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영화를 중간부터 보면 절대 안 되는 이유...

감당할 수 있겠어?

by 승주연

사실 나는 평소에 몇 가지 프로젝트를 동시에 진행하는 데 익숙하고, 머릿속은 늘 다양한 프로젝트가 잡탕밥처럼 혹은 비빔밥처럼 뒤섞여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가족과 함께 영화를 보는 순간에도 내 머리는 번역과 번역할 책, 일정, 보내야 할 이메일 속에서 유영하고 있고, 눈과 몸만 억지로 화면에 붙박여있기 일쑤였다. 한 번은 남편과 함께 퓨전 사극을 보고 있었다.


주인공: 낭자, 내가 역관이 되면 낭자를 코끼리에 태워주겠소.


나: 아니, 역관이 되는 거랑 코끼리에 태워주는 거랑 무슨 연관이 있는 거지? 이게 말이 되냐고!


남편: 말이 되지. 생각해봐. 역관이 돼서 태국이란 나라를 같이 간단 말이야.


나: 그래서?


남편: 태국에는 코끼리가 많지.


나: 그래서?


남편: 돈만 주면 코끼리를 탈 수 있으니까 코끼리를 태워준다는 거지.


나: 도대체 몇 개를 건너뛴 거야? 너무하네!


남편: 그게 이해가 안 돼?


나: 응. 그게 어떻게 이해가 돼? 그럼 이렇게 말해야 옳잖아. 낭자, 내가 역관이 돼서 태국이란 나라에 가게 되

면, 낭자를 데리고 가겠소. 태국에서 코끼리도 태워주겠소. 이렇게 말하면 좀 좋아?


남편: 아니, 척하면 알아들어야지!


나: 내가 너무 러시아식 사고에 익숙한 건가? ^^;;;


러시아어로 ‘나 도착했어’는 ‘나 도착해서 만나기로 한 건물 안에 있어’인지, ‘나 도착해서 건물 앞에 있어’ 인지를 구별해야 한다. ‘다 와가는지’, ‘다 와서 건물 앞에 도착한 건지.’, ‘건물 밖으로 나가서 거기에서 숲 쪽으로 걸어서 출발한 건지, 뛰어서 출발한 건지’, ‘나가서 금방 들어올 건지’, ‘나갔다가 한참 있다가 올 건지’ 등 동작을 굉장히 섬세하게 쪼개는 경향이 있다.


이렇게 말해야 알아듣는 내가 영화를 보는 동안 딴생각까지 한다면 결과는 불 보듯 뻔할 것이다. 그런데 한 번은 남편과 딸이 여러 번 본 일본 만화영화를 중간부터 보자고 하는 것이다. 물론 이 제안은 나에 대한 정보가 다소 부족한 딸이 한 것이었다.


딸: 엄마, 우리 중간부터 봐요.


나: 감당할 수 있겠어? 나 질문 많이 할 텐데.


남편: Y야, 안돼. 절대 안 돼. 엄마 질문 엄청 많이 할 거야. 처음부터 봐도 질문하는데, 중간부터 보면 감당이 안될 거야. 그냥 처음부터 차근차근 보자.


나: 좋은 생각이네! ㅋ


서로가 달라도 너무 달라서 지루할 틈이 절대 없는 우리 일상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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