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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차렷 경래 Jul 01. 2023

"일감"에서 "일꾼"으로

묵상 노트 (1)

메거진 “나는 매일 죽노라”는 삶을 꾸려나가는데 성경의 지혜를 구하며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시는 이와 함께한 묵상 기록의 흔적입니다. 한 발 한 발을 뗄 때 흔하게 접하는 방종의 소용돌이를 피하고, 바위 틈새에서도 발견되는 신실한 지혜와의 만남을 사진처럼 남기고 싶습니다.


그때에 제자가 더 많아졌는데 헬라파 유대인들이 자기의 과부들이 그 매일 구제에 빠지므로 히브리 파 사람을 원망한대, 열 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공궤를 일삼는 것이 마땅치 아니하니,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저희에게 맡기고, 우리는 기도하는 것과 말씀 전하는 것을 전무하리라 하니, 온 무리가 이 말을 기뻐하여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 스데반과 또 빌립과 브로고로와 니가노르와 디몬과 바메나와 유대교에 입교한 안디옥 사람 니골라를 택하여 사도들 앞에 세우니 사도들이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 (사도행전 6:1-7)


인간사에 없을 수 없는 원망의 모습이 성도 간에 생겨났다. 의도적으로 생겨난 일이 아니라, 모든 일을 권장하는 사람이 사도로 국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각각의 분야를 담당할 장로의 선출이라는 결과를 불러오는데, 이를 보면 장로의 역할이 무엇인가가 분명히 드러난다. 사도요 목사가 다 하지 못하는 분야, 즉, 섬기고 사랑하며, 자기의 시간을 줄여 공적인 일에 사용하고, 몸으로 뛰며 늘 깨어 있어 성도의 필요를 충족시켜 줄 수 있어야 한다.  이에는 안수를 받은 안수집사도 포함될 것이다.


안수집사가 되고 10년을 넘게 교회를 섬겼지만, 나의 행태는 이기적인 선을 넘지 못했다. 눈치 보았고, 시간이 없다는 핑계가 많았고, 무엇보다 교회 사랑의 마음이 터무니없이 적었다. 이민생활의 고된 일상이 나를 짓눌렀다는 핑계는 이민자 사이에 너무도 흔한 입발린 소리다. 사랑이 있으면 그리고 향하는 것이 원리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질문한 적이 많다. 왜 나는 교회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을까? 왜 나의 발은 교회보다는 일터로만 향할까? 주중 성경 공부, 토요 노방전도, 전도회 친교모임, 수요 및 새벽 예배 등 공적인 일에 할애하는 시간을 너무도 아까와했던 이율배반의 세월이었다. 신랑에게 사랑받는 여인이 남편을 사랑하지 못하는 경우를 상상했다. 그리고, 그렇기 때문에 노력하지 않았고, 그 결과할 수 없이 다니고 있는 나일론 신자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11년이 되는 시점에 연약한 나에게 은혜를 부으셨다. 연례행사인 부활절 특새에 참석하면서 기도와 예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었고, 그날부터 지금까지 새벽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이 지속되고 있다. 하나님의 "오래 참음"은 부모가 자식을 기다려 주는 인고의 세월과 비슷하듯, 새벽예배의 사모는 수요 예배마다 계속되는 12 소선지서 강해 등, 기존에 "무시"해 오던 성경에 대한 애착으로 이어졌다. 이러면서 몇 가지 걸림돌을 넘어야 했다.


첫째, 열심히 안 하던 사람이 갑자기 왜 저럴까 하는 타인의 예상되는 시선은 무시하기로 했다. 부끄럽지만, 이전 같으면 이런 예상 질문에 스스로 화가 나서 아예 그 일 자체를 포기하곤 했었다. 내가 그런 사람으로 비치는 것이 싫었다. 사실 남은 그렇게 생가하지도 않는데, 늘 앞서 나간 나의 부정적 의식은 불화를 초래했다. 그래서, 그런 나의 의식은 중요하게 여기지 않기로 했다.


"하나님이 이 일을 기뻐하실까? 이 질문만 하기로 했다.


둘째, 그 자리로 가기 위해서는 새가 철창을 벗어나듯 빠르고 명확한 판단과 행동으로 반응하기로 했다. 새벽에 일어나 졸린 눈과 찌뿌듯한 몸에 대해 묵상이 되기 시작하면, 새벽 예배의 감동을 먼저 떠올린다. 그리고, 빠르게 옷을 입고 문을 나서 버린다. 그러다 보니, 예배 보다 15-20분 전에 도착하는 착한 예배자가 된 느낌이 새롭기는 하다.


셋째, "장로가 되기 위한 포석이다"는 중차대한 남의 시선에 대해 한번 더 벽을 넘기로 했다. 하찮은 질문과 대답들이 교회에는 존재한다. 정치인이 싸우면 "왜 교회처럼 싸우냐"는 진담 같은 농담도 있다. 중요하지도 않고 바르지도 않은 질문에 일일이 답하는 것이 얼마나 헛된가를 실천하기 좋은 곳이 교회이기도 하다. 그냥 하나의 푯대를 향해 묵묵히 가야 하는 곳이 교회다. 말하지 말고, 크게 반응하지 말아야 말고, 입보다는 행동으로 보여줘야 하는 신자의 모범을, 늦었지만 이제라도 실천해 보고 싶은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이유가 있다.


늘 다른 사람에게 강조하곤 한다. 교회에서 하는 선거 때 후보로 등록되는 일을 절대 마다하지 말라는 것이다. 대부분 "나는 부족해서", "아직 준비가 안도어서"라는 단순한 이유로 거절 의사를 표명한다. 그러면서 스스로 겸손인 줄 아는 착각을 한다. 그러나, 이는 엄청난 교만이다. 나에 초점이 맞추어진 절대적인 이기심이 그 시작이기 때문이다. 시간을 내기 싫다거나 할 자신이 없다는 세속적 의식이다.  마치, 새벽 예배를 가야 하는데 내 몸이 찌뿌듯하다는 묵상에 지나치게 집착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래서, 신자라면 교회의 선거에는 순응해 가야 하고, 결과가 나쁘더라도 늘 그렇게 자기의 자리를 지키라고 말한다. 선거에서 일등으로 선출된 사람이 멋있는 것이 아니라, 선거에 떨여졌는데 그래도 자기의 자리를 지키며 꾸준한 사람이 멋있는 것이다. 사람들의 생각은 늘 똑같아서, 진짜 그 사람을 알게 되는 계기는 바로 이때다. 떨어졌다고 획 하고 교회를 나간다던지, 갑자기 엔진이 멈춘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그 사람에 대한 가치 있는 판단은 그다음 계기에 그 모습을 보아온 여러 사람들에 의해 재탄생할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는, 진짜 장로가 되었을 때 부끄럽지 않은 직분자로 준비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교회를 사랑할 수 있고 성도를 사랑하게 되며, 예배를 사모하고  성경을 배우고자 하고 열정을 소유하게 된다면 그는 누구든 준비된 일군이다. 그런 사람이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변화시켜 왔었다.


적용: 사도들이 장로를 뽑는 모습에서 직분자의 참된 모습을 묵상을 해 보았다. 나는 부족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전진하지 못할 거야 하는 생각을 접자. 새가 철창을 벗어나듯 아침을 탈줄하고 발을 교회로 향하자. 집에서 기도하고 예배드릴 수 있다지만, 기도의 깊이와 넓이가 성전에서 하는 것보다는 못하다. 성전에서 주님과 만나 읊조리는 나의 기도 소리에 응답하실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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