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적십자 다이어리
코로나19로 인해 비자발적 칩거를 하고 있는 요즘, 집에서 TV 보는 시간이 늘어가고 있다. 지난 주말 나는 와이프가 틀어 놓은 <트래블러 - 아르헨티나>라는 프로그램을 곁에서 같이 보았다. 훈남 셋(와이프가 좋아하는 동백꽃 용식이 강하늘, 멜로가 체질에서 '흔들리는 꽃들 속에서 네 샴푸향이 느껴진거야'를 불러 와이프와 다섯 살 딸을 홀릭에 빠뜨린 안재홍, 그리고 워너원 옹성우 - 아재라서 이제 알아가는 중)이서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를 여행하는 내용이었다.
여행 프로그램은 사람을 설레게 하고 떠나고 싶게끔 만든다. 이국적인 건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매력적이다. 이날은 세계 3대 폭포 중 하나라는 이과수 폭포를 찾아가는 이야기였다. 화면으로 보는데도 폭포의 남다른 스케일이 느껴진다. 정말 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하게 된다. 이과수 폭포의 백미로 꼽히는 '악마의 목구멍'을 지나서 하이라이트인 보트타고 폭포수를 맞는 장면이 나왔다. 아파트 20층 높이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에 몸은 흠뻑 젖어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될 것이다.
"아~ 우린 언제 저기 한 번 가 보려나~~~."
와이프가 나 들으라는 듯이 한 마디 툭 던진다. 여행을 무척 좋아하는 와이프다. 하지만 지난 몇 년간 내가 바쁘다는 이유로, 또한 어린 아이를 거진 홀로 돌본다는 이유로 멀리 다녀보지 못한 것도 사실이었다.
"그러게, 언젠가 가 보겠지." 짧게 답하고는 이어서 "그래도 잘 기억해 봐. 아련한 기억이지만 우리 폭포 아래서 물 맞은 적 았잖아. 그것도 나이아라가라에서."
"그게 언젠데.. 다 잊었어."
2008년 나는 회사 단기연수 프로그램에 지원해서 합격하였다. 퇴임하시는 총재님께서 직원들에게 교육기회를 주었으면 좋겠다고 기부를 하셨고, 회사는 그 돈으로 3개년간 매년 4명씩을 선발해 해외 단기연수를 보내는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나는 그 두번째해 대상자로 선발되었다.
나는 해외에 대한 동경이 많았다. 우리 때는 대학시절 어학연수나 배낭여행이 붐처럼 유행이었다. 그러나 나는 아르바이트하며 학교를 다니다보니 해외는 꿈꿔볼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이 회사에 입사하면 좋아하는 일도 하면서 해외를 경험할 기회가 생기지 않을까라는 기대감도 있었다.
그 꿈이 가까워진 순간이 된 것이다. 3개월의 기간과 학비 일부가 지원되었다. 그래도 얼마나 좋은가. 무언가에 도전에서 선발되었다는 성취감도 있고, 업무를 떠나서 새로운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재충전의 시간도 갖게 되었다는 점이 나는 무엇보다 좋았다.
아내와 함께 연수를 가기로 결정했다. 당시 우리에겐 아이가 없어 둘만이었고, 아내도 나와 떨어질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아내에게도 얼마나 좋은 기회인가. 땡빚을 내서라도 가야지.
어학원에 가서 어디로 갈 것인지 상담을 했다. 나는 영어권 국가를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아는 게 없었다. 설렘도 있었지만 걱정도 많았다. 처음에는 뉴욕처럼 번화한 곳이 좋겠다고 생각해 1순위로 생각했는데, 금융위기 때라 환율이 하늘높이 치솟고 있었고 마땅한 숙소도 구할 수 없어서 마음을 접었다. 그동안 일에 매몰되어 있다보니 조금은 한적하고 조용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도 좋겠다고 어학원 직원에게 얘기했더니 가 보면 정말 한적할 거라고 캐나다 ‘나이아가라 칼리지'를 소개해 줬다.
집은 가까운 후배에게 3개월 들어와서 살라고 맡기고 우리는 7월말 캐나다로 떠났다. 인천에서 직항을 타고 캐나다 토론토 공항까지 가는데 보통 13시간이 걸린다. 그런데 우리 부부는 돈을 아낀다고 캐세이퍼시픽을 타고 홍콩을 경유해 토론토로 갔다. 출발시간부터 감안하면 비행기만 20시간을 탔던 것 같다. 뭣 모르니 그 짓을 했지 또 이런 상황이라면 돈을 더 내고 가고 말것이다.
토론토 공항에 도착하니 학교 관계자가 우릴 픽업하기 위해 피켓을 들고 나와 있었다. 영어를 그렇게 오래동안 공부했는데 말이 입에서 쉽게 나오지 않았다. 차를 타고 간단한 대화를 주고 받으며 1시간30분 거리를 달려 홈스테이가 있는 폰트힐(Fonthill)에 도착했다. 집주인은 홈스테이를 한 지 얼마되지 않았고, 우리 부부와 중국인 유학생 하나가 첫 손님이었다. 집주인 부부 내외는 대학시절 이름을 날린 농구선수 출신이어서 둘다 장신이었다. 남편은 나이아가라 칼리지에서 농구코치를 맡고 있어서 아침에 출근하고 오후에 퇴근할 때 우릴 친절하게 픽업해 줬다. 우리 부부랑 나이대가 서로 비슷했다. 아이가 둘 있었는데 둘다 인형처럼 이쁘게 생겼었다.
웰랜드에 위치한 나이아가라 칼리지는 집에서 차로 15분 정도 거리였다. 당시에도 이곳에는 한국학생들이 많았다. 이렇게 먼 곳까지 한국애들이 오는구나. 학생들은 웰랜드 근처에 살아서, 내가 머물던 폰트힐이라는 동네에는 한국학생이 없었다. 얼마지나지 않아 집주인이 동네 편의점 사장님이 한국인이다라고 알려줬다. 한국인은 또 한국인 나름의 분위기가 있다. 딱 보니 알겠더라. 편의점에 가서 한국인이시냐고 반가움을 표시하고, 거기서 공중전화를 카드를 구입해 부모님께 국제전화를 드리곤 했다.
학교수업은 재밌었다. 영어를 좋아했기 때문에 3개월 주어진 시간에 많이 배워 가려고 노력했다. 어학원 수업은 1부터 5까지 단계가 있는데, 1개월 수업을 듣고 테스트를 봤다. 나는 5단계, 아내는 3단계에 배정을 받았다. 곧바로 5단계로 간 학생이 나이 많은 나 혼자였기 때문에 나는 다른 학생들의 부러움을 샀다. 5단계 과정을 마치면 칼라지 정규 입학자격이 나온다. 대학수업을 위한 교육과정으로 진행되다보니 문장력 강화를 위한 작문수업도 받았는데, 영어로 작문을 하는 것도 머리를 쥐어짜는 일이긴 해도 재밌는 일이었다. 난 단기라서 끝까지 듣지는 못했다.
캐나다에 머물던 3달동안 국제적으로 사건사고가 많았다. 8월에는 중국에서 제29회 베이징올림픽이 열렸다. 중국에서 열리는 올림픽을 캐나다에서 보면서 한국팀을 응원했다. 내가 신기하게 봤던 것은 캐나다 방송에서는 금, 은, 동으로 표기하지 않고 메달수로만 집계한다는 점이었다. 은메달을 따고도 눈물을 흘리는 한국의 현실과는 관점이 다르다는 생각을 했다.
9월에는 리먼 브라더스 파산으로 세계 금융시스템에 위험이 발생했다. PB 친척소개로 가입했던 펀드를 연수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손실을 보면서 미리 팔았었는데, 폭락하는 시장을 보면서 다행이었구나 가슴을 쓸어내렸던 기억이 있다. 이번 주 한국증시의 폭락을 보면서 그때 생각이 또 나기도 한다. 한국언론이 아닌 해외언론을 통해서 바깥세상을 접하다보니 뭔가 조금은 다른 관점에서 문제를 바라보게 되었다.
미국에서는 허리케인 피해가 심했다. 당시가 미국 대통령 선거기간이었는데 오바마 대통령 후보의 홈페이지를 들어가 보면 태풍피해를 위한 구호사이트가 단일하게 등록되어 있었다. 바로바로 미국적십자사(American RedCross)의 홈페이지였는데, 해외에서 적십자의 위상은 더 대단한 것이구나 실감할 수 있었다.
그리고 캐나다의 깨끗한 자연환경을 구경할 수 있었다. 공기가 너무나 맑았다. 황사 가득한 대한민국에서 온 내가 볼 때 이런 공기 속에 사는 사람들은 대충 먹고 살아도 건강하지 않을까 생각했다. 한여름에도 습하지 않아서 나에게는 쾌적의 곳이었다. 요즘도 한여름이면 이곳이 그립다.
나이아가라 칼리지는 미국과 캐나다의 접경에 있는 나이아가라폭포와 차로 30분 정도 거리에 있었다. 학교는 연수생들을 위해서 과정 초기에 나이아가라 폭포 구경을 시켜준다. 우리 부부도 노란색 스쿨버스를 타고 두 번 나이아가라폭포에 갔다. 주변 전경도 보고, 우비를 입은채 배를 타고 나이아가라 폭포 아래를 지나며 샤워를 했던 것도 이때였다. 물맞고 좋아라 했던 그때. 이밖에도 그 유명한 캐나다 단풍과 메이플시럽도 경험해 볼 수 있었다.
그렇게 3개월의 시간을 알차게 마치고 우리 부부는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 일이 벌써 12년 전의 일이 다. 그사이 많은 것들이 변했다. 우리 부부에게는 기다리던 아이가 10년만에 생겼다. 구글링을 해 보니 집주인은 2019년 온타리오주 올해의 농구감독이 되어 있었다.
언젠가 엄마아빠가 함께 가 보았던 나아이가라를 아이와 함께 가 봐도 좋겠다는 상상을 한다. 저 멀리 이과수도 가면 좋고, 세계 3대 폭포까지 모두 가서 폭포샤워를 해도 더 좋겠다는 상상을 해 본다.
과연 상상이 현실로 될까?
<사진 : 캐나다관광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