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아무리 그래도 영사기는 너무 한 거 아니니?

21세기를 살고 있는 마당에 타자기도 좀 아니지 않니?

by 승주연

아니 아무리 그래도 영사기는 너무 한 거 아니니?

21세기를 살고 있는 마당에 타자기도 좀 아니지 않니?


딸이 모동숲 게임을 하고 있고, 나는 로빈슨 크루소를 읽고 있다. 딸이 나에게 말을 건다.


딸: 엄마, 이 영사기 예쁘죠?

나: 뭐, 영사기? 영사기가 뭔지는 아니?

딸: 네, 알아요. 영화 보여주는 거잖아요. 엄마, 여기 타자기도 있어요.

나: 뭐, 타자기? 너 타자기는 뭔지 알아?

딸: 네, 타자 치는 거잖아요. 컴퓨터처럼요.

나: 아니, 아무리 게임이라도 그렇지, 영사기나 타자기는 너무 한 거 아니니?

딸: 예쁘잖아요.

나: 누가 요즘 영사기 돌려서 영화를 본다고 그래? 현실성이 없잖아. 생각을 해봐. 네 친구들이 집에 놀러 왔는데, 집에 TV 대신 영사기가 있고, 네가 친구들한테 영사기를 보여주면서 영화를 같이 보자고 하는 거야.

딸: 친구들이 좋아할 것 같은데요!

나: 그럼, 넌 영사기를 돌리고 친구들은 영화를 보고?

딸: 네 ㅋㅋㅋ

나: 아니, 정말 영사기랑 타자기 밖에 살 게 없었어?

딸: 사실, 벨이 얼마 없어서 그랬어요. TV나 컴퓨터는 너무 비싸서요… ㅜㅜ

나: 얼마나 비싸길래?

딸: 저한테 4만 벨이 있는데, TV는 10만 벨 정도 한단 말이에요.

나: 그럼, 융자받으면 되겠네. 그 정도는 화석 캐고, 물고기 잡아다가 얼마든지 벌 수 있는 벨 아닌가?


잠시 후에 딸이 0 벨이 된 자신의 통장 잔고를 보여준다.


딸: 엄마, 이거 보세요! 0 벨이 됐어요!

나: 아니, 그 돈 다 어디에다가 쓴 거야?

딸: 옷 샀어요.


난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살짝 화가 났다고도 볼 수 있다. 게임이라지만, 불필요한 소비는 바로잡아야 할 것 같다는 다소 황당한 생각까지 한 것 같다.


나: 아니, 아까 TV가 비싸서 못 사겠다더니, 옷은 왜 사는 거야? 그럼 그동안 네 캐릭터는 벗고 다닌 거야?

딸: 아니요, 옷은 입고 다녔는데, 거기 파는 옷이 너무 예뻐서 그만…

나: 아니, 게임 캐릭턴데, 그냥 벗고 다녀도 되는 거 아니야? 거기에다가 왜 그 많은 벨을 쓴 거야?

딸: 벗고 다니면 감기 걸려요.

나: 캐릭터가?

딸: 그럼, 약이 왜 있겠어요?

나: 헐…


그나저나 모동숲을 보면서 저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돈이 모자라면 집 앞에서 화석을 캐거나 집 근처에 있는 강 같은 데서 물고기를 잡아서 팔아서 돈을 벌 수 있다. 또 집 앞에 있는 과실수에서 과일을 따다가 팔아도 된다. 물론 모동숲 안에도 은행이 있어서 대출을 받을 수도 있고, 대출금을 갚을 수도 있다. 지난번에 딸이 모동숲 할 때는 집을 늘릴 때 대출을 많이 받은 것 같았다.


문득 내가 필요한 것 이상으로 많은 것들을 움켜쥐고 있지는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동숲처럼 물물 교환을 하고, 밭에서 일하고, 물고기를 잡고, 가끔 운 좋게 화석을 캐는 등의 노동을 해서 하루하루 필요한 것을 구하는 삶… 어쩌면 이런 삶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에 가장 집중할 수 있고, 지금 현재를 즐길 수 있는 가장 옳은 삶은 아닐까?


잠시 후 나는 충격적인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딸: 엄마, 저 지네 잡았어요. 나방도 잡았어요.

나: 그런 것도 돈이 돼?

딸: 네, 꽤 비싼 것 같아요. ㅋ 이거 팔아서 빚 갚아야죠.

나: 빚이 있어?

딸: (당연한 걸 묻는다는 듯 천진난만한 투로) 20만 벨 넘게 빚졌어요. ㅋ

나: 아니, 그럼 빚을 먼저 갚아야지 옷을 샀단 말이야?

딸: 어차피 빚은 화석을 캐거나 나방 같은 걸 잡아서 갚으면 되고, 또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빚지고 그런 거죠 뭐.

나: 아니, 그런 건 누구한테 배운 거야?

딸: 그냥 사는 게 그런 거 아닌가요?


하긴, 우리가 사는 게 그렇긴 하다. 빚내서 집 사고, 빚 갚고, 또 빚내서 차 사고, 그 와중에도 외식하고, 쇼핑하는 우리 삶을 그나마 건전하게 반영한 것이 모동숲이 아닐까 싶다. 최소한 이 안에서 살인을 하거나 누구를 해치지는 않으니 말이다.


딸: 엄마, 나도 모동숲에 있는 방을 갖고 싶어요.

나: 영사기랑 타자기 있는 저 방 말하는 거야? 그것보단 지금의 네 방이 낫지 않니?


현실보다 더 현실 같은 가상의 공간이 이젠 꽤 친숙하다. 하긴, 우리는 꽤 자주 비현실 같은 현실과 마주할 때가 있으니 어쩌면 가상의 공간이 그보다 더 현실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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