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후반 <이경규가 간다>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심야 시간대에 도로에 잠복하고 있다가 교통수칙을 준수하는 차량에게 냉장고 한 대를 주는 공익 프로그램이었다.
인적이 뜸한 새벽, 차들은 빨간불을 무시하고 지나갔다. 새벽 4시 티코 한 대가 아무도 보지 않는데도 신호와 정지선을 지켰다. 촬영진은 감격에 겨워 달려갔다. 창문을 내리니 차 안에는 장애인 부부가 타고 있었다. 이경규는 운전자인 남편에게 “왜 신호를 지키셨나요?”라고 질문을 했고, 운전자 남편은 다소 어눌하지만 모두가 들리게 이렇게 답했다.
“내가.... 늘... 지켜요.”
양심냉장고 1호 주인공 L씨가 탄생한 순간이었다. 이 영상을 볼 때마다 '당연한 얘기를 당연하게 하는데도 왜 이리 특별하지'라는 생각이 들면서 스스로를 돌아보게 된다.
이 영상을 다시 떠올리게 된 건 2017년 8월 청렴감사팀에서 근무를 시작하면서였다.
적십자사는 구호, 봉사, 기부, 헌혈, 의료활동을 주로 하는 비영리단체이면서 공공기관이기도 하다. 그렇다 보니 매년 정부에서 실시하는 청렴 및 부패방지 관련 평가를 받는다. 나는 여러 평가 중 부패방지시책평가 업무를 맡게 되었다.
업무를 맡은 내 심정은 ‘답답’했다. 감사라는 이름도 부담스러운데, 그 앞에 청렴이란 두 글자가 더 붙으니 솔직히 숨이 턱턱 막혔다. 분명 내가 할 일은 정해져 있었고, 앞사람을 따라 하면 되었다. 하지만 일에 앞서 청렴이 무엇인지 개념이 서야 내 일이 제대로 진행될 것 같았다. 그래야만 직원들이 함께 공감하는 과제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깐.
그렇게 고민하다 떠올린 것이 이경규의 <양심냉장고> 였다. 어떤 일은 세계 최고, 세계 최초, 초일류, 일등을 목표로 삼고 달려가야 하는 반면에, 어떤 일은 잘하려고 하기보다는 가장 기본을 준수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는가 라고 생각했다. 가장 기본을 지키는 게 '청렴'이지 않을까 하면서.
맞는지 어쩌는지 일은 조금 선명하게 다가왔다. 그렇게 나는 우리가 하고 있는 고유한 업무에서 기본에 충실해야 할 부분에 초점을 맞춰 계획서를 만들어갔다. 예를 들어 기부금으로 운영되는 단체이다 보니 기부금 수입과 지출을 투명하게 관리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음을 강조한다든지.
그렇게 23개의 과제를 만들어 2018년 계획서를 짰고 사업을 전사적으로 추진하였다. 비록 최종보고서 제출을 한 달 앞두고 부서를 옮기는 바람에 내 손으로 마무리하지는 못했지만 남은 동료들이 잘해줘서 최고등급 평가를 받았다. 덕분에 나도 주변에서 감사인사를 받았다.
하지만 단기적인 평가에서 좋은 성과를 거두는 것과 모두가 함께 문화를 만들어가는 것은 다른 차원이란 생각이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필요한 모든 것들은 유치원에서 다 배운다고 하는데, 우리는 일상에서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것들이 너무 많다.
얼마 전 유치원을 다니는 여섯 살 딸아이와 함께 편의점에 갔었다. 편의점은 큰 사거리를 건너서 가야 했다. 아이는 손을 들고 길을 건넜다. 내가 아이에게 말했다.
"신호등이 파란불로 바뀐 뒤에 길을 건너도 반드시 좌우를 살피면서 가. 운전자 중에는 분명 신호를 잘 지키는 사람도 있지만 위반하는 사람도 있고 실수하는 사람도 있으니깐. 그것까지 조심해야 한다."
내 말을 듣던 중에 배달 오토바이 한 대가 굉음을 내며 정지신호를 무시한 채 사거리를 내 달렸다. 우리 둘은 자연스레 그 소리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빠, 저 오토바이처럼 말이지.” 아이는 그 순간 아빠의 말을 이해한 것처럼 보였다.
나도 간혹 선을 어긴다. 급한 마음, 편의주의 때문이다. 남한테 뭐라 할게 뭐 있나. 내 기본만 잘하면서 살고 싶은데 그 기본을 지키는 것이 아직도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