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를 건져 올리는 붉은 국물

대한(大寒)의 추위를 녹이는 장칼국수

by 랑이네 글밥집

절기 ‘대한’의 기세가 유난히 매서운 날이었다.

소한 얼음 대한에 녹는다더니, 올해는 그 절기가 무색하게 이름값을 제대로 하려는 모양이다.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찬바람이 사람을 놓아주질 않는다.


그 추위와 하루 종일 사투를 벌인 김기사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왔다.

꽁꽁 언 몸을 겨우 지탱한 채 내뱉은 첫마디는 이거였다.


“입맛이 뚝 떨어졌네.”


동장군이 허기마저 얼려버린 모양이었다.


입맛은 죽었어도 취향은 살아 있다.

자타공인 면 러버를 위해 주방 불을 켠다.

이런 날엔 복잡한 위로보다 뜨끈하고 눅진한 국물 한 그릇이 먼저다.



오늘의 처방전은 장칼국수


고추장과 된장을 풀고, 고춧가루 한 큰 술.

보글보글 끓는 붉은 국물 사이로 면발이 숨을 쉰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그릇을 식탁에 올리자, 김기사가 마지못해 숟가락을 든다.


그리고 국물 한 숟갈.


얼음장 같던 얼굴에 아주 작은 균열이 생긴다.

뜨거운 온기가 목을 타고 내려가자 굳어 있던 미간이 풀리고, 창백했던 뺨에 혈색이 돈다.


크으, 살 것 같다.


그 한마디로 주방의 공기가 가라앉는다.

생각해 보면 참 묘하다.

세상의 거창한 위로나 대단한 성공보다,

때로는 김이 오르는 국수 한 그릇이 사람을 더 확실하게 구원한다.


동장군에게 얻어맞고 돌아온 하루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

내일 또 추위 속으로 걸어 들어갈 힘을 건네는 것.

그건 화려한 상차림이 아니라,

익숙하고 정직한 국물 한 대접이다.


별것 아닌 저녁 한 그릇이 쑥대밭이 된 마음을 정돈하고, 기어이 하루를 건져 올린다.


식탁 위에 번지는 온기 속에서 문득 한 구절이 떠오른다.


아직 봄이
저만치 있어도
내 마음속엔 앞질러
봄은 시작되었네.

- 정연복, 〈입춘의 사랑노래〉 중에서


대한의 위세가 아무리 대단해도 계절은 흐른다.

칼국수 그릇을 비워내며 “살 것 같다” 말하는 저 무뚝뚝한 사람도,

사실은 이미 봄 쪽으로 조금 기울어 있다.


오늘 우리 집의 겨울은

이 붉은 국물 덕분에

조금 더 견딜 만한 계절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