 황제의 궁전에서 사건이 전개된다. 물론 장소의 이동만으로 어떤 부분이 구체적으로 비어있는지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데 한계가 있지만, 번역을 할 때나 오페라를 이해하는 데에 어려움이 있을 수 있음을 추측할 수 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원작에서는 사건의 전개 과정이 순차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아니라 파편적인 상황과 그에 대한 논평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달된다. 따라서 관객들은 불연속적으로 열거된 장면과 장면 사이에 벌어진 일을 논평에 의지하여 스스로 재구성해야 한다. 하지만 리브레토에서는 이러한 논평마저 거의 삭제되었으므로 장면 사이의 불연속성은 더욱더 심화되는 결과를 낳는다. 오페라는 무대의 스케일과 음악의 효과로 인해 전후 맥락 보다는 무대 위에서 벌어지는 그 순간에 고도로 집중되는 현상이 쉽게 일어난다. 따라서 논평의 삭제는 원작의 불충분한 동기화와 비약을 심화시키고 거리두기-말하기의 요소가 사라진 자리에 직접 보여주기를 배치함으로써 각 장면에 대한 몰입을 만들어낸다.[9]


 하지만 이렇게 사이 사이에 비어있는 논리 혹은 논평이 리브레토를 번역하는 역자에게는  달갑지 않을 수 있다. 역자는 장과 장, 막과 막 사이에 빠진 논리, 시간적 혹은 공간적 연속성을 오페라 관객 전에 먼저 고민하고 번역에 적용을 시켜야 하기 때문이다. 


4. 번역의 순서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보리스 고두노프’의 리브레토 번역은 크게 직역과 의역으로 나뉜다. 그리고 의역이 감수를 거치면서 프로그램북에 들어가는 최종본이 되며, 이는 동시에 공연 자막이기도 하다. 

번역의 순서는 간단하게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1. 단어 하나 하나를 직역한다. 

2. 국립오페라단에 직역한 것을 막 단위로 보낸다. 

3. 국립오페라단에서 직역한 것을 악보에 적어넣는다. (사실 국립오페라단 직원들에게 러시아어는 그림일 뿐) 

4. 국립오페라단 직원들이 직역을 악보에 반영하는 동안 의역 작업을 한다. 

5. 의역본을 국립오페라단에 보낸다. 

6. 의역본을 감수한 후 프로그램북에 싣고, 공연시 자막으로 활용한다. 

[직역의 예] 

На      кого    ты      нас    покидаешь, отец   наш! 
 위하여  누구를  당신은  우리를  버리나이까, 아버지 우리의! 


[직역을 악보에 반영한 예] 


[의역의 예] 

На кого ты нас покидаешь, отец наш! 

우리 아버지, 당신은 누구로 인하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프로그램북 버전] 

На кого ты нас покидаешь, отец наш! 

우리 아버지, 당신은 누구로 인하여 우리를 버리시나이까?


5. 300년 전 러시아 시대상을 반영하는 오페라의 리브레토 번역이란… 


 처음에 번역을 의뢰받으면서 받은 악보는 사실 최종 문자 개혁이 있기 전의 러시아어로 작성돼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악보에 있는 가사를 읽기 힘든 부분들이 상당부분 포함돼 있었다. 우여곡절 끝에 지인을 통해 악보를 받았고, 받은 악보를 오페라단에서 스캔본을 다시 보내왔다. 


 이 뿐만 아니라 이렇게 국립페라단에서 보낸 스캔본의 리브레토와 악보에 적힌 가사가 군데 군데 일치하지 않았기에 번역하는 동안 계속해서 리브레토와 악보를 확인해야 했고, 작업하는 중간에 일부 악보를 바꾸는 바람에 그 부분 번역을 다시 했던 일은 뒤돌아보면 상당히 번거로운 작업이었다고 생각된다. 

 또 다른 어려움은 동일한 마디에 4성부(소프라노, 알토, 바리톤, 테너)가 그려져있는데, 그들의 가사가 모두 다를 때이다.  오페라 가수들은 각자 자기 파트를 부르지만, 이것이 동시에 이루어지기 때문에, 역자는 이것을 어떻게 번역에 반영해야 할지 고민할 수 밖에 없다. 

 

 이밖에도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리브레토 번역의 어려움은 해당 오페라가 16세기 말부터 17세기 초에 러시아를 지배했던 실존인물 보리스 고두노프의 비극적인 일대기를 그린 작품이라는 점이다. 21세기의 러시아도 전달하는 데에 어려움이 따르는데, 무려 300년 전의 러시아의 모습을 한국의 관객에게 전달하는 리브레토 번역에는 어려움이 따를 수 밖에 없다. 


6. 나가며… 


오페라의 세계는 이른바 3대 기둥(필라)이 있다. 세계 오페라를 떠받치고 있는 세 개의 학파라고 말할 수 있는 기둥이다. 이탈리아, 프랑스, 그리고 독일이 그것이다. 오스트리아는 독일어 권역이므로 독일+오스트리아로 표기한다. 러시아를 비롯한 동 유럽국가에서도 훌륭한 작품들이 찬란하게 생산되었으며 세계 오페라 연혁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렇지만 러시아와 동유럽 여러 나라들도 따지고 보면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오스트리아라는 커다란 필라에는 가려져 있다.[10]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 최초로 국립오페라단에서 러시아 오페라 공연을 했다는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립오페라단의 ‘보리스 고두노프’ 공연 리브레토를 번역하면서 사실 리브레토 번역 외에도 오페라 딕션, 예술감독 인터뷰 통역 등 처음에 예상했던 것보다 더 깊숙히 ‘보리스 고두노프’ 공연에 관여를 하였다. 그리고 이 작업에 있어서 특이한 점은 악보를 볼 줄 모르는 번역가와 러시아어를 모르는 국립오페라단 직원들이 힘을 합쳐 결과물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이 것만으로도 상당히 의미가 있는 작업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국립오페라단이 국내 최초로 러시아 오페라 대작인 ‘보리스 고두노프’에 도전하였고, 국내외 정상급 오페라 가수들이 참여하는 만큼 수준 높은 번역에 대한 부담감도 컸다. 하지만, 관객들이 오페라를 보면서 내용 이해하는 데에 도움을 줄 수 있어서 부담 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뿌듯했던 작업이었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참고문헌


백남옥(2007) 『오페라 로만티카』, 북스페인 

한국문학번역원(2007), 『문학번역의 이해』, 북스토리 

송원진(2015), 『러시아 문학과 오페라』, 인간과 문학사 

신영선(2017),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의 리브레토 연구」, 『러시아연구』, 제 27권 제 1호, 167-194쪽 

네이버 국어 사전 : http://krdic.naver.com/detail.nhn?docid=35942600, 검색일 2018, 03, 12) 

국립오페라단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시연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IsFuo5uNu6Y&feature=youtu.be (검색일: 2018, 03, 17

국립오페라단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프로그램북 

보리스 고두노프 악보 표준판(직역 포함)          


[미주] 


[1] 신영선 (2017)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의 리브레토 연구』『러시아 연구  제 27권 제 1호』, 168쪽 

[2] 신영선 (2017)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의 리브레토 연구』『러시아 연구 제 27권 제 호』, 170쪽 

[3] 백남옥(2007) 『오페라 로만티카』, 북스페인, 333쪽 

[4]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 28년만에 한국 공연’, 중앙일보중앙일보 

2017. 03, 23, http://news.joins.com/article/21397818 (검색일: 2018.03. 12) 

[5] 네이버 국어 사전 참조 

[6] 한국문학번역원(2007), 『문학번역의 이해』, 북스토리 , 31쪽 

[7] 신영선(2017),「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의 리브레토 연구」,『러시아연구』, 제 27권 제 1호, 171

[8] 2017년에 국립오페라단에서 공연한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의 프로그램북

[9]신영선(2017), 「오페라 「보리스 고두노프」의 리브레토 연구」, 『러시아연구』, 제 27권 제 1호, 181쪽 

[10] 백남옥(2007) 『오페라 로만티카』, 북스페인, 2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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