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완패, 저녁상에는 경칩 제철음식 보리새우미나리전
3월 경칩, 딸에게 지고 엄마에게 사죄하는 날
by
랑이네 글밥집
Mar 5. 2026
며칠 전, 딸아이와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다.
친구 공연을 보러 간다던 아이가 연락도 없이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걱정으로 새하얗게 지샌 부모의 마음과 달리, 딸은 무엇이 문제냐는 듯 담담했다.
그 태도에 결국 어제 큰 소리가 오갔고, 집 안에는 여전히 서늘한 냉기가 흐른다.
서운함 너머에서 자꾸만 피어오르는 얼굴
참 이상한 일이다.
분명 화가 나고 서운해서 얼굴도 마주하기 싫은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도 모르게 딸을 위해 기도를 한다.
다음 주 어머니 생신 선물로 드릴 옷을 고르러 어머니의 삼십 년 단골 옷집에 나갔다가도, 예쁜 옷만 보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춘다.
“이건 우리 딸한테 잘 어울리겠네.”
화가 나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아이의 안위를 살피고,
좋은 것을 입히고 싶어 하는 이 모순적인 감정이다.
그 복잡한 마음 끝에서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졌다.
“아, 우리 엄마도 그러셨겠구나.”
비로소 이해하게 된 엄마의 침묵
철없던 시절, 내가 엄마에게 무례하게 굴고 못된 말을 퍼부었을 때도
엄마는 돌아서서 내 밥때를 걱정하셨을 것이다.
내가 씩씩거리며 방문을 걸어 잠갔을 때도
엄마는 문밖에서 내가 잠은 잘 자는지 조심스레 귀를 기울이셨겠지.
자식이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않아 괘씸하고 속이 상하면서도,
결국은 자존심 다 버리고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부모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부모라는 이름은
자식에게 지는 법을 배우는 자리라는 것을 말이다.
경칩, 봄을 선물하고 돌아오는 길
마침 오늘은 개구리가 잠에서 깬다는 경칩이다.
나는 엄마가 좋아하시는 스타일로,
올봄에 편안하고 예쁘게 입으실 옷을 여러 벌 골라 샀다.
이 옷을 입고 엄마가 봄날의 햇살을
마음껏 만끽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꾸만 서글픈 확신 하나가 고개를 든다.
어쩌면 자식은 죽었다 깨어나도
부모의 사랑을 다 헤아릴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자식은 부모가 준 사랑을 다 헤아릴 수도,
그 만큼을 고스란히 되돌려 줄 수도 없는 '영원한 사랑의 빚쟁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부모는 늘 부족했다 말하고,
마지막까지 무엇을 더 줄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래서 사랑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을 ‘내리사랑’이라 부르나 보다.
거스르려 해도 거스를 수 없는 그 거대한 물줄기 속에
나도, 나의 엄마도, 그리고 나의 딸도 함께 흐르고 있다.
오늘도 완패, 하지만 향긋한 저녁
내리사랑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백전백패라는 사실도 기꺼이 수용하며,
오늘도 나는
완패를 선언한다. 끙.
오늘 저녁 밥상에는
제철 음식인 보리새우미나리전을 부쳐 올렸다.
지글지글 전 익는 소리와
향긋한 미나리 냄새가
냉랭했던 공기를 조금씩 녹인다.
딸아,
너도 나도 이 제철 음식 먹고
기지개도 켜고,
쪼그라든 마음도 활짝 펴자.
그렇게 새봄 기운을 맞이하자.
엄마의 완패를 축하하며
우리 미나리전이나 같이 먹자꾸나.
keyword
사랑
엄마
제철음식
작가의 이전글
오십에 불린 이름, “애기야 밥 먹고 가라”
엘보는 파업 중, 하체는 열일 중
작가의 다음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