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포데로샤 Jun 01. 2020

내가 증권사리포트를 읽었던 이유

나의 적십자 다이어리

‘직장인의 흥망성쇠가 보고서에 달렸다’     


<대통령의 글쓰기>로 유명한 강원국 작가가 쓴 또 다른 책 <회장님의 글쓰기>에 나오는 소제목이다. 사실 나는 <대통령의 글쓰기>보다 <회장님의 글쓰기>가 훨씬 재밌었다. 나는 엄연히 직장인이기 때문이다. 이 책은 글쓰기뿐만 아니라 직장상사의 심리, 소통, 관계 등 보다 나은 직장생활을 하기 위해 필요한 부분을 나에게 일러준 책이었다.    


글쓰기는 직장인에게, 특히 사무직에게 있어 숙명과도 같은 것이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나는 어떤 종류의 글들을 써봤을까 떠올려봤다. 기안문, 보도자료, 기고문, 연설문, 기획서, 제안서, 사업보고서, 감사보고서, 매뉴얼, 지침, 국감 답변서 등 종류도 다양했다. 잘 쓴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맡은 글에 있어서는 내 글이 기록으로 남을 것이고 후배들도 볼 것이라는 생각으로 책임을 다해 글을 썼다고는 말할 수 있다.

      

좋은 글을 쓰려면 많이 써 보기도 해야겠지만 또한 많이 읽어보라고도 한다. 그나마 내가 지금까지 꾸준하게 하고 있는 것이 책 읽기와 신문 읽기여서 다행스럽다. 최근에는 브런치의 좋은 글을 보면서 많이 배운다. 이밖에도 보고서를 쓸 때는 정부부처나 타 공공기관의 보고서를 참고할 때가 많다. 생각해 보니, 한때 뭐 이런 것까지 참고했느냐고 할 만한 것도 있었다. 바로 ‘증권사리포트’였다.      


감사실에 근무할 때였다. 2014년 신임 실장님이 부임하셨다. 이전 실장님은 주로 감사원이나 타 공공기관에서 오셨는데, 민간기업 출신 실장님이 처음으로 오셨다. 그는 금융권에서 정평이 난 인물이었다. 보고서의 완결성을 중시하고, 숫자에 빠르며, 1원이라도 돈이 맞지 않는 것을 용납 않는 철저함이 있었다. 변화의 시작일까. 그런 변화를 느끼는 데에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감사업무는 조사하고 정리해서 보고하는 게 일이다. 보고서에는 사업에 대한 평가 외에도 재무상태, 손익 현황 등 경영상태를 보여주는 지표들이 많다. 그래서 숫자를 비교 분석하고 끝까지 숫자가 틀리지 않았는지를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신임 실장님이 오시기 전까지만 해도 예산 집행률, 목표 달성률 위주의 점검이 많았다.


그런데 새로 오신 실장님이 얼마 지나지 않아 부서 직원들을 불러 모았다.      


"이제부터 캑알로 합시다."     


뭔알이요? 속으로 이게 뭔가 싶었다. 나야 이 부서에서 얼마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선배들도 처음 들었는지 다들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인터넷으로 검색을 해도 캑알이 뭔지 제대로 답변이 나오지 않았다. 알고 보니 연평균성장률을 뜻하는 CAGR (Compound Annual Growth Rate)라는 비즈니스 지표를 ‘캑알’이라 부르신 것이었다. 이제까지 한 번도 내부보고서에 등장하지 않았던 개념이었다. 이후 알았다. 지표 하나만 바꿔도 보고서가 입체적으로 바뀐다는 것을. 이후 모든 보고서에 CAGR은 조미료처럼 빠짐없이 올라왔다.  

    

이밖에도 회장 보고 시 전문은 전문이고 요약본을 별도 만들어 보고했다. 회장님은 바쁘다. 가장 핵심만 요약하고 정리해서 보고해야 한다. 나는 기관에도 도움이 되고 보고 시에도 유용한 경영효율성 지표를 새로이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그런 것들에 걸맞은 참고자료가 뭐가 있을까 고민했다. 그러다가 ‘아, 실장님이 증권사 출신이었지’하면서 직장상사에게 가장 익숙한 형식인 ‘증권사리포트’를 떠올렸다.


이후 보고서를 고민할 때마다 때때로 증권사리포트의 표나 그래프, 용어를 참고하면서 요렇게 해 볼까, 조렇게 해 볼까 응용했다. 사무실에서 한낮에 증권사리포트를 보다가는 ‘저놈은 업무는 안 하고 주식만 하고 있네.’라는 소문이 날까 봐 야간에 집에서 가끔 보곤 했다. 그렇게 보고서에 정성을 들이니 실장님의 ‘OK’ 사인도 빨라졌고, 두꺼운 보고서도 쓰게 되었다. 그럴 때마다 만족감을 느꼈다.

 

비슷한 생각들이 모여 있으면 새로움을 얻기가 어렵다. 내부에도 장점이 많지만, 외부에도 분명 새롭고 참신한 생각들이 존재한다. 비영리분야, 공공분야도 이제 영리적 기법의 장점을 도입하고 있다. 외부와 적절히 교류하고 사고가 섞여야만 좋은 아이디어, 더 나은 성과가 만들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은 부서를 옮겨서 그때만큼 장문의 보고서를 쓸 일은 없다. 그럼 아직도 증권사리포트를 읽느냐고? 아니다. 그때부터 증권사리포트를 읽으면서 내용까지 내 것으로 소화해 냈다면 나는 보고서도 얻고 동학개미운동에 편승해 지금쯤 지갑도 두둑하게 일거양득을 얻었을 텐데. 아쉽게도 아직 나의 보고서도, 미래에 대한 준비도 미완성이다.




<사진출처 : Google>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