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향 평준화

옷 정리를 하다가...

by 승주연


나는 솔직히 정리 정돈을 잘 못한다. 하지만, 코로나 사태로 집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아무래도 구석구석 보이지 않던 무질서가 눈에 들어오고,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정리하는 흉내나마 내는 중이다. 하지만, 남편의 경우는 결혼 전부터 정리를 잘하는 사람이어서 나는 어쩌면 내심 정리 정돈과 관련해서 상향 평준화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남편 혼자서 정리하는 데에 지쳤는지, 혹은 정리가 안 돼 있어도 생활하는 데에 크게 불편함을 못 느꼈는지 정리를 잘 안 하는 것 같았다. 옷장 정리의 경우가 특히 더 그랬다.


오늘 나는 우연히 빨래한 옷들을 정리하다가 침대 밑에 있는 서랍에 넣어둔 남편 옷이 서랍 밖으로 삐져나와있는 것을 발견했다. 솔직히 다른 때 같았으면, 애써 외면했겠지만, 오늘따라 문득 서랍 속이 궁금하기도 했고, 남편 옷을 정리해주고 싶은 마음도 들어서 서랍장을 열어봤다. 서랍장 상황은 그야말로 혼돈 그 자체였다. 실망스러운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결혼하고 처음 하는 정리는 아니겠지만, (아니길 간절히 바라며…) 하향 평준화에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나는 남편의 옷을 정리해주기로 했다. 처음부터 정리의 달인들처럼 반팔 옷은 반팔 옷끼리, 긴 팔은 긴 팔 끼리 정리하는 것 까지는 아니겠지만, 꽤 그럴싸하게 정리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문득 남편 옷 사이에 끼어있는 여자 애 옷이 보였다.


나는 그 순간 남편이 로리타 증후군 같은 걸 앓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땠을지 상상해봤다. 만약 그랬다면, 남편은 여자 애 옷을 검은 비닐봉지에 싸서 서랍장 구석에 꽁꽁 숨겨놨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도 여자 애 옷은 남편 옷과 뒤섞여있었고, 우연히 휩쓸려 들어갔을 가능성이 커 보였다. 게다가 이건 여자 속옷도 아니지 않은가? 문득 옷 정리를 하면서 짖꿎은 상상의 나래까지 펼쳐가며 나는 혼자 키득거렸다. 잠시 후 정리를 끝낸 나는 시치미를 뚝 떼며, 남편을 안방으로 불렀다.


나: 여보~ 이리 와 봐요~

남편: 왜? 무슨 일인데?

나: 이거 봐봐요!

남편: 오~~~ 당신이 웬일이야? 결혼 12년 만에 내 옷을 정리한 거야?

나: 에이, 그 정도는 아닐걸?


정리를 하다 보면 어떤 옷을 많이 샀는지, 어떤 옷이 필요한 지를 알 수 있다. 솔직히 있는 옷만 계속 입기 때문에 생각보다 많은 옷이 필요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많은 옷을 움켜쥐고 사는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옷에는 특별한 사연, 사람, 인연이 대롱대롱 매달려있다. 우리가 옷을 정리하지 못하는 것은 어쩌면 옷과 얽힌 다양한 과거에 얽매여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백만년 쯤 후에 입을지도 모르는 옷과 함께 과거의 나를, 내 슬픔과 내 아픔을 털어내 버리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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