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파경보가 내린 날 헌혈 캠페인을 나갔다
나는 평소 내복을 입지 않는다. 불편하고 갑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내복 하의 하나는 필수로 갖고 있다. 동절기에 요긴하게 입을 날이 있기 때문이다. 설 명절 마지막 날 오후, 서랍 안에 있어야 할 내복을 찾고 있는데 도통 내 눈에 보이지가 않았다. “여보 내 내복 못 봤어?”하고 큰 소리로 아내를 부르니, “사 줘 봐야 소용도 없어. 옷 정리하면서 안 입는 거 싹 버렸어.”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맙. 소. 사. 내일이 바로 내복을 입어야 할 날이건만 말하지도 않고 버리다니. 안 쓸 돈을 다시 쓰게 생겼다. 그렇게 나는 내복을 사러 집을 나와 길 건너 BYC에 갔다.
내복을 찾은 건 헌혈 캠페인에 나가기 위해서였다. 명절 전 혈액 보유량이 계속 3일 치를 밑돌았다. 연휴가 지나면 보유량이 더 낮아질 게 자명해서 회사에서는 자체 대책회의를 열었다. 연휴 끝나고 첫 출근하는 25일 오후에 캠페인을 하자는 안건이 올라왔다. 듣고 있던 나는 이왕 할 거면 교통량이 많은 아침 출근시간에 캠페인을 하는 게 어떻겠냐고 의견을 냈는데, 그 의견이 반영되었다. 겨울이니 추운 거야 당연하고 캠페인 나가는 것도 한두 번이 아니지만 그날이 한파경보가 예보된 날인지는 나중에야 알았다. 워낙 강추위라 안전 문제가 걱정되었지만 미룰 수 있는 상황도 아니어서 직원들은 예정대로 캠페인에 참가하기로 했다.
패션 용어 중에 TPO(Time, Place, Occasion)라는 게 있다 시간과 장소와 상황에 맞게 옷을 입으라는 의미다. 패션에 둔감한 나도 동절기 거리 캠페인을 위해 챙겨야 할 의상과 소품 정도는 체득하고 있다. 추위를 피하려면 먼저 따뜻한 외투를 준비하고 얇은 옷을 여러 겹 챙겨 입어야 한다. 내복은 필수이고, 양말은 두 겹 정도 신어줘야 하고, 귀도리도 착용하고, 장갑과 핫팩도 빼놓을 수 없다. 그런데 필수아이템 중에 하나인 내복이 사라졌으니 다시 사러 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월 25일 아침은 혹독하게 추웠다. 청주의 아침 기온은 영하 16도. 나는 집 근처에 사는 P팀장님을 태워서 청주 상당공원으로 향했다. 오늘 캠페인에 참가하는 인원들은 팀별로 1~2명씩 총 10명. 우리는 큰 사거리를 중심으로 인원을 반으로 나눠 현수막과 피켓을 들었다. 나는 현수막의 한쪽을 붙잡고 섰다. 현수막에는 ‘혈액이 많이 부족합니다. 헌혈에 동참해 주세요.’라는 글귀가 적혀 있었다. 신호가 바뀌고 차량이 신호대기하면 사람들은 우리 쪽 현수막을 보았다. 투명한 버스 유리창 안으로 사람들이 고개를 돌려 쳐다보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추운 날이지만 걸으며 몸을 움직이면 덜 추울 수 있는데 제자리에 서서 캠페인을 해야 보니 추위가 더 느껴졌다. 해가 건물 위로 완연히 오르면 조금 나을 텐데 오늘따라 왜 이리 늦게 떠오르는지 자꾸 신경을 쓰니 시간만 오히려 더디게 느껴졌다. 몸 중에서는 손마디 끝과 발가락 끝이 가장 추웠다. 혈액순환이 안 돼서 그런가 싶었다. 모두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후배 K는 눈썹과 눈썹 사이에 하얗게 얼음이 맺혔고, 나도 마스크 안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아침 캠페인을 잘 마쳤다. 이슈가 되었는지 방송사도 나와 촬영을 해 갔다. 소품을 모두 정리하고 직원들은 몸을 녹이기 위해 가까운 커피숍에서 따뜻한 차를 간단하게 한 잔씩하고 사무실로 귀원했다. 차 마시는 중에 아내에게서 ‘살아 있어?’라고 문자가 와서 잘 끝나고 차 마신다고 답변을 보냈다.
올 겨울은 눈도 많고 추위도 매섭다. 날이 추우면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혈액은 매일 필요하고, 헌혈은 비대면으로 가능하지 않다. 어떻게든 사람들을 헌혈차량이나 헌혈의집으로 이끌어내야 헌혈도 이루어질 수 있다. 그래서 혈액원에 근무하면 혈액이 부족할 때 캠페인에 나서는 것도 일이다. 사무실로 돌아가 업무를 하는데 아침부터 추워서 그런지 한기가 남고 일찍 피곤이 몰려왔다. 그래서 일 끝나자마자 곧장 집으로 퇴근했다. 집으로 돌아와 따뜻하게 샤워를 하고, 쉬면서 아내에게 한 마디 건넸다. “여보 나 내복 언제 입는지 알겠지? 그러니 내복 버리지 마.”라고.
p.s. 다행히도 주말 지나 혈액보유량은 잠시 4일 치를 넘어섰다. 다시 오르락내리락하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