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완패, 저녁상에는 경칩 제철음식 보리새우미나리전

3월 경칩, 딸에게 지고 엄마에게 사죄하는 날

by 랑이네 글밥집

며칠 전, 딸아이와 한바탕 폭풍이 지나갔다.
친구 공연을 보러 간다던 아이가 연락도 없이 밤늦도록 귀가하지 않은 것이 화근이었다.

걱정으로 새하얗게 지샌 부모의 마음과 달리, 딸은 무엇이 문제냐는 듯 담담했다.
그 태도에 결국 어제 큰 소리가 오갔고, 집 안에는 여전히 서늘한 냉기가 흐른다.



서운함 너머에서 자꾸만 피어오르는 얼굴

참 이상한 일이다.

분명 화가 나고 서운해서 얼굴도 마주하기 싫은데,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나도 모르게 딸을 위해 기도를 한다.

다음 주 어머니 생신 선물로 드릴 옷을 고르러 어머니의 삼십 년 단골 옷집에 나갔다가도, 예쁜 옷만 보면 나도 모르게 발걸음이 멈춘다.

“이건 우리 딸한테 잘 어울리겠네.”

화가 나 있으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끊임없이 아이의 안위를 살피고,
좋은 것을 입히고 싶어 하는 이 모순적인 감정이다.

그 복잡한 마음 끝에서 문득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쳐졌다.

“아, 우리 엄마도 그러셨겠구나.”


비로소 이해하게 된 엄마의 침묵

철없던 시절, 내가 엄마에게 무례하게 굴고 못된 말을 퍼부었을 때도
엄마는 돌아서서 내 밥때를 걱정하셨을 것이다.

내가 씩씩거리며 방문을 걸어 잠갔을 때도
엄마는 문밖에서 내가 잠은 잘 자는지 조심스레 귀를 기울이셨겠지.

자식이 먼저 미안하다고 사과하지 않아 괘씸하고 속이 상하면서도,
결국은 자존심 다 버리고 먼저 손을 내미는 사람이 부모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 것 같다.

부모라는 이름은
자식에게 지는 법을 배우는 자리라는 것을 말이다.


경칩, 봄을 선물하고 돌아오는 길

마침 오늘은 개구리가 잠에서 깬다는 경칩이다.


나는 엄마가 좋아하시는 스타일로,
올봄에 편안하고 예쁘게 입으실 옷을 여러 벌 골라 샀다.

이 옷을 입고 엄마가 봄날의 햇살을
마음껏 만끽하셨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담아서.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자꾸만 서글픈 확신 하나가 고개를 든다.

어쩌면 자식은 죽었다 깨어나도
부모의 사랑을 다 헤아릴 수 없는 존재인지도 모르겠다.

자식은 부모가 준 사랑을 다 헤아릴 수도,

그 만큼을 고스란히 되돌려 줄 수도 없는 '영원한 사랑의 빚쟁이'인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부모는 늘 부족했다 말하고,

마지막까지 무엇을 더 줄 수 있을지 고민한다.

그래서 사랑이 위에서 아래로 흐르는 것을 ‘내리사랑’이라 부르나 보다.

거스르려 해도 거스를 수 없는 그 거대한 물줄기 속에
나도, 나의 엄마도, 그리고 나의 딸도 함께 흐르고 있다.


오늘도 완패, 하지만 향긋한 저녁

내리사랑이라는 거부할 수 없는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더 많이 사랑하는 쪽이
언제나 백전백패라는 사실도 기꺼이 수용하며,

오늘도 나는
완패를 선언한다. 끙.

오늘 저녁 밥상에는
제철 음식인 보리새우미나리전을 부쳐 올렸다.


지글지글 전 익는 소리와
향긋한 미나리 냄새가
냉랭했던 공기를 조금씩 녹인다.

딸아,

너도 나도 이 제철 음식 먹고
기지개도 켜고,
쪼그라든 마음도 활짝 펴자.

그렇게 새봄 기운을 맞이하자.

엄마의 완패를 축하하며
우리 미나리전이나 같이 먹자꾸나.

작가의 이전글오십에 불린 이름, “애기야 밥 먹고 가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