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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데로샤 May 20. 2021

부처님 수요일에 오신 날

순천 송광사에서의 반나절

올해는 부처님이 수요일에 오셨다. 직장인에게 빨간 날은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만 주말과 이어진 월금도 아니고 징검다리 휴일도 아니고 한 주의 정가운데 수요일은 다소 애매한 날이긴 하다. 타지에서 근무 중인 나는 이번 부처님 오신 날에는 집에 가지 않기로 했다. 간다 해도 가족과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짧을뿐더러 오가는 비용도 그렇고 무엇보다 무리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집에 가는 대신 근교에 있는 사찰에 가기로 했다. 전라도만 해도 아름답고 유서 깊은 절이 얼마나 많은가! 해남 대흥사나 미황사를 갈까, 화순 운주사를 갈까, 구례 화엄사를 갈까, 순천 송광사나 선운사를 갈까 고민하다가 송광사를 목적지로 정했다. 송광사는 한국의 삼보(三寶) 사찰 가운데 승보(僧寶) 사찰로 유명한 곳이다. 회사 선배가 순천 사는 분과 결혼을 해서 집들이 겸 놀러갔다가 송광사를 들렸던 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으니 10여 년 만의 재방문이다.


날씨가 맑았다. 아침 9시경 일찍 출발해서 그런지 가는 도로는 한산했다. 10시에 도착하니 주차장 자리가 여유 있었다. 식당 아주머니가 다가와 절까지 15분 정도 걸린다고 알려주며, 내려오는 길에 자기네 식당에서 식사하고 가라고 했다. 며칠 전 요통이 도져서 힘차게 걷기는 힘들고 천천히 한 발 한 발 내딛듣이 느긋하게 올라갔다. 아름드리 숲길을 지나고 마침내 일주문에 다다르니 예전에 보았던 가람 풍경이 떠오르면서 반갑게 느껴졌다.

송광사 고향수

먼저 고향수가 보였다. 보조국사 지눌이 송광사에 처음 올 때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여기에 꽂았는데 지팡이에서 잎이 피어 자라다가 스님께서 입적하니 같이 말라버려 고향수(枯香樹)로 불린다고 했다. 예전에 신라시대 최치원이 지팡이를 땅에 꽂았는데 이 나무가 살아나 거목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거의 삐까삐까한 수준의 이야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웅보전을 향해 걸어 들어가니 마당 가득 연등이 눈에 띄었다. 연등 아래 그늘에 배치된 의자에 신도들이 앉아법요식을 듣고 있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어른, 아이 등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이 보였다. 주변으로 내방객을 위해 일하는 봉사자들이 보였다. 연등에 가려 대웅보전 안이 보이지 않아 나는 절을 크게 돌며 건물 하나하나를 구경했다.

송광사 국사전


대웅보전 우측 뒤편에 예사롭지 않은 건물이 하나 보였다. 국보 56호로 지정된 국사전이었다. 나라를 빛낸 큰 스님 16분의 초상화를 모신 건물이다. 내가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들이밀고 구경을 하니 안내하는 분께서 이 건물은 일년 중 딱 하루 부처님 오신 날만 개방하는 곳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 절을 해도 괜찮다고 해서 안으로 들어가 삼배를 하고 나왔다.  


산신각은 1년에 두 번 개방하는데 그 길을 따라 올라가면 절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오는 장소가 있다고 하여 설명 따라 올라가 봤다. 정말 하늘과 산과 사찰 지붕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었다. 휴대폰을 켜서 사진을 찍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절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대웅보전 마당 쪽으로 내려왔다. 절에서 준비한 음식(주먹밥, 생수, 뻥튀기)을 무료로 제공하고 있어 나도 등산가방에 한 봉지 챙겼다.


곧이어 나는 성보박물관으로 이동했다. 우리 나라 사찰 중에서 가장 문화재가 많은 절이 송광사란다. 이 곳에서도 입에서 감탄이 절로 튀어나오는 작품 하나를 볼 수 있었다. 국보 42호 목조삼존불감이었다. 크기도 13cm 밖에 안 되는 조그만 나무함 속에 정교하게 삼존불을 새겨 놓은 걸 보니 우리 민족의 손기술이 섬세하고 대단하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진출처: 송광사 홈페이지


그렇게 성보박물관까지 둘러보고 나서 나는 박물관 앞 흐르는 물 위에 자리를 잡고 맑은 물소리를 들으며 주먹밥을 먹었다. 당초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가 산채비빔밥을 한 그릇 먹을 계획이었는데, 절에서 준비해 준 음식으로 점심 요기를 채웠다. 그리고 챙겨간 책 <나를 살리는 글쓰기 / 장석주 지음>을 찬찬히 몇 장 읽고 내려왔다.


직장인의 삶은 하루하루가 분주하게 돌아가는데, 어제는 숲 속 산사에 들어와 있어서 그런지 참 한가로이 하루를 보냈다. 푸르름을 많이 봐서 그런지 눈도 시원해졌다. 다시 주차장으로 내려오니 빈 공간 하나 없이 차들로 빼곡했다. 산채비빔밥은 다음에 먹기로 했다. 일주일 중 공휴일이 수요일이면 어떤가. 월화에 쌓인 피로 수요일에 풀고 목금 다시 달리고 토요일을 맞이하면 되는거지. 그렇게 나는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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