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내 소논문 공모전 수상에는 실패하였지만, 자신감이 남았다.
나는 경영학부를 졸업했다. 인문대학이나 사회과학대학을 다닌 친구들은 졸업논문을 썼다고 들었는데, 경영대 학생들은 시험을 쳐서 졸업을 했다. 그래서 나는 논문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대학을 마쳤다.
시간이 흘러 2013년 초 대학원을 다니는 것도 아닌 내가, 그것도 회사에서, 논문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일이 있었다. 논문이라고 하기에는 거창하고, 정확히 말하자면 소논문이다. 회사에서 직원을 대상으로 소논문 공모전을 개최한 것이다. 무심히 공고를 읽어 내려가다가 내 시선이 한 곳에서 멈췄다.
'최우수상 수상자에게는 해외연수 기회 제공’
해-외-연-수. 아~~ 구미가 당겼다. 다른 곳도 아니고 적십자운동의 발상지인 스위스 제네바와 이탈리아 솔페리노를 탐방시켜 준다는 것이 아닌가.
적십자는 스위스 사람 장 앙리뒤낭의 아이디어에서 시작되었고, 그 나라 사람들이 초기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조직이어서 스위스에 국제본부가 있다. 그래서 스위스와 이탈리아를 가 본다는 것은 마치 성지순례를 다녀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적십자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은 꼭 가 보고 싶은 곳. 나는 이번 공모전을 기회로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래. 도전하는 거야'
마음은 이미 스위스로 향하는 비행기 티켓을 끊은 것 마냥 들뜨기 시작했다. 하지만 문제는 학부 때도 소논문 한 번 써 본 적이 없었다는 것. '워~~워~~' 들뜬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가 처한 상황을 냉정하게 되짚어봤다. 논리적인 글을 그동안 안 써 본 상태에서 자칫 분량만 채우려 하다가는 문제의식도 없고 내용도 짜깁기밖에 안 될 것 같았다.
그래서 대학시절 교양과목 교수님이신 철학박사 K교수님께 S.O.S를 쳤다. (대학 4학년 1학기 때 이 분의 철학수업을 듣고 완전 매료돼 2학기까지 총 9학점의 철학수업을 K교수님께 들었다. 그리고 졸업 후에 K교수님을 내 결혼의 주례 선생님으로 모셨다). K교수님께 내가 생각하는 주제가 과연 논문이 될 수 있는지 아니면 단순한 주장에 그칠지 그 얼개를 메일로 보내서 의견을 여쭤봤다.
내가 생각한 주제는 회사와 관련된 법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 사는 법적 지위를 갖고 있는 기관이어서 그 시대에 맞는 지위를 갖추기 위해선 조직법의 정리와 발전이 시급하다는 내용이었다. K교수님은 주제가 참 좋다고 하시면서, 법이 광범위해서 그걸 모두 다루려면 소논문이 아니라 <용역연구>가 되겠다고 하셨다. 그러시면서 일부 내용을 세부적이고 집중적으로 다루고, 미국, 일본, 독일 등 다른 나라 적십자의 규정과 비교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주셨다.
무엇을 집중적으로 다루지? 고민을 거듭하다가 적십자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활동하고 참여하는 조직이 있을까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오프라인 회원도 많고, 사업도 다양하며, 최근에는 온라인으로도 회원에 가입하고 있는데 반해 회원에 대한 규정은 처음 만들어진 이후 한번도 바뀐 적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회원제도에 대해 한번 써 봐야겠다고 착안했다. K교수님도 잘 생각했다고 말씀해 주셨다.
해외자료가 필요했다. 국제협력팀에서 미국, 일본, 핀란드적십자사 등 해외 적십자의 정관을 받아서 우리의 회원제도와 비교해 보았다. 한국적십자운동에 관한 연감도 쭉 훑어보면서 1905년 창립 이후 적십자 회원의 역사를 정리해 갔다. 스스로 하나씩 찾아가며 자료를 정리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공부가 되었다. 논문의 A-B-C도 모르던 내가 두 달여를 골몰하며 노력한 결과, 부족하지만 A4 12페이지의 소논문을 처음으로 쓰게 되었다.
어쨌든 완성했다는 뿌듯함이 마음속에서 차올랐다. 나는 K교수님에게 이 논문을 최종적으로 검토받고 공모전에 제출하였다. 그리고 스위스에 한 발짝 더 다가갔다는 자뻑 속에 푹 빠져 있었다.
드디어 공모전의 결과가 발표되는 운명의 날이 다가왔다. 애타면서도 기다려지는 순간이었다. 두구두구두구. 나의 소논문은 '최우수상'..........과는 거리가 먼 '가작'으로 선정되었다. 꿈에서 깨어나는 시간이었다.
한 여름 더위만큼 뜨거웠던, 스위스를 향한 나의 도전은 이렇게 끝이 났다. 대신 회사에서는 나에게 제주도 왕복 항공권 두 매를 보내 주었다. 그게 어디이던가. 나는 그 항공권 티켓으로 와이프와 함께 제주도 여행을 떠났고 둘만의 행복한 시간을 보냈다.
얼마 전 브런치에서 한 달에 몇 편씩 소논문을 쓴다는 어느 대학원생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서 문득 나의 불후의 가작(?)이 떠올랐다.
지내면서 내가 또 논문을 쓰는 날이 올까. 나는 이 한 편의 소논문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분명 너무나 힘들었다. 멘땅에 헤딩하듯 시작한 일이었으니깐. 그래도 나는 그 과정에 충실하였고, 충분히 즐겼다. 그랬더니 '오호, 이걸 내가 했어'하는 근자감(근거 있는 자신감)과 결과물이 남았다.
‘회사 다니면서 논문 써 봤어?’
‘난 써 봤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