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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Feb 04. 2022

행복 세탁소

영화 Happy Cleaners에서 보는 행복이라는 단어

우울하지만 행복한 이야기의 영화가 있다. 나의 이야기인 듯 동감되어 슬프다가도, 붙잡고 있던 것이 사라질 때 차라리 행복한 사람 냄새를 풍기는 결론이 더 아름다운 영화다.


2019년 제10회 서울 국제 영화제에 출품된 영화 '해피 클리너스'로, 크게 알려져 있지는 않다. 그도 그럴 것이 시트콤도 아닌데, 심심한 일상생활을 다룬 소재로는 재미가 크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도 이민자의 삶을 다룬 부분 또한 인기라는 측면에서 취약점이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세탁소를 운영하며 살아가는 미국 이민자 가정의 갈등과 도전, 그리고 실패와 회복이라는 거창하지 않은 일상에서 감칠맛을 우려냈다. 특별히 같은 이민자의 시각에서 감상했을 때 큰 공감과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되는 매력도 있다.


이민자의 삶은 한국에서의 교육 수준에 크게 영향받지 않는다. 진부한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재정적인 차이가 대단한 출발점의 차이를 만들어 낸다. 어느 사회이고 이런 불평등한 시작이 궁극적으로 더 큰 간격을 만들어 내겠지만, 이민자의 삶에서는 더 극명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뒤처진 사람은 발버둥을 쳐도 상대적인 차이를 좀처럼 좁히지 못하는 현실이 가난한 이민자의 주소다. 부부가 새벽같이 일어나 부지런히 일하고 저녁 무렵 온다고 부자가 되지 못하는 것은 뼈아픈 현실이다. 어떻게 보면 사회가 그렇게 호락호락 함부로 부자를 양산하지 않게 만들어져 있는 것 같다. 쳇바퀴 같은 삶, 대다수 이민자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지만, 이것이 부자 되기 위한 목적이라고 할 수는 없다. 차라리 하루를 살아내기 위한 유일한 생존법이다. 열심히 살아 집 한 채 장만하고 은퇴한다면 성공한 삶으로 만족하는 일, 아니, 은퇴 후 연금 정도에 의존해 근근이 살아가는 수준이라면 그냥 만족해야 할 수준이 아닐까.


요사이는 '돈 있는 가정'이 주위에 둥지를 트는 경우가 더 흔하다. 한인이 많이 몰려 있는 도시의 교회나 지역 사회에는 이런 부유한 사람들의 전혀 색다른 삶의 형태가 소속원의 이질감을 불러오기도 한다. 골프를 치고, 먹방을 찾아다닌다. 그런 사람들 앞에 일반 이민자는 괴리감을 피할 수 없다.


그럼에도 긍정적인 면을 보는 경우도 많다. 한두 해로 차이를 만들지 않지만, 십 년이라는 기간을 놓고 보았을 때, 부유한 사람의 물질 소비와 부지런한 사람의 성실한 저축으로 상황이 역전되곤 한다. 사실 그래야 되지 않겠는가. 자본주의가 좋다는 데는 열심히 일하면 돈을 많이 모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을 전제한다. 자본주의의 최고봉인 북미로 이주한 사람에게 이 논리가 더 명확하게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없는 자본이지만 식당, 구멍가게 등의 조그만 사업체를 인수해 부지런히 일한 탓에, 푼돈이 목돈이 되어야 옳다. 아메리칸 드림의 성취가 여기저기 목격되어야 진정 잘 된 사회라 칭해질 것이다.


그러나, 현실과 이상의 괴리는 늘 존재한다. 이 영화를 보는 이는 시종일관 사업으로 힘들어하는 부부와 고민을 같이 해야 한다. 기대에 벗어나 제 갈길을 간다는 아들에게 의사니 변호사를 고집해야 하는 엄마의 심정에 동감해야 한다. 그러면서 극히 한국적인 부모의 공통분모가 객관적인 시각에서는 얼마나 멋없는지도 보아야 한다. 열심히 살았았으며, 커뮤니티의 착한 일원으로, 절대자를 신앙하는 종교인으로 모범 답안을 써 내려갔음에도 사업을 "말아먹는"일을 같이 겪어야 한다. 그래서, 쓸쓸하고 어두운 영화다.


감사한 것은, 이야기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의사 되기를 바랐는데 푸드트럭으로 음식 장사를 하려는 아들과 갈등이 시종일관 계속되고, 딸은 능력 없어 보이는 가난한 남자 친구와 진지한 관계를 끊지 못하고 있었고, 17년을 근근이 운영한 세탁소 사업이 건물 재임대의 문제 앞에 기반이 흔들리다 결국 소중한 사업을 접어야 했을 때 이야기의 본론이 시작되고 있다. 막혔던 관계의 회복이 시작되었다. 부모가 자식에게 마땅히 했어야 하는 전폭적 지지와 격려가 서서히 눈을 뜰 수 있었다. 아들의 성공이 의사나 변호사인 것만은 아니다. 자신이 재능 있고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한다면 벌써 전폭적으로 밀어주고 있어야 했다. 가난하지만 반듯한 남자를 딸이 사랑한다면 가끔 집으로 초대해 밥이라도 먹여줄 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이 실패로 인해 눈을 뜨게 된 것은 역설임에 틀림없다.



캐나다에서 "돈 없는" 이민자로 시작한 나는 아직 무탈하게 20년을 살아가고 있다. 취직이 합당치 않아 시작한 작은 사업이 - 말이 사업이지 이곳의 사업이란 대체로 인건비 정도 벌자고 하는 영세 구멍가게 수준이다 - "말아먹을" 경우의 수는 너무도 많았다. 식당을 운영하면서 떨어지는 매상 때문에 힘들어했던 때가 있었고, 건강이 문제가 되어 위기를 겪었다. 인간관계의 문제, 손님과의 다툼, 소방, 경찰, 시청 등 지역 공공 기관으로부터의 검열과 제제가 무서운 도전이 된 경우도 있다. 그럼에도 20년을 갈대처럼 살아남은 것은 행운이다. 그것도 우연한 기회에 마련한 부동산을 시작으로 돈은 좀 모은 경우라면 로또를 맞은 것에 다름 아니라고 스스로 비교하곤 한다.


영화 '해피 클리너스'에서 또렷이 숨겨진 한 단어를 찾으며 "행복"이다. 그러나 이 행복은 모든 것이 다 잘 될 때만 가지는 단어는 아니다. 가끔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접근해야만 하는 말이다. 망했다는 가시적 현실이 꼭 초상집일 필요는 없다. 많이 가져서 불행한 역설적 예화는 넘친다. 많은 재벌가에 돈 때문에 가족끼리 법정 다툼을 벌이는 소식 투성이다. 어느 해 가울, 근처 한인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복권에 당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부러워했다. 도대체 나는 복권을 산 경우가 없지만, 근처에서 복권이 되었다는 이야기는 자주 듣는 편이다. 그 금액의 일부로 누구는 교회에 헌금을 많이 했고, 복지 단체에 후원금을 내기도 했다지만, 이 사람은 1등 당첨자 없던 앞의 몇 번 복권의 누적된 금액을 받아 천문학적 부자가 되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 현 위치를 이탈해 유럽과 미국 등지로 소비 여행을 떠났다. 시도 때도 없이 걸려오는 자선 단체로부터의 전화를 피하기 위해서라고도 했지만 핑계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 부부는 웬일인지 이혼했고, 그는 미국에서 돈 문제 때문에 문제를 겪다 결국 거지로 전락했다는 코미디 같은 소식을 들었다. 복권에 얽힌 이런 나쁜 예화는 심심치 않게 많다.


행복을 언급한 이유가 또 있다. 행복은 소소한 훈련에 의해 그 보다 더 큰 행복을 받아들일 준비를 갖추기도 한다. 일상이 훈련터가 되어, 작은 실망조차 행복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 훈련의 종착점이다. 망했다는 불행이 자아를 낮추었고, 가족을 감사와 기쁨의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만드는 일이라면 그것을 다룬 영화는 행복한 영화다.



영화 "해피 클리너스"


이야기 속으로

 

뉴욕 퀸스 지역 프러싱에 이민 1세 가정의 부부는 소박한 세탁소 운영하며 살아가고 있다. 지역 교회에 다니는 집사로서 성실한 생활을 꾸려간다. 여느 부모처럼 아들은 의대에 입학하기를 열망하며, 버젓한 신랑에게 시집가 살아가기를 딸에게 바라고 있다. 그러나, 자식은 부모의 바람과 달리 대학을 중퇴하고 food 트럭을 고집한다. 뉴욕을 떠나 LA로 가서 장사하겠다는 포부를 내비치지만, 이 초라한 계획에 실망하는 엄마와 갈등은 깊어만 간다.


그러던 관계가 회복되는 계기가 있었다. 어느 날 아들 케빈은 할머니가 정성껏 만들어준 요리를 세탁소로 마지못해 배달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그런데, 그 시간 세탁소에서 한 해프닝이 일어나고 있었다. 백인 여자 손님이 세탁물에 대해 손해 배상을 요구하는 광경이다. 맡겼던 옷이 상했다면서 거금을 요구하고 있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엄마 아빠는 결국 돈을 지불하는 모습을 그는 이해할 수 없었다. 권리 하나 떳떳이 따지지 못하고 손님이 요구에 응한 부모를 보고 그는 예상치 않았던 연민을 느끼게 된다. 그다음 날로 그는 자신도 세탁소에 나가 일하겠다고 선언하며 부모를 놀라게 한다. 엄마는 그 갑작스러운 선언이 꼭 달갑지 만은 않다. 차라리 중단한 공부를 다시 하라고 부탁했지만, 아들은 임시로 도와주는 것이라며 안심시킨다.



소문날 갑질


여러 해 유지되어 오던 임대 계약 기간은 종료일로부터 이제 겨우 2개월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건물주로 부터 어떤 연락이 없다. 무소식은 불안의 증폭을 가져온다 했는데, 그 시점에 다른 건물은 월 임대료를 올렸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불안은 확신으로 바뀌었다. 빠듯한 수입이 오르는 임대료를 감당할 수 있을지 여부를 계산하고 있던 어느 날, 건물주의 아들이 찾아와서 시설과 내부를 훑어보았다. 지난 17년간 자신들에게 친절했던 건물주는 은퇴 후 일체를 아들에게 맡긴 상황이다. 이렇게 처음 인사를 온 건물주의 아들은 갑질에 고자세로 일관했다. 환경을 더 깨끗이 유지하라느니, 옷을 잘 입고 손님을 맞으라느니 하는 상식 밖의 행동을 하면서도 계약에 관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갔다. 증폭되어 가는 불안 앞에서 부부는 처분만 기다리는 막막한 심정이 되었다.

계약 만료 한 달을 남겨놓았을 때 건물주의 아들이 다시 찾아왔다. 그리고 지난번과 같은 목적 없는 텃새 남발이다. 이번에도 재계약에 관한 아무 이야기도 하지 않아, 할수 없이 그에게 꼭 짚어 물어봐애 했다. 그런데 재계약을 하지 않겠다는 답변은 너무도 의외였다. 그래도 일말의 기대를 했었는데, 그 말 한마디는 너무 허무하다. 겨우 버티며 붙잡고 있던 희망마저 무너져 내리는 순간이었다.


상실


사업체가 있는 건물이 재계약을 하지 않는다면 그 다음엔 두 가지 방안 밖에 없다. 다른 건물을 물색해 장소를 이전하든가 사업을 접는 일이다. 북미의 사업체 권리금은 비싸다. 그런데, 팔면 남길 수 있는 권리금 조차 잃을 위기에서 동분서주 찾아본 다른 장소는 녹록지 않았다. 설사 장소가 물색되어도 이전 및 시설비가 사업체 권리금만큼 들 것이다. 그래도 다른 장소로의 이전은 문 닫는 것보다는 나아서 남은 한 달 동안 여러 장소를 알아보았지만 세탁소로 건물의 일부를 운영하는데 달가워하는 곳을 찾기가 어려웠다. 사업은 그렇게 공중분해가 되고, 아빠는 다른 일자리를 찾아 트럭 운전을 하게 된다.


17년 동안의 정든 사업체를 접는 일은 한 가정에 지대한 영향력을 미치는 충격이지만, 당장 해결해야 할 재정적 상황은 눈앞의 불이다. 아들 캐빈은 무기력한 아빠의 모습을 질책했고, 불안과 분노로 치를 떨던 아빠는 아들의 뺨을 때리고 만다. 이에 질세라 아들 케빈은 그동안 바라 왔던 가출을 행동으로 옮긴다. 원래 꿈꿨던 푸드 트럭으로 자연스럽게 발길을 향해 LA로 옮겨간다.


화해


한편, 푸드트럭에서 음식 판매로 바쁜 캐빈도, 정신이 들자 아빠에게 심한 말을 하고 떠나 온 것에 대해 불편했다. 자신이 있는 곳은 알려주지도 않았지만, 그러던 어느 날 캐빈의 트럭에 아빠가 찾아와 모른 척 음식을 주문한다. 아들 친구를 통해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아빠를 알아본 캐빈과 아빠의 몇 마디 안부 인사였지만, 이미 서로에겐 더 할 수 없이 감격적인 재회나 다름없었다. 동시에 모든 오해와 불협화음은 눈 녹듯 사라진다.


엄마는, 딸 현희와 다툰 후 집 밖을 배회하며 겉돌고 있는 대니 - 딸의 남자 친구 - 를 불러 차 한잔 하자고 한다. 그동안 능력만 보던 의식이 '사람 됨됨이'를 볼 줄 알게 되었고, 오해로 막혔던 담이 무너졌다. 가출 했던 아들 캐빈이 돌아왔고, 그동안 일하면서 모은 돈을 엄마 용돈으로 선뜻 건낸다. 그리고, 아빠에겐 다른 사람의 세탁소 전체를 맡아 대신 운영해주는 일이 새롭게 생긴다.


한편 엄마는 대니를 초대하라고 딸 현희에게 말하고, 만찬을 준비된 식탁에서 온 가족이 저녁식사와 대화를 하면서 영화는 끝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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