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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Oct 19. 2020

해부 능력, 글쓰기 질량을 높인다.

한 문장을 백 문장으로 쓰는 비결, 해부와 관찰

뭉뚱그리면 몸통만 볼 것이요,
뭉뚱 썰면 뼈도 발라낸다.

 

책을 읽다 보면 한 소재를 가지고 길게 풀어쓴 글을 가끔 본다. 그럴 때면 작가란 남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단순한 것에 관찰력이 남다르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런 현상은 특별히 소설에 많이 나타난다. 아침의 신선함을 배경으로 네 다섯 페이지를 거뜬히 써 내려가고, 연필에 대한 상상으로 여러 장의 백지에 연필 칼라를 칠하기도 한다. 그건 능력이다. 하루아침에 받은 천부적 재능에, 스스로 관찰력을 키워나간 후천적 훈련이 가미된 능력이다.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 오전 네다섯 시간의 일에 대해 쓰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은  A4 용지 한 장을 가득 채우지 못하는 경우를 종종 본다. 예를 들어 글쓰기에 익숙지 않은 사람이라면, "아침에 일어나서 양치하고, 아침 먹고, 옷을 주섬주섬 갈아 입고, 지하철을 타고, 회사에 도착해서는 커피 한 잔 한 후 컴퓨터를 켜고, 지난 저녁 들어온 업무 이메일을 확인하다 시간이 되어 업무회의에 들어갔다"는 정도의 짤막한 줄거리로 글을 마칠 것이다.


한 주제로 막상 글쓰기를 시작해도 핵심에서 어긋나 지웠다 쓰기를 반복한다거나, 소재들을 종합하는 능력이 부족해 글 내용이 널뛰기한다. 설득력과 사고, 그리고 경험 등을 잘 살려 하나의 주제에 합치되도록 하는 것은 이런 초보자에게 쉽지 않은 작업이다. 다행히 요즘은 중고등학교 수학능력 시험 때문에라도 글쓰기를 일찍부터 훈련하여 이런 초보적인 단계는 일찍 벗어날 수 있다. 근육을 키우기 위해 단백질만 먹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꾸준한 운동과 근력 훈련 끝에 식스팩이 형성되어 보기 좋을 것이다. 글쓰기 역시 훈련과 운동으로라야 단단한 근육질의 감동과 설득력을 더할 수 있다.


하루 일과라는 주제를 가지고 어떤 이는 길게, 어떤 이는 짧게 밖에 쓰지 못하겠지만, 단순히 길고 짧은 것 만으로 작품의 우열을 판단하는 것은 무모하다. 경험상 다른 사람의 글을 터무니없이 길다면, 그 글은 장황하기만 하고 감동이 전혀 없는 경우가 많다. 짧게 몇 마디로, 하고자 하는 모든 말을 할 수 있는데, 지나치게 지루해진 경우다.


이는 다음의 두 가지의 경우다. 첫째는 더 자세하게 설명하고 싶은 지나친 의욕 때문이고, 둘째는 스스로가 글의 핵심을 풀어나갈 전략의 부재 때문이다.  어찌 되었건 글을 필요 이상으로 길게 쓴다는 것이, 차라리 짧게 쓴 글 보다 못하다는 판단이다.


그렇다면 지나치게 짧은 글이 괜찮을까? 시도 아닌 것이, 짧게 핵심을 다 관통하고 있다면 진정 잘 쓴 글이다. 그러나, 주제는 다 어디 가고, 쓰다 만 것 같이 된다면 독자에게 대한 무례일 것이다. 설득과 감동에 접근하기도 전에 멈추어 버림으로 읽는 이가 가졌던 기대를 무너트리는 역할이 아닐까.




그러나, 길든 짧든 오늘을 종이 위에 기록할 수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겐 아직 희망이 있다는 말과 다르지 않다. 일기를 쓰고, 메모를 남기고, 사진과 영상으로 미래에 남겨질 오늘을 저장한다. 그러나, 이 앳된 기록들이 좀 더 풍요롭지는 못할 망정, 단순한 단막극들, 예컨대, 몇 시에 일어나서, 회사 가고, 퇴근하고, 세수하고 등의 물리적이며 건조한 내용의 점철이라면 훗날 얼마나 아쉬울까.


기록은 일기가 되고, 일기는 다시 작품의 초석이 된다. 짤막 짤막한 줄거리만 기록하는 것을 넘어 일상을 해부해 뼈를 발라내듯이 갖가지 소재를 찾아낸다면 글은 반드시 품위와 감동을 더할 것이다.

 



위에 썼던 '하루 오전 네다섯 시간'의 기록을 한 단계 더 나아가 보자.


아침에 일어났는데 현재 시간 7시였다. 침대  사이드 테이블 위에 있어야  스마트폰이 떨어져 있었다. 주섬주섬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놓고 세면실로  양치를 하려는데 치약이 거의  써서 짤막해 한번 노려 보았다. 벌써  썼다니, 내일쯤  치약으로 갈아타야지. 잠옷을 입은 채로 아침  앞에 앉아  조림 식사를 간단히 했다. 식사  간단한 구강청정제로 입가심을   옷장에서 양복을 꺼내 입고, 10  떨어진 지하철  까지 걸어가 붐비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30 동안 사람들 사이에서 부대끼다 회사에 8 45분에 도착했는데, 다소 이른 출근을 커피  잔으로 때웠다. 다시 자리에  시간은 9 55, 컴퓨터를   일상이 그랬던 것처럼 이메일 확인부터 했다. 20 통의 업무 관련 메일이 부서와 외국 플랜트에서 도착해 우선순위에 따라 처리하기 시작했다.”

겨우 몇 가지의 구체화로 글의 맛이 확실히 나아졌다. 그러나, 이것 역시, 보고서 혹은 진술서가 될 망정 수필이나 단편이 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각 단계마다 더 깊은 관찰을 통한 디테일이 가시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맛을 살리는 방법은 무엇일까?




연어의 뼈를 발라내는 능력에서
글쓰기를 위한 관찰의 정도를 측정해 볼 수 있다.



일식당에 가면 니기리 초밥 종류가 여럿 있는데, 연어 니기리 초밥은 나의 단골 메뉴다. 부드럽고 담백한 육질, 달고 신 초밥의 감칠맛과 어우러져 먹기 좋은 이 니기리 초밥용 연어를 손질해본 적이 있다. 연어는 뼈가 참 많아 식재료로 준비되기 위해서는 손질을 정성껏 해야 한다. 배를 중앙에서 가르면 대칭 구조로 펼쳐지는데, 눈으로 뼈가 확인되지 않는 것은 손 감각으로 하나하나 찾아내 뽑아야 한다.  얼마나 신속히 세밀하게 잘 발라내는가 여부 하나로 전문 초밥 맨이냐 아마추어냐를 평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뼈는 군데군데 산재한다. 찾고 뽑고 처리해야 하는 일이다.


글쓰기도 이와 같다고 하면 좋겠다. 일상의 배를 갈라 펼쳐 놓은 후 일일이 뼈를 찾아내는 것이다. 하루라는 것이, 눈뜨고, 먹고,  만나고, 가고, 일하고, 퇴근하고, 씻고, 잠자는 일만 있다던가. 이것들은 큰 줄거리에 지나지 않는다. 그 일상의 조각조각을 다시 해부해 세밀한 구석까지 찾아 가면, 한 가닥은 열 갈래의 길로 이어진다. 이렇게 함으로써, 어떤 주제 하나로 장편소설을 엮어내는 달인 작가들을 우리는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글쓰기가 연어 손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발라낸 뼈, 즉 일상의 해부를 쓰레기로 버리는 것이 아니라 장식한다는 데 있다. 가로로 붙이고, 위아래로 배열하고, 긴 것 짧은 것 분류해 넓은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듯 조화를 맞추는 일이다.





여전히 미숙하지만, 위에 공개된 '하루아침의 네 시간' 주제를, 해부를 통해 좀 더 생명력을 더한 글을 아래에 공개해 본다. 오전 4시간 동안에 일어날 사건을 기록한 내 처녀작 소설 “까시”의 오프닝이다. 당신이 이 글을 만났을 때는 스토리를 구상하고 있을 때던가, 책을 쓰고 있을 때던가, 책이 이미 세상에 나온 뒤던가, 그냥 아무일도 안 일어난 뒤 일 것이다.

 

2020년 10월의 가을 아침, 잠에서 깬 시간은 오전 7시였다. 전화기에 심어둔 알람이 제대로 작동했다면 아침 6시 30분 이어야 하는데 이미 7시나 된 것은, 스마트폰이 망가지거나 충전되지 못한 이유, 혹은 단꿈을 꾸는데 시끄럽게 떠드는 울림을 신경질적으로 꺼버린 나의 무의식적 활동이 이유일 것이나, 나는 아마 후자가 맞을 거라 확신한다. 요는 지난 한 달간 이러한 전례가 일주일에 한 번 꼴은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 뒷받침해주는 증거 하나는, 침대 옆 사이드 테이블 위에 있어야 할  스마트폰이 침대 아래쪽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이다.


어쨌거나 주섬주섬 스마트폰을 주워 테이블 위에 다시 올려놓았다. 세면실은 방에 붙어 있다. 화장실이라고도 하고 좀 신사적으로 세면실이라고도 부른다. 주된 임무를 무엇으로 하는가에 따라 호칭이 제각각으로 바뀌기는 해도, ‘화장실’은 대괄호 개념의 포용적 의미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통상적이다. 창문은 없고 겨우 세수할 세면대와 일을 볼 수 있는 수세식 변기가 하나 있을 뿐이며, 천장에 붙은 환풍기로 냄새를 뽑아낸다.


오래전에 지은 집에 이런 시설은 희귀한 구조다. 방 두 칸 세 칸 아파트에 화장실 하나는 모든 건물의 공통 사항이었으나 언제부턴가 안방에 화장실을 따로 하나 뺌으로서 사람들의 편리를 도모하는 것으로 건축 문화 발전을 증명해 왔다. 이 세면실, 아니다, 화장실에서 아침을 깨우는 첫 행동으로 치아를 닦으려는데, 아뿔싸 걸림돌이 하나 생겼다. 굉장한 걸림돌이다. 치약을 짜고 짠 나머지, 끝에서 부터 돌돌 말아 마지막 액까지 다 뽑아냈는지, 눌러도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이다. 머리맡 한쪽 평평한 부분을 도구로 삼아 힘주어 밀자 칫솔 반을 겨우 덮을 만큼 찔끔 묻었다. 첫 출근 날 하필 늦잠으로 대강 이빨 사이 밤새 묶은 냄새나 제거했다.


오늘 퇴근 시간에는 회사 근처 마트에 들러 새 치약 하나를 사 와야겠다고 스마트폰을 꺼내 시장 목록에 기록했다. 까먹는 버릇은 나이나 아이큐와는 크게 상관은 없다. 흔히들 나이 들어 그렇다고 변명하지만, 사실은 집중력이 떨어졌다던가 관심사항이 바뀌었다고 보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자기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잊어버릴 확률이 극히 낮아진다는 것은 일반 상식이기도 한 동시에 이미 밝혀진 연구 결과다. 바로 기억력에 대해 이루어진 최근의 다양한 연구 결과이다. 건강한 생활 습관을 유지하고, 적절한 집중력 훈련은 기억력 감퇴를 현저히 줄여준다고 미국 폭스 뉴스가 7가지 방법론과 함께 전한 적이 있지만, 나에게는 아주 확실히 습관화된 방법론이 있다. 약방의 감초 같은 재미, 바로 스마트폰 어플에 기록하는 일이다. 특정 노트에 기록해도 좋지만, ToDo 어플이 좋다. 비슷한 어플이 애플 엡스토어나 구글 플래이 스토어에 꽤 많지만, 마음에 쏙 드는 것은 앱스토어에 유일하게 하나 있다. 말하자면, 이 어플에 의해 하루의 일과가 진행되고 하나씩 체크마크를 함으로 하루가 마감되고 있다.

양치를 하고 잠옷을 입은 채로 아침 상 앞에 앉아 꽁치 조림 식사를 간단히 하기로 했다. 꽁치 조림을 데워야 하는데 시간이 아깝다. 어제저녁에 엄마가 와서 만들어 주고 간 후 한 끼를 먹다 남았지만 여전히 두 끼는 더 먹을 수 있는 분량이다.


꽁치를 남달리 좋아했다. 밥 먹기 힘든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그때에 꽁치가 통조림으로 나왔다. 철재 뚜껑 한쪽에 붙은 손잡이를 힘껏 당기면 부욱~하고 전체 뚜껑이 따진다.  꽁치를 막 잡아 현장에서 고춧가루 뿌리고 양념을 쳐 요리한다 해도 통조림의 맛만큼 좋을 것 같지 않게 꽁치 통조림의 맛은 일품이다. 나의 어린 시절은 이 통조림을 갈구하며 커 온 것이라 해도 하나도 이상할 것 없다. 그 사실이 얼마나 명확한지, 어제저녁에도 자취하는 아들의 집에 지하철로 40분을 오셔서 엄마가 꽁치 요리 일주일치를 해놓고 가셨다. 꽁치를 중심으로 한 어미의 대단한 모성애다.


식사 후 간단히 구강청정제로 입가심을 했다. 잠자고 일어나면 양치가 어울리고, 밥을 먹으면 구강청정액이 더 개운함을 선사해 어울린다는 것은 단순한 개인의 습관이지, 무엇이 어떨 때 더 좋다는 연구는 본 적이 없다. 나의 경우는 단순히 잇몸 보호의 차원이다. 칫솔을 너무 이빨에 새게 자주 문지르는 것은 잇몸을 해치기 때문에, 하루 한번 칫솔질, 하루 두어 번 구강청정제의 규칙을 정해고 있다.


민트향인 이 브랜드는 여럿 유사품을 사용해 보다가 최종 결정한 제품으로, 냄새 제거와 입안 소독에 미백효과까지 넣은 고급 제품이다. 고급이라 함은 비싸다는 말과 다름없듯이, 다소간 비싸지만 사용했던 어떤 제품보다 개운함에서 앞선다. 현재 1500밀리 제품으로 두 통 째 이 제품으로 사용하고 있는 중이다.


옷장에서 양복을 꺼내 입었다. 거의 단벌 신사지만, 얼마 전 친구 결혼식 때 들러리 서주는 대가로 선물로 받은 감청색 양복을 꺼내 입었다. 선물로 받았다 하지만, 기성복이 아닌 몸에 맞추려 몇 번 현장 방문이 필요한 재단된 옷이다. 시대에 떨어진 15년 된 나의 사회 초년생의 양복이 아닌 관계로, 입으면 있어 보이고 기분이 좋다.

지하철 역은 도보로 십여 분 떨어진 곳에 있다. 가는 길은 포풀러, 단풍, 은행나무가 군데군데 무리 지어 있어 보는 것만으로도 상쾌하다. 아침 길은 나의 하루 첫나들이다. 걷기를 좋아해, 10여분 걷는 이 정도의 거리는 껌값이지만, 붐비는 전철에서 몸을 부대끼며 삼십 분 보내야 하는 시간은 즐겁지 않다. 걷기와 타기가 내겐 대조적이다.


이렇게 삼십여 분 후 회사에 도착한 시간은 오전 8시 45분이다. 지하철 역이 딸린 고층 건물에 위치한 회사는 출퇴근에 더 이상 용이할 수 없는 지정학적 구조다. 지하철이지만 이곳 역은 지하가 아니다. 지하로 달리던 기차가 지상으로 뻗는 철로의 부상을 따라 28층 건물의 2층 플랫폼에서 정지한다. 환승장이다. 회사는 28층 건물 중 3층에서 10충을 임대해 쓰고 있고, 나의 자리는 3층 영업부에 있다. 지하에서 내려 계단을 통해 올라갈 수 있다는 것이 장점으로 인식되고 있는 위치다. 


다소 이른 출근, 겨우 15분의 여유지만 아직은 출근한 사람이 많지 않다. 휴게실은 같은 층 한쪽 방에 마련되어 있고, 아직 아무도 오지 않은 오늘 아침은 나의 독차지다. 아무나 어떤 때고 커피 한잔쯤은 풍부히 마실 수 있도록 관대하고 여유롭게 준비되어 있는 커피믹스를 하나 풀어 뜨거운 물을 부었다. 이 아침의 커피 향은 정말 사랑한다. 종이컵이지만 뜨거운 물의 온도를 잘 막아주는 고급형 종이컵까지 회사는 쩨쩨하지 않고, 그것이 마음에 든다. 커피를 들고 다시 자리로 돌아온 시간은 오전 9시 55분. 회사에서의 일상이 이제 본격적으로 시작되어야 내 품격을 높일 것 같은 시간, 여전히 옆 뒷자리의 동료는 출근이 되지 않고 있다. 아마 이 시각 부랴부랴 뛰면서 엘리베이터 호출을 하고 있을 테다. 컴퓨터를 켰다. 이메일 이십여 통이 우편함에 배달되어 있다. 이곳 시간으로 밤사이 일하는 미국 현지 플랜트에서 시각을 다투며 보낸 메일들이다. 나의 일상은 이렇게 이메일을 확인하고, 이메일에 따라 처리하고, 이메일을 남기는 것으로 마감되는 사실이 오늘은 참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컴퓨터 자판을 두드린다." 





오랜만에 장편 소설을 읽었다. 한겨레 문학상을 받은 최지월의 “상실의 시간”이다. 모친 상 이후 겨우 며칠 동안의 가정사 이야기를 이렇게 단단한 구성으로 장편으로까지 써 내려가기란 일상의 모든 구성 요소에 대한 관찰이 천부적이지 않고는 불가능하겠다는 느낌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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