잣대와 이기심
자신의 잣대에 출실한 것은 인지상정이다. 그것을 놓고 이기심이다 아니다 할 필요는 없다. 모두가 기본에 충실한 면이 있다면 타고난 동물적 근성이고, 사회성의 첫번 째 본능으로 자신의 잣대를 들이대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이 부분에 다른 면모를 보이거나 변화를 가져온다면 후천적 경험과 깨달음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남의 사정을 봐 줄 수 있는 여유로움, 혹은 객관화 능력이 생기는 경우다.
꼰대들의 자기 확신이라는 표현이 있다. 한자리하는 사람치고 거들먹거리며 기득권을 무기 삼아 고자세로 자기 판단을 남에게 강요한다. 안식일 39가지 규칙을 만들어 놓고, 마치 그것이 천국에 들어가는 조건인양 철저히 준수할 것을 강요하는 것이 약자들에겐 먹힌다. 쥐뿔도 없으면서 가진 척하고 싶은 사람의 심리를 이용한다. 그나마 이런 기득권 층에 기생해 이득이나 탐하는 것이 꼰대들의 확신을 더욱 키우고 만다.
일례로, 내가 어릴 적 교회 다닐 때는 불문율이 많았다. 교회에서 기타 치면 안 되고, 강대상에 평신도가 올라가면 벌 받고, 주일에 교회 안 오면 사고 나고, 목사님과 불화하면 저주받는다 등 무시무시한 것도 있었다. 그런데 지나고 나니 모두 다 뻥이었다.
사람의 심리를 이용해 이득을 보기가 가장 쉬운 곳이 교회 및 종교다. 그만치 심리적으로 약하던가, 최소한 쉽게 약해질 확률이 높은 사람이 모이는 곳이다. 상처에 대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으로 나온다.
물론 그중엔 설치기 좋아해서 나오기도 하고, 장사 속으로 나오기도 하고, 친구 따라 강남 오기도 하고, 이성에 끌려 나오기도 하지만, 심리적 약함에 대한 위로의 목적이 경험상 타당성이 가장 높다. 교회의 근본 목적인 복음의 이유는 물론 예외로 하고다. 천국을 빌미로 온갖 올무를 씌우는 습관이 종교 지도자들에겐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자신의 권위를 실천하는 현장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자신이 믿는 것에 대한 지나친 확신으로, 누군가 진리에서 이탈하는 걸 용납 못하기 때문이다.
예수의 안식일 병 고치는 일을 놓고, 종교지도자는 안식일의 법조문 자체에 초점을 맞췄고, 예수는 치료에 초점을 맞추었다. 종교지도자는 엄격했지만 예수는 '불쌍한 딸'의 아픔을 보고 있었다.
사랑에 근거한 행위는 반드시 주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친다. "모든 반대하던 자들은 부끄러워하고 온 무리는 그가 하시는 모든 영광스러운 일을 기뻐"하는 일이 생기게 되어 있다. 내 주위에도 이런 예화가 많다. 사랑에 근거한 행동이 어떻게 자존심 싸움을 중단시키는지 보았고, 갑론을박의 신경전에 일관된 해결책을 제시했다.
주) 꼴통: 외골수를 폄하적으로 부르는 명칭으로, 이 글에서는 종교 교리 자체에 치중해 지나치게 위선적으로 행동하는 회당장과 같은 지도자를 지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