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십자 다이어리
신입직원은 각 부서별 교육을 받아야 한다. 오늘 오전 총무팀 교육을 받으러 온 신입직원들에게 "5월 8일이 무슨 날인가요?"하고 물어보니 "어버이날이요."라는 답변이 이구동성으로 나왔다. 맞는 말이다. 이 나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들에게 5월 8일 하면 어버이날이 먼저 떠오르는 게 당연하다. 나도 그랬다. 나는 "맞습니다."라고 짤막하게 답하고 나서 이 날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날이라고 알려주었다. 바로 적십자를 만든 장 앙리뒤낭의 생일을 기념해 만들어진 세계적십자의 날(World Red Cross and Red Crescent Day)이라는 것을 말이다.
앙리뒤낭은 1828. 5. 8 스위스 제네바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약자에 대한 연민과 인류애가 강한 사람이었다고 한다. 사업가였던 앙리뒤낭은 1859년 6월 운명적인 사건을 접하게 된다. 이탈리아 통일전쟁 당시 프랑스-사르드니아 연합군과 오스트리아군의 솔페리노 전투가 막 끝난 시점에 그는 이 전장을 지나다 처참한 광경을 목격하였다. 15시간의 전투에서 4만여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아비규환의 현장을 보고 앙리뒤낭은 사업 목적은 접어두고 마을 부녀자들을 동원하여 2주간 부상자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3년이 지난 1862년에 그가 목격했던 전쟁의 참혹한 현장과 부상자를 돌본 경험, 그리고 미래를 위한 제안을 묶어 <솔페리노의 회상(A memory of Solferino)>라는 책을 펴냈다.
우리 글로 130페이지 분량의 이 책은 당시 주변국 지도자, 유명인, 지식인들에게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전쟁의 참혹함을 일깨워줬기 때문이다. 전쟁 시 부상자를 구조하기 위한 구호단체를 모든 나라에 조직하고, 그런 구호단체의 존재와 활동을 보장하는 국제조약을 체결하자는 앙리뒤낭의 제안은 사람들로부터 열렬한 지지를 받았다. 적십자가 창설되고 오늘날 190여 개 국가에서 활동하게 된 것도, 제네바협약이 만들어진 것도 모두 <솔페리노의 회상>이라는 이 책에서 시작되었다.
나는 같은 책을 반복해서 잘 읽는 편은 아니지만, <솔페리노의 회상>은 여러 번 보았다. 적십자에 입사한 직원이라면 누구나 읽고 독후감을 써야 하기 때문에 처음 읽었다. 봉사원이나 RCY 단원 교육을 준비하면서 다시 읽어 보았다. 그리고 이번 주에도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읽어 보았다. 낯선 유럽국가의 지명과 200명이 넘는 생소한 인물 탓에 머리에 쏙쏙 들어오지는 않지만 책 속에 묘사된 전쟁의 잔혹함 만큼은 매번 마음에 쌓이듯이 남았던 것 같다.
이 책을 보면 전쟁이 결코 낭만적이지 않다는 걸 느낄 수 있다. 이 책에는 전쟁을 소재로 한 책이나 영화에서 등장하는 흔한 영웅적 서사도 없다. 죽은 사람들과 죽어가는 부상자들, 이를 간호하는 또 다른 선한 사람들이 나올 뿐이다. 전쟁터나 부상자를 치료하는 상황을 읽을 때마다 그 장면이 떠올라 소름이 돋고, 인상을 찌푸리게 된다. 어디 나만 그랬겠는가. 수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통해 충격을 받았기 때문에 역으로 구호단체 결성을 향한 지원과 지지를 보낼 수 있었을 것이다.
끔찍하고 소름끼치는 백병전이 벌어졌다. 오스트리아 군과 연합군은 유혈이 낭자한 시체더미 위에서 서로를 짓밟아 죽였고,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쳐 죽이거나 군도와 총검으로 배를 찔러 죽였다. 그들은 서로를 가치 없이 죽였던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도살장이었으며, 피에 굶주리고 피 맛에 취해 날뛰는 맹수들의 싸움이었다. 부상자들조차 마지막 숨이 끊어질 때까지 서로 싸웠으며, 무기를 잃어버린 자들은 적군의 목덜미를 잡고 이빨로 물어뜯었다. - 앙리 뒤낭 <솔페리노의 회상> p20 ~ 21
<좌측 상> 최초의 솔페리노의 회상, 그리고 각 언어로 번역된 솔페리노의 회상
만일 <솔페리노의 회상>이 이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해 본다. 아마도 더 많은 사람들이 전쟁의 포화 속에서 희생되었을 것이다. 전쟁으로 인하여 소중한 가족을 잃거나 생사도 모른 채 평생 가슴 아파하는 사람들은 더 많았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런 면에서 이 책 <솔페리노의 회상>은 전쟁으로부터 인류의 생명을 보호하고 고통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한편으로는 이 책을 보면서 글의 힘이라는 게 얼마나 강한지, 심지어 세상을 변화시킬 수도 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
아파보면 건강의 소중함을 알게 되듯이, 전쟁은 평화의 소중함을 상기시킨다.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가. 여전히 분단국가의 국민으로 살고 있는 우리. 전쟁의 불씨가 완전히 꺼져 안심하고 살아갈 그 날은 언제일까.. 전쟁은 신성하지도 않을뿐더러 모두의 공멸을 부를 뿐이다. 평화가 유지돼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