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을 알 수도 없고 물어볼 수도 없는 모호한 상황 앞에서
제목과 선입견
글 제목이 난해 하거나 접근 거부 의사가 생길 정도라 해도 웬만하면 끝까지 읽으면 좋다. 부정적 표제에 대한 선입견은 두 가지 표현으로 형상화되는데, 글을 대하지 않거나, 괜하게 더 읽고 싶어지게 하는 쪽이다.
신문에 대서특필되는 범죄 관련 기사를 떠올려 볼 때, 많은 사람들은 범죄자의 죄질이 얼마나 나쁜가 힐끔댄다, 가끔은 이와 정반대 입장으로, 신문의 소용이 범죄 소식이나 퍼 나르는데 급급한 현실에 분개할 뿐 더 이상 그런 글을 보고 싶어 하지 않기도 한다. 제목 만으로도 이미 대부분이 소통되고 있다는 말이다.
SNS를 통해 동물에 관한 소식이나 영상을 접하다 보면, 적시에 잘도 찍은, 개와 고양이 등 동물 영상이 많다. 사람을 구하는 개, 개를 도와주는 고양이, 고양이의 빠른 손놀림에 속수무책 당하는 개, 사육사와 교감하는 돌고래 등 재미가 다양하다.
나의 경우, 즐겨 보는 영상은 언제나 동물의 귀엽고 예쁘고 이색적인 영상이 전부다. 그러나, 생존의 늪에서 동물끼리 물어뜯는 종류는 제목이나 헤드라인 영상에 이미 치워버리고 보려고도 하지 않는다. 동물의 죽음을 찍은 잔인한 영상에 반대 의견도 많아, 한 때 SNS 상 사용자 그룹들이 이런 것을 못 올리게 해 요즘은 자극적 영상이 많이 줄어든 분위기다.
섬뜩한 헤드라인
다른 예로, 얼마 전 JTBC 뉴스에 복날이라고 개고기를 사육하는 곳의 고발 뉴스가 나오려 하길래 너튜브를 꺼버렸다. 좁은 장소에 태어나서부터 잡혀 죽을 때까지 식물처럼 길러지는 개를 보는 것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저런 사업을 하는 사람은 빨리 세상에서 사라져야 한다"라고 외치고, 외국 선수들이 한국에 스포츠 경기 차 갔던 김에 사육되는 강아지 들을 가능한 한 많이 구출해 오는 과정에서, 추한 한국의 모습이 세계에 비쳤던 적도 있다.
그럼에도 한국은 이런 면에서 여전히 변하지 않는 것 같다. 동물 애호가와 관련 단체가 무수히 많고, 반려 동물을 키우는 인구가 급격히 늘어도 한쪽에서는 개고기를 즐기는 파렴치들, 그리고 그들을 겨냥해 돈을 벌려는 동물 백정 사업이 공공연하게 존재하는 조국의 모습으로 밥맛이 떨어진다. 선진국 대열에 버젓이 들어간 이 시점에도 국회의원들은 스스로가 즐기거나 개 식용가의 표를 의식하느라 관련 법 하나 완벽하게 고치지 못하고 있다. 물질적으로는 선진국이되 의식적으로는 여전히 후진 대열에서 머물러 있다는 비판을 듣는 이유다.
그렇게 제목이 주는 힘은 언론과 SNS가 힘이 세지면서 더 부각되는 요소 중 하나다.
어쩌다 보니 펜대가 제목 운운하는 곁길로 가버렸다. 본론의 취지는 아니다. 글을 대할 때 난해한 어떤 제목을 만나거든 선입견을 치우고 끝까지, 논지에 대한 궁금증으로 접해보라는 추천이다.
샬롬이라는 말은 많은 사람에겐 여전히 생소한 기독교 용어다. 히브리어로 평화 혹은 평강의 뜻인데, 교회를 오래 다닌 사람에겐 익숙하다. 만날 때 반갑다는 인사나 헤어질 때 잘 지내라는 말을 대신하기도 한다. 한국에 토착화된 기독교 문화에서 오랜 세월 그런 의미로 사용되었기 때문에 기독교에서는 흔한 용어 중 하나다.
이 샬롬이 ”애라 “라는 부정의 말을 엮으면 동과 서가 만난 것 같이 어울리지 않는다. 그럼에도 붙여놓아야만 하는 경우가 생겼다.” 애라“라는 자포자기적 상투어를, 다소 지성적이면서 외골수적이면서 철학적이면서 극히 종교적인 표제어에 갖다 끼워 맞춘 그런 신조어.
기독교를 늦게 받아들인 사람들, 그들에겐 이 샬롬이 어색하다. 친구 따라 강남에 오듯 교회를 다니는 사람은 너무도 자연스럽게 다들 안다는 식의 관행이 불편한 경우가 있다. 종교적 귀화보다는 견문과 친구 관계를 넓힐 목적으로 교회에 첫 발을 디딘 사람, 그들에겐 더욱이 그렇다. 아내의 에피소드다.
에피소드 샬롬
대학생이 되는 건 지식과 견문을 넓힐 출발점에 선 것과 같다. 바위틈에서 갑자기 쏟아지는 물에 관해 모세는 성경에 썼다. 없던 장소에서 전혀 그럴 법하지 않은 목적으로 스스로 끌려 교회를 나가게 됐다는 것이 아내의 고백이다. 학교 CCC 동아리를 이끄는 친구에게 영향을 받아 잠실 집 가까운 곳 교회를 선택했다.
언제나 누구에게든 열려 있는 곳이 교회지만, 생전 처음 대하는 이색 문화로 이질감을 느낀 것은 당연하다. 예배라는 것은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한 끈적함이 있다. 진정 누군가를 향하여 모인 무리가 존경과 감사를 드린다고 눈이 반짝인다. 목사님의 설교 강연은 알아들기 좀 힘든 데다 길고 지루한 면이 없지 않지만, 그러나 싫지 않다. 예배의 한 시간 남짓을 채우는 기도와, 찬송과, 대표로 나와 노래하는 특송도 재미있다.
예배의 격식 있는 순서 뒤에 여러 팀으로 나뉘어 성경공부 하는 시간은 일종의 해방감으로 짜릿했고, 피동적인 예배의 시간에서 능동적 대화가 오고 갈 수 있어 좋았다. 그리곤, 청년 대학부에서 시도 때도 없이 오고 가는 "샬롬"을 접해야 했다.
그리곤, 청년 대학부에서 시도 때도 없이 오고 가는 "샬롬"을 접해야 했다.
이는 무슨 말이냐? 어느 나라 말일까? 생각할 겨를도 없이 샬롬의 총알을 맞고만 있어야 한다. 이런저런 새로운 지식의 갈증은 어디 가고 어색 감이 말할 수 없이 몰려온다. 그렇다고 물을 수 없는 암묵적 불편함이 진실이 되었다. 혹시나 무식하다는 인상을 남길까 두려웠을 수도 있다. 체면이 뭐라고 탐구의 열정보다 강한 것이 한국인이다.
잘 알지 못할 때, 혹은 큰 관심이 없을 때는 마치 그 분야에 어느 정도 해박한 것 같은 착각을 갖게 하는 것이 성경이다. 그리고 그래야 하는지도 모른다. 기본 줄기가 간단하다. 그 줄기, 즉 핵심이 바로 복음이고, 이 논리를 알면 여타 꼬아서 기록된 여러 말들, 즉 율법이니, 예언이니, 족보니, 역사 등등 모두 학구적 욕망에 소재를 추가해 주는 것에 분명하다.
하나님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아들 예수를 대신 재물로 주어 모든 사람이 더 이상의 제사를 지내지 않아도 그를 믿는 것 만으로 구원과 영생을 얻는다는 줄기! 그 과정에 아담과 모세와 다윗과 다니엘과 삼손과 베드로와 바울의 이야기는 이해도 쉽고 재미있어 술술 넘어갈 수 있다. 일반 구원에 관한 기본 지식을 알면 그것이 기독교 교리의 다 인 냥 자만하는 사람도 있게 마련이다. 그리곤 난해한 구약의 기록이나 율법적 지식일랑 이미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 사건으로 파기된 것이라고 더 알고 싶지도 않은 분야가 된다.
학구열이 부각되어 뭔가 좀 알기 시작하면 끝도 없이 도전을 받아야 하는 것 또한 성경이다. 배우면 배울수록 모르는 것투성이다. 기본 원리 그 배후의 여러 파편 들은 이해는 되나 오래 지식에 머무르지 못하는 것 또한 기독교인의 신비다. 늘 새롭고 늘 배우게 되는 것이 성경의 원리인 것 같아 가끔 스스로가 우습다.
기독교 2000년 역사에 수많은 나라의 지도자들이 성경을 배우면서 인류를 발전시켜 왔다. 크리스천 리더들을 빼고 인류의 역사를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 때문인지, 어려서 교회를 스스로 다니기 시작한 나는 성경에 대한 의심이 생길 때면 세계의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 믿어 온 성경이기 때문에 나도 그냥 믿는다는 신앙을 유지해 온 것이다. 현명하다면 현명하고, 우둔하다면 우둔할 것이지만, 최소한 믿는다는데는 뒤떨어지디 않을 일이다.
초신자에겐 어리둥절한 것은 이외에도 많다. 기도원에 가서 기도해야 문제가 해결될 것 같은 암묵적인 동의와, 큰소리로 기도하는 일이랄지, 방언이라는 이상한 말을 크게 소리 지르며 기도할 땐 무섭기까지 하다.
샬롬이 이해되어 자유로워진 것은 한 두 해를 꾸준히 참석하고 난 뒤다. 어쭙잖은 객기로 야생에서 (학교 잔디밭에서) 기타 치며 혼자 노래하던 여인이다.
그러나 아내는 여러 해가 지난 지금도 샬롬을 쓰는 것을 나는 못 봤다. 기억 속 슬픈 잔재로 인한 파행이기도 하지만, 굳이 써야 할 만한 "청년적 환경"을 떠나왔기 때문에 일상의 교회 생활에서는 이런 말이 다소 과시적이고 오버한다는 뉘앙스 담겨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