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첫 임무는 미션 임파서블이 아니었을까
적십자에 입사하게 되면 구호나 사회봉사, RCY나 안전(First Aid, Life Guard), 펀드레이징과 같이 현장과 가까운 사업을 맡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내 기대와 달리 나의 직장생활 시작은 총무팀 서무였다. 국어사전에 '특별한 명목이 없는 여러 가지 일반적인 사무를 맡은 사람'이라고 정의되어 있는 서무.
2003년 8월 충북지사 서무로 입사한 나는 수습기간 직장상사와 선배들이 알려주는 대로 따라 하면서 하나씩 일을 배워 나갔다. 수습 서무에게 주어지는 일이란 단순하고 반복적이며, 소소한 잡무의 연속이었다. 그러다 비중(?)이 쪼끔 있는 일이 처음으로 나에게 떨어졌다.
정규임용을 기다리던 무렵이었다. 가을이 깊어가는 시점이기도 했다. 총무팀장님이 나를 불러 "이번에 직원 근무복을 맞추려고 하는데 한 번 알아보세요."라고 지시하셨다. 팀장님의 말에서 뭔가 '자네가 맡아서 해 봐'라는 기대 섞인 느낌을 받았다. 잘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팀장님, 어떤 옷으로 해야 할까요?"
"날씨가 쌀쌀해지고 있으니 외투로 하세요."
"근무복 예산은 얼마에 맞추면 될까요?"
"1인당 편성된 예산이 있으니 거기에 맞춰 알아보세요."
자리로 돌아와 머릿속으로 어떻게 추진할지 그려 봤다. 근무복 대상자는 임직원. 그러니까 우리 지사에 있는 임직원은 지사회장님과 직원 12명 해서 총 13명. 그런데 남녀를 떠나서 연령대를 떠올리니 갑자기 머리가 띵해지기 시작했다. 신입인 나는 20대이고, 지사회장님은 70대 중반이시다. 이 간극을 메우면서 모두를 만족시킬 디자인이 과연 무엇일지 고민스럽기 시작했다. 주어진 예산으로 가능하기나 한 것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시장조사가 필요했다. 패션에 어두운 편인 내가 혼자서 이 과업을 달성하기에는 역부족이라고 판단했다. 강력한 조력자를 불렀다. 의상디자인과 조교를 하고 있던 여자친구에게 총무팀장님께 부여받은 미션을 설명하고 시장조사를 같이 가자고 했다. 주말에 데이트 삼아서 쇼핑거리 로드샵을 쭈욱 둘러보고 여자친구 조언에 따라 샘플 몇 개를 정했다. 옷이 이뻤다. 가격이 비쌀 뿐.
월요일에 출근해서 주말 사이 파악한 내용을 팀장님께 보고했다. 그런데 평소에도 도인 같으신 팀장님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잠시 생각에 잠기시더니 이내 다시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시고는 나의 주말 조사를 'No' 로 정리하셨다. 아~ 이게 아닌가.
그리고는 팀장님은 "C주임, 00동 거리에 크게 있는 그 옷 가게 가 봤어?”라며 일대일 대화를 일대팀 대화로 전환하고 "이월이긴 해도 브랜드고 괜찮아 보이니 그곳에서 한번 알아봅시다."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는 나를 대신해 경험 있는 C주임님을 대동하고 그 매장을 다녀오셨다. 근무복은 약간 중후한, 짙은색 이월 모직 점퍼로 결정되었다.
팀장님은 계획이 다 있으셨구나. 나는 근무복이라면 오로지 신상품만 떠올렸는데, 팀장님은 그 예산에 이월상품이 아니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미리 가지고 계시지 않았을까. 한편으로는 수습직원이니 일을 배우게 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지 않았을까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직접 여쭤보지는 않았다.
그렇게 나의 첫 미션은 끝이 났다. 올드한 스타일이라 느꼈지만 나는 나의 직장생활 첫 근무복을 그해 겨울, 다음 해 겨울에도 사무실에 두고 실컷 입었다. 사무실 앞마당에 눈이 내리면 눈을 쓸러 나갈 때도, 적십자회비 지로용지를 행정기관에 전달하러 갈 때도, 구호창고에서 구호품을 내가고 들이고 할 때도, 사무실에서 내근할 때도 내내 입었다. 새로운 근무복을 받기 전까지는.
모두를 만족시킨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모두가 어느 정도 감안해서 입는 것이 근무복이지.. 그래서 근무복은 항상 무난한 걸 고르게 되나 보다.
오랜만에 그때 일이 떠올라 직장 선배 두 명에게 가서 기억나냐고 물어봤더니 다들 그 옷도 없고 기억도 없다. 나도 그 옷이 없다. 그나마 나는 첫 업무라 기억은 있다. 세월이 그렇지 뭐. 어느덧 17년이 지난 일인데.
<사진 출처: 다이소몰, 사진은 이월상품과 무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