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도권을 건네는 용기

아버지의 마지막 사우나, 그리고 내가 내려놓은 것들

by 랑이네 글밥집

나는 요즘 ‘돌본다는 것’의 의미를 자주 다시 생각한다.

누군가를 끝까지 붙잡는 일이 정말 사랑일까.

그 질문의 시작에는 6년 전, 아버지의 마지막 퇴원이 있다.


그날 나는 아버지를 병원 밖으로 모시고 나온 것이 아니라,

사실은 내 불안을 끌고 나오고 있었다.


“항암치료 끝. 내일 퇴원.”


아버지에게서 온 이 짧은 톡은 선전포고처럼 느껴졌다.

의사가 보기엔 아직 집으로 갈 상태가 아니었지만,

아버지는 병실 천장만 봐도 숨이 막힌다며 기어코 가퇴원 서류에 서명하셨다.


이런 일이 서너 번 반복되자

내 안에서는 걱정을 넘어선 화가 치밀었다.

집에 가셔서 대체 뭘 하시겠다고 이렇게 고집을 부리실까.


하지만 솔직해져야 했다.

내가 화가 났던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아버지가 병원에 계셔야 내 몸과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집에 오시면 식사는 어쩌나, 숨은 제대로 쉬시나,

혹시 내가 없는 사이 쓰러지시면 어쩌나.

그 불안이 싫어서

나는 아버지의 ‘고집’을 탓하며

내 ‘편의’를 정당화하고 있었다.


그때, 내 마음을 멈춰 세운 문장이 하나 있었다.

조안 할리팩스가 『죽음을 명상하다』에서 했던 말이다.



의식적이고 책임 있는 보살핌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죽음의 과정에 있는 사람에게 주도권을 주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들을 마치 이미 목소리를 잃은 사람처럼 대하지만,
그들에게는 여전히 타고난 자연스러운 지혜가 있다는 것을 믿어주어야 합니다.



그 문장을 곱씹으며 현관문을 열었을 때,

아버지는 1미터도 채 못 걷고

거실 바닥에 주저앉아 가쁜 숨을 몰아쉬고 계셨다.

그 처절한 사투를 지켜보는 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그 순간 문득 깨달았다.

지금 이 순간 가장 고통스러운 사람은

내가 아니라 아버지라는 것을.


그리고 아버지는 그 고통을 감수하고서라도

자신의 삶을 스스로 결정할 권리를

행사하고 계신다는 것을.


그날 나는 더 이상 퇴원을 말리지 않기로 했다.

대신, 아버지가 원하시는 대로

주도권을 넘겨드리기로 했다.


아버지가 좋아하시는 돼지고기 김치찌개를 끓여 드리고

집 안을 정리하고 나서려는데

아버지가 조용히 물으셨다.


“성탄절에 김서방 올 수 있냐?”


“왜요? 데려올게요.”


“아니… 사우나를 가고 싶어서.”


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아버지가 그 긴 시간 병과 싸우며 버텨온 끝에,

고작 원하신 게 사우나 하나였다는 사실이

너무 소박해서, 너무 거창하지 않아서

그 마음을 한참 동안 이해하지 못하고

멈춰 서 있었던 것이다.


병원복을 벗고,

주삿바늘 자국 가득한 몸을

뜨거운 물에 잠시 담그는 일.

누군가의 부축을 받아서라도

‘환자’가 아니라

‘평범한 한 사람’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


그토록 힘든 시간을 지나온 사람이

마지막으로 바랐던 것이

그 정도였다는 게

오히려 더 마음을 먹먹하게 만들었다.


김서방은 기꺼이,

그토록 싫어하는 사우나에

병든 장인을 모시고 갔다.


그게 아버지의 마지막 사우나였다.


6년이 지난 지금, 나는 다시 확신한다.

그날 내가 아버지의 고집에 마지못해 굴복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의 생애 마지막 주도권을

존중해 드린 것이

참 다행이었다고.


돌본다는 것은

끝까지 내 방식대로 붙잡는 일이 아니다.

상대가 자신의 삶을 마지막까지 직접 지휘할 수 있도록

슬그머니 지휘봉을 건네주고,

나는 기꺼이 관객이 되어주는 일이다.


그 주도권을 건네는 용기는

사랑보다 더 큰 인내를 필요로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사랑하는 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존엄한 마지막 예의라는 것을.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아버지가

그토록 집으로 오고 싶어 했던 이유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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