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사가 15년 만에 '부탁'이라는 걸 한 날

도시락에는, 말로 못한 축하를 담았습니다

by 랑이네 글밥집

오늘은 우리 집에 아주 특별한 일이 있었다.

김기사의 딸, 효림이가 친구들과 몇 날 며칠 밤새워 만든 영상으로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상, 그것도 대상을 받은 날이다.


상금 800만 원.

숫자만 보면 커 보이지만, 그 뒤에 숨은 시간들을 생각하면 ‘값으로 환산할 수 없는 무게’라는 말이 더 맞다.

숱한 밤, 청춘들이 뜬눈으로 지새우며 만들어낸 산물이니까.


이 영광의 순간을 보기 위해,

김기사는 택배 일을 시작한 지 15년 만에 처음으로 오전 반차를 냈다.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센 사람인지,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하기를 얼마나 싫어하는지 아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이 얼마나 기적 같은 일인지 알 것이다.


딸아이 유치원 입학부터 초·중·고 졸업식까지….

수많은 아이의 ‘첫날’과 ‘마지막 날’에 김기사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 시간에도 그는 변함없이 핸들을 잡았고, 짐을 이고 지고 날랐다. 행사장에는 늘 나 혼자 서 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며칠 전, 김기사가 동료 기사들 단톡방에 올리려던 메시지를 실수로 내게 보낸 적이 있다.


“여러분, 아이가 중요한 상을 받아서… 이번에는 부득이하게 오전 연차를 좀 써야 할 것 같습니다. 부탁드립니다.”


‘부탁드립니다’라는 다섯 글자.

그의 입에서 나오는 그 말을 나는 15년 만에 처음 보았다.


그 메시지를 본 효림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말했다.


“아빠가 누구한테 부탁한다는 말도 해?

집에서는 대장 노릇만 하던 사람이?”


우리는 셋이서 한참을 웃었다.


하지만 나는 웃으면서도 속으로 조금 울컥했다.

자식 일 앞에서는, 그 뻣뻣하던 사람도 고개를 숙이는구나.

그런 마음으로, 그런 무게로 가장의 자리를 지켜왔구나.


그리고 마침내 오늘.

단상 아래에서 나는 아이의 얼굴보다,

그 아이를 바라보는 김기사의 옆모습을 더 오래 바라보았다.


반짝이는 딸을 눈에 담는 그 눈빛이,

그 사람의 지난 15년을 조용히 설명해 주는 것만 같았다.


시상식이 끝나고 가족사진을 한 장 남겼다.

오랜만에 셋이 나란히 선 사진을 보고 나는 잠시 멍해졌다.

그토록 곱고 곱던 얼굴 하나만!!! 보고 결혼했는데…

그 김기사는 도대체 어디로 가버렸나.

세월의 직격탄이란 이런 건가 싶어 괜히 웃음이 나면서도 마음이 짠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모처럼 축하 기분을 내고 싶었다.

맥주라도 한 잔 하면서 오늘의 여운을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바사삭. 내 기대와는 달랐다.


효림이는 3일 밤샘을 하고도 곧장 학교로 과제를 하러 달려갔고,

김기사는 집에 오자마자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늦은 출근을 서둘렀다.


현관을 나서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깨달았다.

나 혼자 감정에 푹 잠겨 있을 시간이 아니구나.

오늘이 아무리 특별해도,

우리 가족은 각자 자기 자리에서 묵묵히 다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구나.


그래서 나도 다시 마음을 다잡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김기사의 도시락을 싸고, 저녁 반찬을 준비했다.


말은 안 해도, 오늘만큼은 ‘잔치 기분’을 내주고 싶었다.

도시락 통 가득 불고기를 넣고,

김기사가 제일 좋아하는 아주 매운 오징어볶음(나는 엄두가 안 나서 간도 못 본다. 끙)과 갓김치를 챙겼다.

그리고 “요즘 날 춥다, 뜨끈한 국물 생각난다”

그가 무심하게 흘렸던 말을 기억해

시금치를 넣어 얼큰한 된장국을 끓였다.


묵묵히 일하는 사람에게는

백 마디 말보다 따뜻한 국물 한 모금이 더 깊게 닿을 때가 있다.


오늘은 효림이를 축하하는 날이었지만,

도시락을 싸는 내내 나는 왠지 김기사를 더 축하해주고 싶었다.


“아이 잘 키웠다.

그동안 당신 참 고생 많았다.”


그 말을 누가 해주지 않는다면,

나라도 밥심에 담아 전하고 싶었다.


오늘 내가 싼 도시락에는 그런 마음이 꾹꾹 담겨 있다.


효림이가 좋아하는 공부를 하면서 열정적으로 세상을 향해 나아가는 기쁨,

그리고 부모라는 이름으로 하루하루를 버텨온

김기사의 세월에 대한 존경.


오늘은,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