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방학이 시작되었다. 혈액부족을 걱정해야 할 시기가 다시 돌아왔다. 학생들이 방학에 들어갔으니 2월 말까지 고등학교나 대학교에 단체헌혈을 갈 수 없다. 동절기 그 빈자리를 어느 곳으로 채워야 할지가 우리 팀의 고민이다. 직원들이 군부대, 행정기관, 일반단체에 전화를 걸고 방문하면서 일정을 잡아가고 있지만 부족하다. 그러던 차에 직원 M이 아파트 헌혈을 여러 곳 섭외해 왔다. 어려운 시기에 장소를 제공해 준 아파트 관계자 분들께 감사하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왠지 모를 불안감도 들었다. 아파트 헌혈은 타 단체와 달리 사전에 희망자 파악을 할 수 없어 예측이 안 된다. 잘 될 때도 있고, 안 될 때도 많기 때문이다. 그래도 어렵게 섭외된 만큼 헌혈을 나가기로 했다.
지난 1월 6일 출장은 직원이 휴가를 내서 내가 맡았다. 내가 갈 곳은 혈액원에서 30분 정도 떨어진 공단지역 아파트다. 세대수가 2,500세대로 단일 아파트로는 가장 큰 규모다. '100세대 당 1명 씩만 헌혈을 해주면 딱 좋으련만.' 아침부터 머릿속으로 희망회로를 돌렸다. 사무실에서 준비물을 챙기고 있는데 직원이 "일단 차 시동부터 먼저 켜 놓으셔야 해요."라고 말했다. 겨울철 업무요령이다. 영하의 날씨라 밤사이 차가 꽁꽁 얼어 있고 성에가 두껍게 덮여 있다. 주차장에 내려가 차 시동을 켜고 히터를 최고로 높인 뒤 차 밖으로 다시 나왔다. 오히려 차 밖이 덜 추웠다. 15분 정도 켜 놓으니 차창 유리에 붙은 성에가 걷히면서 운전할 수 있을 정도가 되었다. 내가 먼저 출발했고, 내 뒤로 헌혈버스 1대가 뒤따랐다.
아파트 입구에 도착했다. 차단기 옆 호출 버튼을 누르고 "혈액원에서 왔습니다."라고 말하니 차단기가 올라갔다. 내 차는 통과할 수 있지만 버스가 지나기에는 좁은 폭이다. 차를 빼서 옆으로 정차시키는데 경비원께서 보시고 나와 바닥에 고정해 둔 볼라드 하나를 뽑아주셨다. 그제야 버스도 출입구를 지날 수 있었다. 저속으로 아파트 안을 돌아 지정된 주차공간 가까이에 갔다. 그런데 버스 들어갈 자리에 애매하게 자가용이 주차되어 있었다. 차에 있는 번호로 연락을 하니 '문자메시지로 보내주세요'라고 답신이 왔다. 버스주차 때문에 이동주차를 요청한다고 문자를 보내니, '20분만 기다려주실 수 있나요?'라고 메시지가 왔다. 기다리면 더 늦는다. 그래서 다른 자리 차주에게 연락을 했다. 다행히 차주인께서 바로 내려와 차를 빼줬다. 헌혈버스가 정상 주차된 것을 확인하고 나는 관리사무소로 향했다.
관리사무소에서 소장님을 만났다. 새해 인사와 협조에 대한 감사를 드리고 오늘 진행에 대해 간략히 설명드렸다. 관리소장님도 궁금한 게 많으셨는지 혈액검사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보셔서 간단한 답변을 드렸다. 홍보포스터는 며칠 전부터 이미 엘리베이터에 부착해 놓은 상태라서 추가로 안내방송을 요청드렸다. 그러나 소장님은 방송은 좀 어렵다고 말씀하셨다. 공단과 가까운 지역이라 밤근무 후 잠에 들었거나 오후나 밤근무를 위해 잠자거나 휴식하고 있는 주민들이 많아 안내방송 시 민원이 엄청 들어온다고 하셨다. 아. 뿔. 싸. 안내방송이 나가면 효과가 있을 텐데 안타까웠다. 그렇게 출장팀은 주민들이 안내문을 많이 보셨기 바라며 버스에서 헌혈자를 기다리기 시작했다.
헌혈은 하염없는 기다림이다. 헌혈차량에서는 예약이 없다. 매일 이동하며 헌혈하기 때문에 현장접수로만 이루어진다. 오늘은 언제쯤 헌혈을 개시할 수 있을까? 20분쯤 지났을 때 첫 헌혈 희망자가 헌혈차를 찾았다. 그런데 헌혈버스를 찾아왔다고 해서 모두 헌혈이 가능한 건 아니다. 간호사에게 건강상태를 문진 받고 이상이 없어야만 헌혈을 할 수 있다. 이날도 아침부터 부적격이 계속 나왔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잠을 많이 못 주무신 채 오신 남성 분, 꼬맹이 아이 손을 잡고 나왔는데 헤모글로빈 수치가 기준치 보다 낮았던 주부, 혈압이 계속 안 떨어지는 어머님, 최근 1달 이내 해외여행을 다녀온 분 등 문진실에서 나와 채혈실로 가지 못하고 옷을 주섬 챙겨 되돌아가야 하는 상황을 볼 때마다 윽! 내 마음이 쓰렸다.
마감시간은 오후 4시까지. 얼추 2시 30분이 다 되어가는데도 헌혈자 10명을 채우지 못했다. 이제 남은 시간은 1시간 30분. 관리소장님이 홍보방송은 어렵다고 말씀하신 걸 기억하지만 답답한 마음에 관리실을 한번 더 찾았다. 관리소장님께 상황을 말씀드리고 다시 요청해 보았지만 소장님께서도 거듭 안타깝지만 미안하다고 하셨다. 그 대신 관리소장님이 직접 헌혈버스에 오셔서 헌혈에 참여해 주셨다. 이후에 몇 명이 더 와서 가까스로 두 자릿수 헌혈자를 채우고 마무리하였다. 바다에서 물고기 가득한 배를 몰고 귀항하는 게 어부의 로망이라면, 헌혈처에 나가 많이 헌혈을 하고 귀원하는 게 혈액원 개발팀의 로망이다. 특히 동절기 이 시기에는 더더욱.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현실은 내 맘대로 흘러가지 않는다는 걸 또 한 번 느낀다. 그래도 협조해 주고 참여해 주는 분들이 있어 다행이다. 내일은 오늘보다 낫겠지. 희망을 떠올리며 나는 혈액원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