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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포데로샤 Apr 26. 2021

메일은 사랑을 싣고

회사메일은 금세 용량이 찬다. 잘 비우지 못하는 내 습성 탓도 있다. 그래서 가끔 한 번씩은 메일을 정리해 줘야 한다. 오늘이 그날이다. 정리하려고 메일함을 열었다. 카드사 이용대금 명세서, 상품 발송내역이 먼저 나를 맞이한다. 한 번 열어보고 삭제. 쥐꼬리만한 배당금 안내 메일도 삭제. 업무를 위해 스스로 업로드한 용량 큰메일도 삭제다. 그러고 나니 조금 여유가 생겼다.


그래 봤자 용량이 확확 줄지는 않는다. 시간이 흘렀어도 못 지우는, 아니 지우기 아까운 메일들이 있기 때문이다. 해외연수 갔다가 친절하게 대해준 외국인 할머니와 주고받은 메일, 존경하는 교수님과 주고받은 메일, 아내가 보낸 장문의 편지, 나중에 써 먹으려고 올려둔 자료 등등.. 내용이야 어찌 됐건 지워버리면 그 순간 휘발되어 사라지기에 왠지 삭제 버튼을 누르고 싶지 않다. 


오늘도 그렇게 소중한 메일들을 남겨두면서 화면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목록을 하나하나 훓었다. 그런데 묻혀 있던 메일 하나가 내 눈에 쏙 들어왔다. 바로 대학교 때 친하게 지냈던 과친구가 보낸 메일이었다. 수신일이 2009년 4월이었으니 서로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산 지가 꽤 오래되었다. 


나름 사정이 있었다. 친구가 해외로 떠났기 때문이다. 친구는 대학시절 호주에서 어학연수를 했는데 현지인 여성을 친구로 만났다. 한국으로 돌아와서도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 이어졌고, 두 사람은 국제커플이 되었다. 졸업하고 대기업을 다녔는데 휴가 때면 두 사람은 중간지점에서 만나 데이트를 했다. 그러더니 친구는 그 나라에 가서 살겠다며 회사를 박차고 외국으로 떠났다. 친구가 떠나고 자연스럽게 소식이 끊어졌다.


그 친구가 한국에 있을 때 보냈던 메일이 오늘따라 내 눈에 쏙 들어오다니. 그걸 보니 마음 한편에 그리움이 솟았다.


'이놈아 잘 살고 있을까?'

'메일주소 보니 hotmail이던데 요즘은 이거 잘 안 쓰지 않나?'


그렇게 혼잣말을 하면서 나는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메일을 쓰고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잘 지내냐... 너의 소식이 궁금하다... 이 메일이 잘 전달되면 좋겠다... 블라블라블라...' 망망대해에 유리병 편지를 띄우는 기분이랄까. 연락이 되면 좋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하는 심정으로 보내 놓았다. 


그런데 몇 시간 후에 그 친구의 답신이 왔다. 살아 있었다. 지구 반대편에 살고 있었다. 가끔 내 생각을 하면서도 연락을 하지 못했다는 친구. 어느새 아이도 둘이나 생겼고, 현지에서 전공을 살려 일하고 있다고 했다. 연락처를 남기면 전화를 하겠다고 해서 내 휴대폰 번호를 남겨 두었다. 


살다보면 누군가 그리워지는 날이 있다. 그리고 먼저 연락하고 싶은 날이 있다. 오늘이 나에게 그런 날인가 보다. 친구가 보냈던 메일을 못 봤거나 지웠거나 보고도 막연하게 머릿속으로만 친구를 떠올렸다면 서로 이렇게 다시 연결되는 일은 없었겠지. 어찌됐건 오늘 메일을 보내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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