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데로샤 Sep 09. 2021

달력 속 적십자 간호복을 입은 여인

독립운동가 김원경은 왜 1920년 1월 달력 사진에 등장했을까?

8월 초였다. 직장상사가 페이스북에 올린 사진 한 장이 내 눈길을 사로잡았다. 사진 속에는 태극기와 적십자기가 있고 그 아래 대한적십자사 영문명(Korean Red Cross)이 쓰여 있으며 간호사 복장을 한 여성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여성의 왼편으로 필기체로 큼지막히 쓴 글귀가 보인다. 뭐라고 쓴 거지? 대충 훑어보았는데 한눈에 곧바로 들어오지는 않았다. 다시 차근히 읽어보았는데 결의가 담긴 비장한 내용이라 놀랍기도 하고 마음이 무겁기도 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빗발갓흔 탄환중에

귀신갓치 단니면서

압흔상처 처매주고

슯흔영혼 위로한다


1920년 1월 대한적십자회 기념 달력


위 사진은 대한적십자회 간호원 양성소 교육 홍보를 위해 제작된 <1920년 1월 대한적십자회 기념 달력>이었다. 출처는 대한간호협회가 지난 8월 중순 광복절을 맞아 발간한 <독립운동가 간호사 74인>이라는 책이었고, 사진 속 주인공은 독립운동가 김원경 선생이었다. 독립운동가 김원경에 대해 인터넷으로 검색하여 다른 사진과 기사를 찾아볼 수 있었다. 그중에는 1922년 1월 러시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원동민족혁명단체대표회에서 봉오동 전투의 영웅으로 올해 고국으로 유해가 돌아온 홍범도 장군과 한 공간에서 있었던 영상 사진도 찾아볼 수 있었다.


홍범도 장군 두 줄 앞에 앉아 있는 독립운동가 김원경


그렇다면 독립운동가 김원경은 왜 1920년 1월 적십자 간호복을 입고 달력의 모델이 되었을까. 나는 그걸 알아보기로 했다. 그러려면 과거 대한적십자사의 역사를 들여다봐야 했다.


대한적십자사는 1905년 10월 27일 상병자를 구호하고 대한제국이 독립된 국가임을 대외적으로 알리기 위해 고종황제 칙령 제47조에 의해 설립되었다. 지금은 대한적십자사가 재난 및 평시구호, 사회봉사, 혈액, 공공의료 등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지만 초기의 적십자는 적십자병원과 거의 동일한 의미라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05년 11월 을사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국운이 쇠퇴해갔고, 대한적십자사는 창립 4년 만인 1909년 7월 일본에 의해 강제 병합되어 폐사되는 비운을 겪게 되었다.


그러나 1919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나고, 그 직후인 1919년 4월 13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 상해에서 조직되면서 대한적십자회는 부활하게 되었다. 임시정부를 수립한 민족지도자들은 조국의 광복을 위해서는 일제와의 무력투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전상병 구호를 위한 독립군의 의료보조기관으로 적십자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이에 임시정부 내무부 총장인 도산 안창호와 의사 출신의 이희경(대한적십자회 초대 회장) 등이 중심이 되어 발기를 서둘러 1919년 8월 29일 대한적십자회 설립을 공포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적십자회 주요 사업은 중국, 한국, 미국, 러시아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적십자회비를 기부받아 첫째 독립군 부상자 치료를 위한 적십자 간호원을 양성하는 일, 둘째 독립군과 가족의 생계를 돕는 일, 셋째 적십자병원을 세워 상해 거류 동포를 진료하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동포들의 호응으로 1919년 9월에는 적십자회원이 720명(상해 회원 152명 포함)이 되었고, 11월에는 회원이 999명으로 늘어났다고 한다. 이 중에는 대한적십자회를 도우려는 미국인, 영국인, 프랑스인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1919년 11월 23일부터 12월 14일까지 병원 설립과 간호원 양성을 위한 공개적인 회원모집 <대한적십자회원 대모집 경쟁회>가 개최되었다. 1등은 현영운 2등은 김보연, 3등은 사진 속 주인공인 김원경 독립운동가가 차지하였다고 한다. 이 당시 적십자회에서는 회원모집을 보다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임시정부 적십자회 표어가 담긴 달력과 배지를 만들어 동포들에게 배부하였다. 즉, 1920년 달력 속에서 봤던 그 문구가 바로 임시정부 적십자회의 표어였고, 김원경 독립운동가가 달력 속에 등장한 이유를 추측해 볼 수 있다.


1920년 1월 적십자 회원수가 1946명(외국인 154명 포함)에 달하고 재정이 다소 견실해지면서 1920년 1월 31일 상하이 대한적십자사회 총무소에서 드디어 <적십자간호원 양성소> 개학식을 가졌다. 이 개학식에 당시 임시정부 국무총리 이동휘, 내무부총장 이동령 등이 참석하여 적십자인의 노고를 치하하였다. 이 총리는 치사에서 "특히 이번에 개설된 간호원 학교가 많은 간호원을 양성하여 독립전쟁 시에 유감이 없기를 바란다."며 적십자인들의 맡은 바 사명을 꾸준히 다하여 줄 것을 강조했다고 한다.


간호원 양성소의 수업기간은 3개월이었고 매주 18시간의 수업을 받았다고 한다. 전시에는 의사가 부족한 부족한 것을 감안하여 간호원들로 하여금 의사 부족을 메워보려는 의도로 학과목은 간호학뿐만 아니라 의학과목도 포함되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전시 상황에 곧바로 투입할 인력을 배출하려는 목적이어서 지금처럼 몇 년씩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으리라 짐작된다.


1기에 입소한 사람들은 모두 중등 이상의 교육을 받은 사람들로 남자가 3명, 여자가 10명이었다. 내가 근무하고 있는 적십자 혈액원에도 최근 들어 남자 간호사가 지원해 조금씩 늘어나는 추세인데, 이미 100년 전에 간호원이 되기 위해 지원한 남성 3명이 있었다. 그들은 간호사가 되고 싶어서이기도 했겠지만 독립운동과 적십자운동의 한 방식으로 참여하고 싶었던 것이 더 크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김창세 박사는 도산 안창호 선생의 동서이자 최초의 보건학 박사였다고 한다. 그는 임시정부 대한적십자회 내에서 독립운동에 앞장설 적십자 간호원들을 가르쳤다고 한다 / 동아사이언스


간호원 양성소 교수진은 김창세, 정영준, 곽병규, 김성겸 등 모두 세브란스연합의학교를 졸업한 의사들이 맡았다고 한다. 그러나 큰 기대를 안고 문을 연 간호원 양성소는 제1기생을 배출하고는 계속 이어가지 못했다. 2기 간호부 양성을 추진하였으나 교육에 지속적으로 투자할 재정상황도 못 되었을뿐더러 간호원 양성소에 지원하려는 학생들도 기대만큼 모집되지 못했으며 교수 중 일부가 다른 지방으로 가게 되기도 하여 교육을 중단하게 되었다. 이후 간호원 양성은 중단되었지만, 적십자회 활동은 동포들을 돕는 구제회 활동으로 퍼져나갔다고 한다.  


사진 속 적십자 간호복을 입은 여인에 대한 궁금증에서 시작하여 100년 전 역사적 상황과 적십자활동을 살펴보다 보니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의 선을 넘어 보고 온 느낌이다. 가슴이 뭉클하고 눈물이 오른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았던 100년 전에도 지식인 간호사가 있었고, 민족의식과 항일정신 그리고 적십자정신으로 독립운동에 주도적으로 뛰어든 전문직 여성이 있었다. 여기에 소개된 독립운동가 김원경 외에도 수많은 독립운동가 들이 존재했을 것이고, 독립운동가 발굴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을 것이다. 그분들의 희생과 헌신이 오래도록 기억되고 보답받았으면 좋겠다.


1898년 11월 13일 태어난 김원경은 이화학당을 졸업하고 1919년 3. 1 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 대조선독립애국부인회 특사로 상해로 파견되었다. 1922년 모스크바극동인민대표 회의 한국대표로 독립을 호소했다. 부군은 독립운동가 최창식이다. 1930년 4월 최창식이 일본 경찰에게 체포돼 1933년 출옥했지만 고문의 후유증으로 거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 김원경이 미용실을 운영하며 생계를 이어갔다고 한다. 최창식이 사망하는 1957년까지 상해에서 거주했고 이후 마카오, 홍콩 등을 거쳐 1960년 미국 보스톤으로 이주하였으며, 1981년 11월 23일 사망하였다. 정부로부터 196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으며, 남편 최창식과 함께 현재 국립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고 한다.

 

자료출처(인용): 한국적십자운동 100년, 독립운동가 간호사 74인, YTN, 재외동포신문, 동아사이언스



매거진의 이전글 1980년 5월 적십자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