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에 꺼내 쓴 가을의 저축

겨울 가방에 슬쩍 밀어 넣은 어느 가을의 갈무리

by 랑이네 글밥집

​오븐에서 고소한 냄새가 올라온다.

이 냄새를 맡고 있으면 왠지 모르게 마음이 먼저 따뜻해진다.

지난가을의 흔적이 오늘 비로소 고소한 열기가 되어 집안을 채우는 중이다.



웃다가, 까다가, 또 웃다가
​그 가을.

남편 김기사가 포천의 단골 캠핑장에서 햇밤을 한 자루 가득 주워 왔었다.


지금은 문을 닫아버려 다시 갈 수 없는 그곳의 마지막 선물 같은 밤이었다.



​밤을 한 솥 가득 삶아놓고 둘이 나란히 앉아 영화 <극한직업>을 틀었다.

이미 몇 번이나 본 영화인데도 볼 때마다 웃음이 터졌다.

화면 속 배우들의 대사에 낄낄거리며 손으로는 부지런히 밤을 깠다.
​웃다가 까고, 까다가 또 웃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손끝은 어느새 까슬까슬해졌고, 거실 바닥에는 밤 껍질이 수북이 쌓여갔다. 그때 정성껏 까서 모아둔 그 노란 알맹이들을 오늘 다시 꺼냈다.



마음을 다져 넣는 시간
​설날 휴일.

잘 보관해 두었던 밤들을 오늘 다시 찌고 잔뜩 다졌다. 갓 쪄낸 밤의 포슬포슬한 온기가 손바닥에 닿는다. 서걱서걱 밤알이 다져지는 소리가 주방에 울린다. 그리고 반죽 속에 아낌없이 넣었다.

이름하여 ‘밤 듬뿍 스콘’.


​반죽을 빚고 오븐에 넣는 지금,

내 머릿속엔 그 가을 김기사와 밤을 주우며 웃던 소리가 겹쳐진다.

단순히 맛있는 냄새여서가 아니라, 지난 계절의 수고를 명절의 휴일에 다시 꺼내 다지는 마음.

누군가에게 먹이겠다는 그 마음이 온도로 전해지기 때문에 이토록 마음이 몽글거리는 모양이다.


노동의 증명
​평소 김기사는 내가 만든 빵이나 과자를 잘 먹지 않았다.

너무 ‘건강한 맛’이라며 맛없다고 고개를 젓던 사람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오늘은 자리에 앉아 벌써 세 개째 스콘을 집어 먹고 있다.


​옆에 있던 딸아이도 한 입 베어 물더니 눈을 동그랗게 뜬다.

“엄마, 여태 했던 스콘 중에 이게 최고로 맛있어!”


​그 가을, 허리가 끊어질 듯한 고통과 모기떼의 습격 속에서 밤을 주워온 아빠의 노동과, 그 밤을 다시 찌고 껍질을 까고 으깨어 스콘으로 빚어낸 나의 노동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김기사의 분주한 입과 딸의 찬사가 비로소 증명해 준다. 주방 가득 퍼지는 고소한 향기가 오늘따라 유독 달콤하게 느껴졌다.



말 대신 건네는 응원
​다 구워진 스콘을 식혀서 정성껏 포장한다.

다시 자취방으로 돌아가는 딸아이의 가방 구석에 슬쩍 밀어 넣으려 한다.


​"밥 거르지 말고 잘 챙겨 먹고 스콘도 친구들하고 나눠 먹어"



​무심한 듯 던지는 그 한마디에 다 담지 못한 말들이 스콘 속 밤 알갱이처럼 꽉 차 있다.

혼자 사는 방에서 끼니 거르지 말라고, 엄마 아빠가 깔깔거리며 깠던 설날 연휴의 기운을 먹고 힘내라고.


​말은 안 해도 엄마는 이런 걸로 마음을 보낸다.


오늘 딸의 가방은 조금 더 무거워졌고,

나의 마음은 그만큼 가벼워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