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에게 매주 한 통씩 편지를 보낸다. 곰손아빠의 그림편지다. 77번째 편지까지 보냈으니, 77주가 흐른 셈이다. 타지에서 근무하며 주말에나 아이를 만나게 돼 아이와의 소통을 위해 편지를 시작했다가 지금은 다시 집근처로 발령 나서 돌아왔어도 계속 편지를 주고 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어도 내가 그림편지를 빼먹지 않는 건 아이가 좋아하고 원하기 때문이다. 편지는 현재 내 일상의 우선순위이자, 딸과의 놀이로 자리 잡았다.
반복의 힘은 커져간다. 해수로 3년째 이 일을 진행하면서 작은 변화를 엿보게 된다. 유치원생이던 딸아이는 이제 초등학교 2학년이 되었다. 아이는 학교에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자기 주변에 그림편지를 받는 사람이 자기 혼자란 걸 알게 되었다. 내가 그리고 아이가 색칠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도 이 일의 즐거움이지만 그림편지도 하나의 기록물이라 쌓아가는 기쁨도 큰 것 같다. 그림에 관심도 없었고 제대로 배워본 적 없는 내가 아이에게 이런 추억을 선물하고 있다는 것도 내겐 의미 있는 변화이다. 아이가 없었다면 하지 않았을 일이다.
아이는 내게 감사하는 마음을 표현하기도 한다. 며칠 전에는 퇴근하고 돌아왔더니 선물이라며 봉투에 작은 노트 1개, 사탕 2개, 쪽지 1개를 담아 줬다. 쪽지에는 "아빠, 편지를 줘서 고마워요. 이 은혜 잊지 않을게요~"라고 쓰여 있었다. 아빠로서 흐뭇할 따름이다. 그리고 아이도 내게 그림편지를 주기 시작했다. 매주 한 번은 아니지만 떠오를 때 쓱쓱 그려서 준다. 다섯 번째 편지까지 받았다. 나는 기존에 존재하는 캐릭터 그림을 따라서 그리는 것이지만, 아이는 자기 머릿속에 떠오르는 생각을 그림으로 옮긴다. 아이가 더 창의적이다.
나는 매번 다른 캐릭터를 그린다. 같은 캐릭터가 등장했던 경우는 피카츄뿐이다. 이제까지 편지 중 피카츄만 세 번 등장했는데, 처음은 그냥 피카츄, 두 번째는 핼러윈 드라큘라 피카츄, 세 번째는 크리스마스 산타 피카츄였다. 핼러윈과 크리스마스 피카츄는 특별판이었다. 이때는 속에도 Folding Surprise 형태로 그림을 추가로 그려서 넣어줬다. 접힌 상태에서 편지지를 펼치면 재밌는 그림이 나오도록 따라 그려서 넣어주었다. 해 주면 재밌어하는데 자주 해 주기에는 시간이 부족해 특별할 때만 하려고 한다.
나는 그림 소재를 정하면 드로잉 노트에 연습하고 편지지에 옮긴다. 그런데 아이도 그림 그리는 걸 좋아하고 내 드로잉 노트의 존재를 알아 가끔은 호기심에 내 노트를 열어보곤 한다. 편지지에 그려주려고 연습하고 있는데 미리 봐 버리는 경우 감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77번째 편지에 등장한 스즈메의 문단속 '다이진'이 그랬다. 연습을 해 뒀더니 아이가 미리 봤고, 그래서 그 주에는 급히 캐릭터를 수정해서 줬다. '다이진'은 이번 편지에 등장하게 되었다. 두 번 수고를 막기 위해 가급적 보안을 유지하려 한다.
적은 비용으로 즐거운 추억을 만들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그런데 이런 관심이 아주 오래갈 것이란 생각은 안 한다. 아이 주변에는 재밌는 일들이 너무 많다. 조금 지나면 관심사가 다른 곳으로 쏠릴 게 뻔하기 때문에 그림편지는 지금 시기에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세상에는 다 때가 있다. 그 시기를 놓쳐서는 안 될 그런 일들.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라 아이가 하고 싶은 것을 곁에서 함께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서 오늘도 머리를 쥐어짜가며 그림편지를 이어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