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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Sep 20. 2020

에티켓의 특별한 경우

실패하는 산책에는 뚜렷한 빌미가 있다.

강아지와 산책하는 것은 16년 된 나의 일상생활이다. 그 16년 중 15년은 두 마리의 강아지, 살구와 자두를 데리고 걸었고, 지난 1년은 자두만 데리고 걸었다. 1년 전 살구가 15살에 죽었다. 자두 나이는 16살. 사람으로 치며 90이 되는 노인이지만, 나에겐 여전히 아기 같다. 행동이 느리고, 배가 아주 고프지 않은 한 먹이에 관심을 두지 않지만, 걷는 데 있어선 여전히 잘한다. 이전과 달리 가기 싫으면 버팅기기 일수고, 저 좋은 대로 가려하는 고집이 이전 같이 빠르진 않지만, 잘 걷는 것 하나 만으로도 행복하다.

 

어느 볕 좋은 날, 나는 바다가 동네인 White Rock 한 공원에서 산책하고 있었다. 집에서 차로 30여 분을 가면 도착하는 동네에, 다른 일로 간 날이다. 차에서 30 분을 잠자고 있자면 강아지에게는 더없이 지루한 일이다. 가다 만나는 한적한 길에서 약간 씩이라도  산책을 해주는 것은 주인의 중요한 의무다. 자두는 나무 기둥마다 냄새를 맡느라 산책의 진척이 없다. 그래도 그렇게 지난 16년은 한결같은 산책의 나날이었다. 무수한 발걸음으로 먼 거리를 다녀오는 것이 산책이기도 하지만, 짧은 거리라도 동물의 특성을 존중하며 함께 시간을 보내주는 것도 산책이다. 특별히 개의 나이가 들수록 많이 외출을 해주는 것은 건강을 위해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자칫 집안에서 엎드려 만 있어 악화되는 노화를 걷기로 막아주는 일은 인간이나 개나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다.


나는 개를 멋으로 키우거나, 혹은 경쟁심리로 개를 분양받았으나 거의 방치해 놓고 사는 사람을 종종 보는데, 이는 참으로 잘못된 시도다. 그런 사람은 개를 키우지 않는 것이 좋다. 개를 사랑하다 보면 모든 동물의 생존 법칙에 감정 이입이 된다. 이전에는 개와 고양이라 불리는 동물이었을 뿐인데, 더 이상 그렇지 않게 된다. 가족이고 자식의 자리에 쉽게 올라오게 되어, 가족과 자식에게 향한 부모의 마음 그대로 그들에게 호흡한다. 나의 경우는 개를 키우면서 가진 감정 때문에, 이전에 없었던 측은지심과 사랑으로 다른 모든 동물을 아끼게 되었다. 심지어 병아리 조차도 삐약거리며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모습에 가슴 녹는데 이 일을 어쩌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산책 중 자두는 힘든 것 뭐 멀리 돌아야 하겠나 하지만, 나는 적당한 운동은 되어야 하니 갈 길이 바빴다. 줄을 당기기도 하면서 압력을 가하며 밀고 당기는 일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결국은 자두가 가는 쉬어가는 방식을 따르기로 한다. 내 손의 스마트폰을 보면서, 나도 쉬엄쉬엄, 자두도 쉬엄쉬엄 걷고 있었다.




스마트폰을 보면서 걸어도 모든 신경은 자두에게 가있다. 곁눈과 쏠린 눈으로 매 초를 삼등분해 폰과 자두와 장애물을 섭렵하고 있었다. 그렇게 16년이 단련된 나지만, 스마트폰을 보는 모습만으로 판단한다면 나는 이미 개 주인으로서 낙제생이다. 그들을 사랑한다는 말이 어울리지 않는 모양새가 되어 있었다. 바로 이 이유로, 그날 강력한 동물 사랑의 한 어른으로부터 단도직입 적인 말 붙임을 받게 되었다.

“이 강아지가 몇 살쯤 되었죠?”


“아, 네. 16살~”


“그렇군요, 뒤에서 보니 역시 좀 느리게 걷는다 했더니...”


“네 ㅎ”


“걸으면서 말도 붙여주고 하면 어때요? 빨리 가자, 괜찮아? 잘했어~ 등...”


“아, 네~ “

대화는 순식간에 지나갔고, 나는 그렇게 뼈 있는 핀잔을 듣게 되었지만 의미를 한참 후에야 깨달았다. 애견과 산책하는 짧은 시간, 스마트폰을 보면서, 정작 사랑 하나에 살아가는 존재에 대해 무관심한 듯한 모습이, 제삼자의 눈에는 용납되지 않았다. 내가 자두를 사랑한다지만, 더 일찍이 동물과 함께 살아온 서구의 백인들에게 비교할 바가 아니다.




처음 두 마리 강아지를 사 집으로 데려온 얼마 후 코스코에 갔던 날을 기억한다, 차에 강아지를 두고 창문을 조금 내려놓은 후 장을 다 보고 왔는데, 백인 할아버지 한 분이 야단을 치신다. 개가 차에서 밖을 보며 짖고 있는데, 그냥 두고 가서 안타깝다는 이유다. 이렇게 방치 비슷하게 행동하려면 개를 키울 자격이 없다 한다. 별 오지랖이고 꼰대 같은 일이 다 있다 생각했지만, 그날로 부터 멀지 않아 나 역시 그렇게 변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않았다.


개는 참으로 사랑스럽다. 오직 주인만 바라보며 일생을 산다. 개를 먹는 문화가 아직 대한민국에 있는지, 그 정도가 옛날 같이 심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거나 한국에선 여름철이 다가오면 더욱 민망하고 소름 끼친다. 이 내용을 듣고 아는 캐나다 올림픽 선수들이 지난 동계올림픽 때 한국에 시합 차 갔던 기간 동안 경쟁적으로 동물 입양을 해오려 했던 일이 여전히 생생하다. 그래도 한국 방송에서 요새는 동물 프로그램이 더 많아지고 인기를 끄는 것은 어떤 희망을 보는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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